대선생사적(大先生事蹟)
선생의 성은 최(崔)요 휘는 제우(濟愚)이며,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 경주 후인(后人)이다. 휘 예(汭) 사성공(司成公)의 11세손, 정무공(貞武公) 휘 진립(震立)의 6세손, 산림공(山林公) 휘 옥(沃)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청주 한씨요 배필은 밀양 박씨이다. 가경(嘉慶) 익묘조(翼廟朝) 갑신년(1824년) 10월 28일에 경주 서부 가정리(稼亭里)에서 태어났다.
이때 하늘의 기운이 맑고 해와 달이 빛났으며 서기가 집을 에워쌌고 귀미(龜尾)의 봉우리에 꿩 울음소리가 사흘 동안 울렸다. 선생이 다섯 살이 되어 용모가 비범하고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서 산림공이 늘 아껴 길렀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기해년에 산림공이 돌아가셨다. 대선생이 3년 동안 상례를 치르고 난 뒤 가산이 점차 기울어지고 배우던 글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무예(武藝)로 2년을 보내다가 활을 간직해 두고 장사로 돌아서, 팔방을 주유(周遊)했지만 나이가 들어가도 뜻대로 되지 않아서 울산에 옮겨가서 살았다. 하지만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산정(山亭, 용담정)에 누워서 세상의 걱정을 풀어갔다.
을묘년(1855년) 3월에 산의 해가 더디는 속에 봄잠을 자고 있는데 어떤 늙은 중이 하얀 머리에 동안(童眼, 童顔의 오식인 듯함)을 했는데 용모가 청수했다. 늙은 선사가 절을 하고 말하기를 “소승은 본디 금강산 유점사(楡店寺, 楡岵寺의 오식)의 중입니다. 오래 불경을 읽었으나 한 가지도 효험이 없어서 백일(百日)의 공부를 해서 지성으로 빌었습니다. 공부를 마치는 날에 탑 아래에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어서 펼쳐보니 세상에서 없는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승이 아는 사람을 찾아 전해주려고 팔도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소문을 들으니 선생님이 박학하다고 해서 천리를 머다 하지 않고 찾아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책을 바쳤다.
대선생이 몇 번 펼쳐보니 문리를 풀기 어려웠고 유교 책인 것 같기도 하고 불교 책인 것 같기도 했지만 모조리 처음 보는 것이었다. 스님이 “여기에다 두고 물러갑니다. 3일 뒤에 다시 올 터이니 그 사이에 성심으로 밝게 살펴주시오?”라고 했다. 선생이 이 말대로 허락을 했다. 사흘 동안 과연 꿰뚫어 알게 되었다. 늙은 중이 다시 와서 축하를 올린 뒤 계단을 내려가서 몇 걸음에 사라져 보이지 않아 마음으로 기이하게 여겼다. 그 책에는 기도의 말이 들어 있었다.
병진년(1856년) 한 여름에 폐백을 받들고 책을 들고서 가까운 절의 한 중과 함께 양산 통도사(通道寺, 通度寺의 오식)의 천상산(天上山)에 들어가 3층의 제단을 쌓고 49일 동안 축원하려 했다. 그런데 47일에 이르러 생각해 보니 숙부가 죽어 복(服)을 입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치성을 드리는 것은 맞지 않으므로 곧 집으로 내려오니 숙부가 과연 작고를 했다. 복상 기간을 마치고 다시 기도를 드리려 생각했지만 재물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은 가산인 논 여섯 두락을 일곱 사람들에게 팔았다. 그러고는 바깥에 철물점을 열고 안에는 기도처를 두고는 다시 천상산(천성산)에 들어가서 정성을 다해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다.
무오년(1858년)에 이르러 가산이 탕진되고 빚이 산처럼 쌓였다. 논을 산 일곱 사람이 날마다 논을 내놓으라고 독촉을 해서 고통을 이길 수 없었다. 일곱 사람을 불러 모아 각각 소장을 만들어 주면서 함께 관가에 내서 그 처결을 받게 했는데 논은 먼저 산 사람에게 돌아갔다.
마을에 사는 어느 노파가 달려들어 욕설을 무수히 하면서 작폐를 부렸다. 대선생이 밀치니 노파가 땅에 엎어져 기절을 해 죽었다. 그녀의 아들 셋과 사위 둘이 사납게 부여잡고 말하길 “사람을 죽이면 법에도 아들이 복수한다 했다. 만약 살릴 수 없다면 관아에 보고할 것이다”고 했다. 대선생이 몸소 시체 곁에 가서 맥을 짚어보고 몸을 만져보니 아주 죽어 있었다. 그래서 한 자쯤 되는 꿩 꼬리를 목구멍에 넣으니 이목(耳目)과 목구멍에서 한 사발의 피를 토해내고 돌아누웠다. 대선생이 그 아들들을 불러 맑은 물을 입에 넣게 했다. 노파는 곧바로 살아났다. 이 때문에 대선생이 신명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기미년(1859년)에 이르러 거처가 정해지지 않아 한 몸을 간직하기도 어려워 식솔을 거느리고 용담의 옛 집으로 돌아와서 살았다. 그러고는 세상의 시끄러움을 벗어나려(이하 일곱 자 의미 불통) 의관을 폐하고 명호를 고치고는 맹세코 산 밖을 나서지 않을 생각을 하였으며 처자를 경계해 심성을 닦게 하고 세상을 구제하는 도를 넓히려 했다.
경신년(1859년) 4월 초 5일은 곧 장조카 맹륜(孟倫)의 생일이었다. 의관을 보내 잔치 자리에 모시고 참석케 했는데 몸이 갑자기 떨리고 한기가 돌아서 견딜 수가 없었고 정신이 혼미해 미친 듯, 취한 듯 넘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마루에 오르니 기운이 차갑고 몸이 떨리는 병은 증세를 종잡을 수 없었고 말은 요령부득일 즈음에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지만 알아먹지를 못했다. 공중을 향해 무릎을 꿇고 묻기를 “누가 무슨 말을 하는가?”라고 하니 가로되 “내가 상제(上帝)다. 네가 상제를 아지 못하느냐? 너는 백지를 펴놓고 나의 영부(靈符)를 받아라”라고 했다. 분부를 받들어 백지를 펴놓았더니 종이 위에 뚜렷하게 물건의 형체를 띤 부적이 보였다.
상제께서 이르길 “너는 붓으로 이를 써서 불에 태워 깨끗한 그릇에 담아 찬물을 타서 마셔라”라고 했다. 대선생이 곧바로 한 장을 태워서 마셨더니 냄새도 나지 않고 맛도 없었다. 상제께서 이르되 “너는 나의 아들이니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라”라고 했다.
대선생이 분부를 받들어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러자 상제께서 이르길 “이 부적은 곧 삼신산의 불사약이다. 네가 어찌 알리오?”라고 했다. 대선생이 드디어 수 백 장을 베껴서 연달아 마신 지 일곱 여덟달 만에 몸이 불어나서 병이 나았고 용모가 바뀌었다. 그때 시를 짓기를 “하수가 맑고 봉황이 우는 걸 누가 알리오, 운수가 어느 곳에서 오는지 내 아지 못하노라
상제께서 이르되 “너를 백의재상(실제 벼슬하지 않은 재야의 선비를 높이는 말) 제수해 줄까?”라고 하자, 대선생이 말하길 “상제의 아들로써 어찌 백의재상이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제께서 “그렇지 않다면 내가 조화(造化)를 주겠노라”라고 했다. 대선생이 시험삼아 내키지 않은 척 하자 상제께서 이르길 “이 조화를 행한 뒤 다시 저 조화를 받아라”고 했다. 대선생이 공경하게 받으니 이 조화, 저 조화가 모두 이 세간이 가진 조화였다. 만약 이로써 사람을 가르친다면 장차 사람을 그르칠 것이라고 하여 또한 즐거워하지 않았다.
상제께서 또 조화를 주면서 가로되 “이 조화는 진정 좋은 조화이다”라고 하자 대선생이 힘써서 행했으나 이 또한 이전과 같았다. 그래서 곧 아뢰기를 “지금부터는 조화의 가르침을 맹세코 봉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식음(食飮)을 끊었다. 그러자 11일 동안 한 마디의 가르침도 없었다. 한 달이 지난 뒤 상제께서 가로되 “아름답도다. 너의 절개여! 너에게 끝없는 조화를 내릴 터이니 천하에 포덕(布德)하라” 라고 했다.
대선생이 공경히 분부를 받들어 수심정기(守心正氣)로 수련을 하니 자연의 이치에 어긋남이 없었다. 용담가(龍潭歌) 처사가(處士歌) 교훈가(敎訓歌) 안심가(安心歌)를 짓고 또 주문 을 짓고 강령(降靈)의 글을 지어 자식과 조카들에게 전수해 주었다. 또 고자주(告字呪)와 법제주(法制呪)를 지었지만 현기(玄機)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비장해 두어 세상에 행해지지 않게 했다.
어느 날 상제께서 이르되 “너는 내일 친산(親山, 아버지의 묘소)에 가서 성묘(省墓)를 하라”라 고 했다. 대선생이 이튿날 성묘하러 나가려고 하니 하늘에 마구 큰비가 와서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상제께서 독촉해 이르길 “걸음이 어찌 더디고 느리냐?”라고 했다. 대선생이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는데 옷이 젖지 않았다. 조카 집에 이르러 종과 말을 빌려 50리를 왕래했는데 한 점 햇빛이 가는 길을 비치어 사람과 말이 젖지 않았다. 조카 맹륜이 크게 기이하게 여겨 드디어 입도했다.
상제께서 이르길 “너의 앞날의 화복을 내가 간섭하리라. 그러하지만 네가 이 정자에 들어오는 날에 명호(名號)를 바꾸고서 산 밖에 나가지 않기를 맹세하고 이른바 입춘의 글을 썼는데 거기에 ‘도의 기운이 길이 온전한데 사(邪)가 들어갈 수 없고 세간의 뭇 사람들 함께 돌아가지 않네
신유년(1860년) 봄에 포덕문(布德文)을 지었다. 6월에 이르러 풍문을 듣고 오는 이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혹은 스스로 전도(傳道)를 하기도 하고 혹은 사람을 시켜 전해주기도 하는데 전해주는 것은 다만 21자 뿐이었다. 그 도를 천도(天道)라 이르기도 하고 또는 동학(東學)이라기도 했다. 동이라 이름한 것은 동쪽에서 나와 동쪽에서 받아 동쪽 서쪽을 구별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것은 성경신(誠敬信) 석 자인데 입으로 전해주고 마음으로 주어서 수심정기(守心正氣)하게 했다. 실행하는 것은 식고(食告)요 출입할 적에는 반드시 부모에게 알리는 것이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이요 욕망을 버리고 여색을 멀리하는 것이요 나쁜 고기를 먹지 않는 것 등이다.
11월에 전라도로 나들이 갈 적에 최중희(崔仲羲)를 데리고 성주(星州)에 들려서 충무묘(忠武 廟)에 배알하고 나서 남원 서공서(徐公瑞)의 집에 이르러 열흘쯤 머물면서 아름다운 산수와 순박한 풍토를 두루 유람했다.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미투리를 신고서 은적암(隱跡庵)에 이르렀다. 해가 저물고 제석(除夕, 섣달 그믐)이 다가와서 송구영신(送舊迎新)의 감회를 금하기 어려웠고 하룻밤의 반 동안, 집을 생각하고 벗을 그리는 마음이 천리의 바깥에서 더욱 절실했다. 차가운 등잔불 아래 외로운 베개를 안고 이리저리 뒹굴다가 애써 도수사(道修詞) 논학문(論學文) 권학가(勸學歌)를 지었다.
임술년(1861년) 봄 3월에 고을의 서천(西川) 백사길(白士吉)의 집으로 돌아와 최중희(崔仲羲)를 시켜 집에 편지와 가사를 보내고 박대여(朴大汝)의 집에서 은거하면서 사람들이 아지 못하게 했다. 이때에 해월선생(海月先生)이 마음속으로 알고 찾아뵈었다. 6월에 이르러 수덕문(修德文)과 몽중가(夢中歌)를 지었다. 때때로 강원보(姜元甫)의 집에 가서 머물기도 했다.
7월에 이르러 집으로 돌아오던 날, 말을 타고 오다가 회곡(回谷)의 길 위에 이르렀다. 그때 말이 갑자기 멈추자 동행하는 사람 대여섯 명이 고삐를 끌어도 가지 않았고 채찍을 쳐도 나가지 않았다. 이윽고 앞길에 가로놓여 있는 높이가 일곱이나 여덟 발이 되는 언덕이 우레소리를 내면서 무너졌다. 그때에야 말이 느릿느릿 논두렁을 걸어갔다. 말이 어찌 신령이 준 느낌을 알았을까?
며칠 뒤에 또 박대여의 집으로 갈 적에 큰 비가 쏟아져 냇물과 도랑이 넘쳤다. 여러 사람이 모두들 가지 말라고 말리니 대선생이 말하되 “어찌 물이 넘치는 걸 근심하리오”라고 하고 끝내 말을 타고 고삐를 잡고서 건너는데도 옷이 젖지 않았다. 박대여의 집에서 머물렀다.
이때에 경주부에 윤선달(尹先達)이란 자가 있었는데 영장(營將)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 영장을 꼬드겨 말하되 “이 고을에 사는 최선생이 제자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있다. 만약 그를 잡아들인다면 제자 한 명마다 돈 1냥을 거두어 내도 1천여 냥을 뇌물로 낼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영장이 달갑게 듣고서 차원(差員)을 보내 잡아들이게 하였는데 곧 9월 29일이었다. 비록 분을 이기지 못했지만 성화(城化)를 생각해서 제자 열 명쯤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억지로 갔다. 서천변(西川邊)의 동쪽 물가에 이르니 빨래하는 여인들 백여 명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우러러 보았다. 대선생이 의아해 했다. 관아에 들어가니 영장이 말하길 “너는 한낱 한사(寒士)로 무슨 도덕이 있다고 세상을 현혹시켜 무리를 모으며 의원도 아니고 점쟁이도 아니면서 무엇으로 생계를 삼느냐?”라고 했다. 대선성이 가로되 “하늘의 명을 성품이라 이르고 성품 거느리는 걸 도라 이르고 도 닦는 걸 교라 이른다
성난 눈으로 영장을 바라보니 영장이 그 위엄을 보고 정숙해 하면서 감히 말을 붙이지 못하고서 곧바로 풀어주었다. 사방에서 몰려온 선비 6백, 7백 명이 관정으로 돌입해서 윤선달을 수색해 찾으니 윤선달이 벽장 속에 숨었다. 영장이 간곡하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영장이 잘 대우하는 것을 보고 모두들 물러나왔다. 빨래하는 여인들이 우러러 보고 축수한 연고를 물어보니, 곧 서쪽 하늘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었기 때문이라 했다. 영장이 사람을 시켜 가시를 짊어지고 사죄를 했다.
본관사또의 예리(禮吏, 禮房)가 문안을 드린 뒤 아뢰기를 “내아(內衙)에서 병환이 있어서 영부(靈符)를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대선생이 묵념을 한 뒤에 예리에게 이르기를 “병이 이미 나았다”라고 했다. 예리가 돌아가 사또에게 아뢰니 병이 과연 나아서 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경주부에서 대엿새 머문 뒤, 10월 초 5일에 용담으로 돌아와서 각 곳에 통문을 보냈다. 이달 보름에 막 밤에 책을 읽고 있으니 갑자기 상서로운 기운이 달처럼 문에 비치어서 문을 열어보니 채색 구름이 영롱했다. 집사람이 말하길 “동구나무 위에 한 미녀가 초록 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입고 어여쁘게 앉아있습니다”라고 했다. 대선생께서 선녀임을 알고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고 일렀다.
11월에 흥해(興海)에 사는 손봉조(孫鳳祚)의 집에 가서 어린이들에게 필법(筆法)을 가르쳤는데 몸소 며칠 동안 글씨를 썼으나 하나도 글자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장지(壯紙) 세 묶음만 허비했다. 끝내 글자를 이루지 못했다. 상제께서 이르되 “뒷날 반드시 필법을 내려 주리니 그만 두어라”라고 했다. 대선생이 화답하는 결시(訣詩)를 지었는데 거기에 “송송백백청청립(松松栢栢靑靑立, 상제가 부른 것)이라”고 했으며 “지지엽엽만만절(枝枝葉葉萬萬節, 대선생이 대답한 것)
섣달 초 어느 날, 대선생께서 친히 각 곳의 접주(接主)를 정하고 경주의 백사길(白士吉)과 강원보(姜元甫), 영덕(盈德)의 오명철(吳命哲), 영해(寧海)의 박하선(朴夏善), 대구(大邱)와 청도(淸道)의 김주서(金周瑞), 청하(淸河)의 이민순(李民淳), 연일(延日)의 김이서(金伊瑞), 안동(安東)의 이무중(李武中), 단양(丹陽)의 민사엽(閔士燁), 영양(英陽)의 황재민(黃在民), 영천(永川)의 김선달(金先達), 신녕(新寧)의 하치욱(河致旭), 고성(固城)의 성한서(成漢瑞), 울산(蔚山)의 서군효(徐君孝), 경주(慶州)의 이내겸(李乃兼) 장성(長城)의 최중희(崔仲羲) 등 사람들이다.
계해년(1862년) 정월 초하루에 상제께서 비결을 내리시기를 “도를 들은 오늘 무얼 알리오, 뜻은 새해인 계해년에 있구나”라고 하였다. 초 6일에 이르러 대선생이 용담의 본댁으로 돌아오셨다. 선생(최시형)도 검악의 본댁으로 돌아왔다. 2월에 대선생이 영천(永川)에 사는 이이방(李吏房)의 집으로 가셔서 아이들에게 필법을 가르치고 나서 신녕에 사는 하치욱의 집에서 머물렀다. 3월 초 9일에 본댁으로 돌아와서 작은아들 세청(世淸)과 김춘발(金春發) 성일규(成 一圭) 하한룡(河漢龍) 강규(姜奎)에게 필법을 가르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진서(眞書)와 액자(額字)가 왕희지(王羲之)에 못지 않았다. 명망을 듣고 오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4월에 영덕 사람 강수(姜洙)가 와서 수도(修道)의 절차를 물으니, 신성경(信誠敬) 석자로 대답하였다. 이때에 선비들이 모여 들어서 자리를 꽉 채웠다. 대선생이 말하길 “지금 최경상(崔慶翔)을 북접(北接)의 주인으로 정하노라. 이 뒤로 왕래하는 선비들은 매번 먼저 검곡(劍谷)을 거쳐서 오라”라고 하였다.
5월에 이르러 영해에 사는 이진사(李進士, 진사는 급제자의 호칭) 곧바로 용담으로 들어오니 대선생이 검곡을 거치지 않고 온 걸 알고서 크게 꾸짖기를 “그대의 자세와 긍지가 이렇게 무례한가?”라고 하니 이진사가 사죄하고 주인댁에 가서 사과하고 갔다.
6월 초순에 선생이 용담으로 가서 대선생을 뵈오니, 얼굴에 근심스런 기색이 있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그 연고를 물어보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튿날 접주를 없앤다는 통문을 보내고서 도수사(道修詞)를 지었고 또 시 한 구절을 지었는데 “용담의 물이 홀러 사해의 근원 이 되고 구악에 봄이 돌아 한 세상 꽃이 피었다
8월 13일에 선생이 예닐곱 선비들과 함께 배알하러 갔더니 대선생이 말하시길 “추석이 가까이 오는데 무슨 연고로 왔는가?”라고 하니 선생이 말하길 “모시고 추석을 지내려 왔습니다”라고 하자 대선생이 기쁜 기색을 띠었다. 14일 저녁에 이르러 가을달이 밝게 빛나고 화기(和氣)가 마루에 가득했는데 주문을 외우고 학문을 논하면서 새벽에 이르렀다. 대선생이 모두들 물러가 침소에 들라고 이르고 나서 특별히 선생에게 방으로 들어오라고 분부했다.
한참 묵념을 한 뒤에 이르시길 “담배를 가져오라”라고 하였다. 선생이 정신이 혼미하고 몸을 움직일 수도 대답을 할 수도 없어서 마음이 불안했는데 한 시쯤 지나자 대선생이 이르기를 “어찌 담배를 가져오지 않고 묵묵히 앉아서 일어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정신이 평상으로 돌아오고 몸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곧바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길 “이게 조화의 징험이다. 삼가서 누설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15일 새벽에 대선생이 가로되 “그대는 이 운수를 아는가? 이 도는 유불선(儒佛仙) 세 도를 겸했느니라. 오륜을 밝히고 삼강을 세우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이게 곧 유도이다. 도량을 정결히 하고 자비의 마음을 지키며 묵묵히 앉아서 독경하는 것은 이게 곧 불도이다. 정신을 모으고 청렴정직해서 세상의 근심을 끊는 것은 이게 바로 선도이다”라고 하고는 좌우를 돌아보면서 가로되 “지금 한 구절의 시를 너 경오(敬悟)에게 주노니 하늘에 아뢰고 받아 평생 잊지 마라”라고 했다. 어린애 김춘발(金春發)을 불러서 먹을 갈게 하고 붓을 잡아 써서 주시기를 “용담의 물이 홀러 사해의 근원이 되고 검악에 사람이 있어 한 조각의 마음일래”라고 하였다. 선생이 공경히 받아서 돌아왔다.
그믐날 선생이 또 장석(丈席)에 갔더니 박하선(朴夏善) 백사길(白士吉) 이사겸(李事兼) 박대여 (朴大汝) 이무중(李武中) 최중희(崔仲羲)가 이미 와있었다. 대선생이 이르되 “청하(淸河)에 사는 이경여(李敬汝)가 사람의 음해를 입어서 귀양을 가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납속(納續)을 해서 귀양살이를 풀어주어야 할 텐데 누가 이를 처리하는 게 좋은가?”라고 하였다. 선생이 가로되 “마땅히 제가 조치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이내경(李乃兼)과 함께 영덕(寧德, 盈德의 오식) 접주 오명철(吳明哲)의 집에 가서 3백여의 돈을 모아 2백 50냥을 납속하고 비용으로 50여 냥을 사용했다. 이렇게 이경여의 귀양살이를 풀어주고 장석에게 아뢰었다.
이때 집안 안팎이 매우 정결치 못해 아이를 불러 청소를 하였다. 그러자 대선생이 성이 나서 이르되 “그대는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내느냐? 나는 명년에 또 어디에 있을지를 아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씀에 따르겠다고 아뢰었다. 대선생이 더욱 노여워하면서 이르길 “공을 이룬 자는 가라. 내가 과연 헛일을 했구나. 전혀 너의 운수이다”라고 하면서 담뱃대를 들어 재떨이를 두들겼다. 황송함을 이기지 못할 적에ᅵ, 기운을 풀면서도 성을 내서 이르기를 “담배에 불을 붙여 가져오라”라고 하자 선생이 그대로 따랐다. 대선생이 이르기를 “그대는 불안한 마음이 있는가?”라고 하니 선생이 아뢰길 “공을 이룬 자는 가라고 하셨는데 저는 과연 헛일을 했습니까? 무슨 일인지 아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제자의 마음이 두렵기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대선생이 가로되 “앞으로 뜻대로 되지 않을 일이 있을 것이기에 저절로 성내는 말이 나왔다. 그대 때문만은 아니다. 이 운수는 전적으로 그대를 위한 것이니 예사롭게 듣지 말라”라고 하였다. 며칠 시종한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1월 생신 때에는 용담에서 모두 모일 생각으로 통문을 각 곳에 보냈다. 20일에 이르러 장석에 갔더니 대선생이 이르시길 “이번의 생일은 번거롭게 하지 마라”라고 하니 선생이 말하길 “스승을 공경하는 도리는 각자 신의에 나오는 것이니 어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25일을 시작으로 해서 많은 선비들이 많이 모여 마치 3천의 반열과 같았다. 28일에 잔치 자리를 베풀고 예식을 올리니 화기가 훈훈하였다.
대선생이 좌우를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천황씨(天皇氏, 중국 상고 전설의 황제)라고 이른다”라고 하고는 곧 한 구절의 시를 내려주었는데 “내 마음 끝까지 생각하니 묘연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마치 햇빛을 따라 그림자가 비치는 것 같구나
선생이 아뢰기를 “북접에 풍습(風濕, 습기로 뼈마디가 저리고 아픈 병)이 크게 번져 공부를 그만두는 자가 많습니다”라고 하니 대선생이 대답하시길 “물러가서 문사들과 상의해서 소장(疏狀)을 꾸며 천주에게 소구(訴求)하라”라고 하였다. 영해 사람 박하선(朴夏善)이 소장을 지어서 장석에 나아가니 대선생이 이르되 “내가 천명을 받아서 제서(題書)를 얻었노라”라고 하고 드디어 붓을 잡아 하늘에 아뢰었는데 제사는 “얻기도 어렵고 구하기도 어려우나 실지로는 어려운 게 아니다. 마음이 화평하고 기가 화평하니 봄의 화평을 기다리노라”라고 하였다.
대선생이 그 전에 꿈을 꾸었는데 햇빛의 살기가 왼쪽 허벅지에 붙어서 불로 변했다. 밤새도록 사람 인(人)의 글자를 썼다. 꿈을 깨고 나서 허벅지를 보니 한 점의 붉은 흔적이 사흘 동안 드러나 보였다. 그래서 마음으로 재화(災禍)가 장차 이를 것을 알았다. 이때에 시석(矢石)의 법을 가르치고 강화(降話)의 가르침을 거두었다.
대선생이 늘 여러 유생에게 이르기를 “개벽(開闢) 이래로 상제와 더불어 문답한 말이 있었던가? 천운(天運)이 순환해서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게 없으니 이게 곧 5만년 무극(无極)의 도이다. 그러므로 예전에도 듣지 못했고 지금도 듣지 못했으며 예전에도 견주지 못했고 지금도 견주지 못하는 법이다. 세상 사람들이 도를 헐뜯는 것은 혹 그럴 수도 있지만 공경하고 조심해라”라고 하였다.
11월에 불연기연(不然其然)을 지었고 또 팔절구(八節句)를 지었다. 섣달 보름 사이에, 선생이 가서 수도의 절차를 물었더니 대선생께서 근심스런 기색을 띠어 마음으로 의아해 했다. 며칠 시봉을 하고 물러나오면서 새해를 맞이해 다시 오겠다고 아뢰었다. 그랬더니 대선생이 이르길 “그대가 온다면 번거로우니 과세를 지낸 뒤 정월 초 23일에 오라”라고 하고 두세 번 엄하게 분부하여 어쩔 수 없이 분부를 받들고 물러나왔다.
25일에 이르러 대선생이 여러 제자를 물리치고 홀로 골방에 앉아서 촛불을 켜놓고 밤을 지세우면서 앉았다 누웠다 불안해하였다. 전일에 경주부에 사는 도인이 와서 아뢰기를 “삼가 들으니 묘당(廟堂, 조정의 별칭)에서 대선생님을 해치려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리 피신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선생이 가로되 “옳지 않도다. 내가 만약 피신한다면 그대들은 어찌될 것인가?”라고 하였다. 뜻밖에도 이날 선전관 정구룡(鄭龜龍)이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경주부에 와서 많은 나장(羅將)을 거느리고서 용담에 몰려들어 왔다. 그러고는 “어명이다”라고 외쳤다. 대선생께서는 안색이 변하지 않고 순순하게 오라를 받아 잡혀갔다. 그 광경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그 무렵 모시고 있던 제자 10여 명도 잡혀갔다.
곧바로 경주부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경주에서 출발해 영천(永川)에 이르렀는데 하례(下隸, 군졸) 무리들이 극악하고 패악스럽게 굴었다. 대선생이 말 위에 있으면서 노기를 품으니 말발이 땅에 붙어 발걸음을 떼지 못하였다. 하례 수십 명이 놀라마지않아 사죄하기를 “소인들이 진정 선생을 아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비읍건대 선생께서는 분부를 내려 편안하게 가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니 그제야 말이 곧바로 발걸음을 떼었다.
영천읍에 이르러 잠을 자고 이튿날 대구 감영에서 잠을 잤고 이어 선산과 상주에서 잠을 잤다. 정구룡이 조령(鳥嶺, 새재) 위에 도인 수천 명이 모여 있으면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화령(化寧)으로 길을 잡아 보은에 이르러 숙소를 잡았다. 그때 수리(首吏, 으뜸 구실아치)인 양계희(梁啓熙)가 도인이어서 성심으로 접대를 한 뒤에 필요한 물품과 돈을 바쳤다.
이튿날 청주와 직산(稷山)과 오산(烏山) 장터에서 각각 머물고는 과천읍(果川邑)에 이르렀는데 곧 12월 초 8일이었다. 철종(哲宗)이 승하(昇遐)했다는 보고가 들려서 이 고을에 머물렀다. 대선생이 가로되 “나는 비록 죄인이나 대대로 녹을 받은 후예이다. 곡반(哭班)을 베풀어 북쪽을 바라보면서 곡을 하겠노라”라고 하였다. 며칠 뒤에 죄인을 돌려보내 해영(該營, 담당 감영)에 가두어 추고(推考)하라는 전교(傳敎)가 내려졌다.
이튿날 과천에서 길을 떠나 조령으로 가는 길을 잡았다. 문경 초곡(草谷)에 이르자 수백 명의 도인들이 혹은 횃불을 들고 따르고 혹은 눈물을 흘리면서 바라보았다. 29일에 유곡역(幽谷驛)에 이르러 과세를 하였다. 갑자년(1862년) 정월 초 6일에 대구 감영에 도달하였다. 그때 경상감사는 곧 서헌순(徐憲淳)이었다. 상주목사를 명사관(明査官)으로 지정하고 별도로 장령(將令)과 나졸(羅卒)을 정하고는 도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이때 선생이 바깥에 있으면서 분주하게 돌아다녔는데 영덕(盈德)에 사는 유상호(劉尙浩)에게 돈 백여 냥을 마련케 하여 여러 통로에 뇌물을 쓰면서 옥사장(獄司匠, 獄司長의 오류)의 집에도 던져 주었다. 몸소 사환이 되어 머리에는 무명 수건을 쓰고 옥중을 드나들면서 조석으로 공양을 하였다.
20일에 이르러 순찰사(巡察使)가 불러들여 묻기를 “너는 무슨 도로써 세상을 속여 무리를 모았느냐?”라고 하니 대선생이 가로되 “사람을 가르치고 주문을 외우게 하면 병이 나으니 약을 쓰지 말게 하고 어린애들에게 붓을 잡아 글씨를 쓰게 해서 글씨 법을 가르쳤소. 내가 무리를 모은 게 아니라 무리가 저절로 온 것이오. 이게 어떻게 세상을 속인 것이오?”라고 하였다. 별로 문답할 게 없어서 그대로 감옥에 가두게 하였다. 2월에 이르러 엄한 형벌을 가하였다.
두 번째 조사를 할 때 몽둥이 아래에서 큰 우레 소리가 들렸다. 순찰사가 놀라 그 연고를 물으니 나졸이 아뢰기를 “죄인의 다리가 부러지는 소리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해서 도로 감옥에 가두게 하였다. 선생이 감옥을 드나들면서 대선생을 직접 뵈온 지 수십 일이 되었을 적이다. 몸소 감옥에서 한 구절의 시를 지어 담뱃대에 넣어 주면서 문밖에 나가 열어보라고 일렀다. 그 시에는 “등불이 물 위에 밝아 혐의 틈이 없는데 기둥이 썩은 모양이지만 버티는 힘은 남아 있도다
3월 초 10일에 이르러 조정의 비답(批答)에 따라 대선생이 정형(正刑)을 받았다. 천지가 캄캄하고 일월이 빛을 잃었다. 사흘이 지나 순찰사가 처자를 풀어주고서 시체를 수습해 가라고 일렀다. 백사길(白士吉) 강원보(姜元甫) 이내겸(李乃兼) 최동철(崔東哲) 이경화(李京華) 성일구(成一龜) 조상빈(趙常彬) 형제와 박명중(朴命仲)의 숙질과 정생(丁生) 등이 각 곳으로 귀양살이를 갔으며 그 나머지는 풀어주었다.
김경숙(金敬叔) 김경필(金敬弼) 정용서(鄭用瑞) 곽덕원(郭德元) 임익서(林益瑞) 김덕원(金德元) 등 여러 유생이 시신을 수습해 길을 떠나 자인현(玆仁縣) 서쪽 후연(後淵)의 주막에 이르니 날이 저물었다. 점주(店主)에게 오늘밤 재워줄 것인지 물어보니 점주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어서 대구에서 왔다고 대답하였다. 점주는 시체를 방안에 받들어 모시고 길손들이 방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밤을 지난 뒤에 염구(殮具)를 가지고 방안에 들어가서 자세히 시체를 살펴보니 머리 아래 칼 흔적이 다시 한 줄로 연이어져 있었고 금빛이 하나로 둘러 있었으며 사체가 모두 따뜻해 취침하는 모양과 같았다.
회생할 가망이 있을 것 같아 시신 곁에서 지키고 있었더니 쌍무지개가 연못에서 일어나 하늘 위로 뻗었으며 상서로운 기운이 옹위하여 골짜기가 영롱하게 빛났다. 사흘 뒤에 구름이 걷히고 무지개가 개었다. 그제야 따듯한 체온이 식어서 처음으로 차가워졌으며 시신의 냄새가 풍겼다. 이튿날 염습을 해서 길을 떠나 용담의 서쪽 언덕에 묻었다. 아아, 구미의 기이한 봉우리와 기이한 돌이 오열해 눈물을 흘리는 듯하였다. 사모님이 자녀를 거느리고 함씨 집에 한 달을 묵은 뒤 단양 민사엽(閔士燁)이 김경순과 김경필을 보내 여러 날 모시고 지내다가 정선(旌善) 문두리(文斗里)로 옮겨 살게 하였다.
정묘년(1865년) 봄에 선생이 사모님을 모시고 상주 동관암(東關巖, 東觀音의 오류) 육생(陸生)의 집에 살게 하였다. 맹륜씨와 유상호(劉尙浩)는 도를 어지럽힌 사람인 최문약(崔文若)의 자복에 따라 멀리 귀양살이를 갔다. 상주 접주 황문규(黃文圭)가 성심으로 주선을 해서 옥바라지 경비를 많이 보탰으며 민사엽(閔士燁)은 3백금의 재물을 내서 옥졸들에게 나누어주어 하예들의 마음을 샀다.
성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성심으로 일을 돌본 사람은 곧 맹륜씨와 하치욱(河致旭) 박하선(朴河善) 이경여(李敬如) 최규언(崔奎彦) 성한서(成漢瑞) 하처일(河處一) 김주서(金周瑞) 서군효(徐君孝) 박여인(朴汝仁)과 의령 사람 강선달(姜先達) 임익서(林益瑞) 임근조(林根祚) 김덕원(金德元) 김석문(金碩文) 오명철(吳明哲) 곽덕원(郭德元)이다.
영덕 영해 두 접소에서 6백 냥, 흥해 연일의 두 접소에서 3백 냥, 평해 울진 두 접소에서 3백 50냥, 안동 영양 두 접소에서 5백 냥을 연달아 비용으로 보내왔다. 곽덕원은 허리에 새끼를 두르고 머리를 늘어뜨려 얼굴에 칠을 하고서 날마다 세 끼에 좋은 음식을 지어 올리면서 3년을 마쳐 이처럼 제자의 도리를 다하였다.
정묘년(1867년)에 사모님이 상주 동관암(동관음의 오류)에 있을 때 황성백(黃聖白)이란 자가 대선생의 장례를 제대로 하려고 장인을 시켜 관을 다듬을 적에 나무를 맡은 장인이 도끼를 들고 서있었는데 수족이 굽히고 펼 수 없어서 끝내 장례 모시는 일을 파하고 말았다.
경오년(1870년)에 사형(士衡, 世貞)이 양양(襄陽)에 있을 때 해월(海月)선생이 사형이 병이 들었다는 알림을 듣고서 가서 병세를 진찰해 보니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위급하였다. 사모님에게 아뢰기를 “사형이 혹시 대선생의 장례 일을 하려고 했습니까?”라고 하니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아뢰기를 “숨김없이 바른 대로 대답해 주시오.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늘에 아뢰어 장례 받드는 일을 파의(罷議, 논의를 그만 두는 것)한다면 병이 곧 나을 수 있지만 그러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사모님이 끝까지 숨기기가 어려워 목욕을 하고 하늘에 아뢰니 병이 곧바로 말끔하게 나았다. 그래서 장례를 치르자는 의논을 두만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