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
선생의 성은 최(崔씨)요 휘는 제우(濟愚),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재(水雲齋),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버지 산림공(山林公)의 휘는 옥(鋈)인데 정무공(貞武公) 휘 진립(震立)의 6세손이요 사성공(司成公) 휘 눌(訥)의 11세손이다. 어머니 한(韓)씨의 본관은 청주(淸州)요 아내 박씨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가경(嘉慶) 익묘(翼廟) 갑신년(1824년) 10월 28일에 경주의 서부(西部) 가정리(稼亭里)에서 태어나셨다. 그때 마침 하늘의 기운이 맑고 일월이 빛났으며 서기가 방안을 둘렀고 구미(龜尾)의 봉우리에 사흘 동안 기묘한 소리가 울렸다. 네댓 살이 되어 용모가 기이하고 총명이 뛰어나서 산림공이 늘 아껴 기르면서 기화(奇貨, 기이한 보물)처럼 여겼다. 겨우 열 살이 될 적에 산림공이 돌아가셨다.
선생이 3년 동안 상례를 치르고 난 뒤 가산이 점차 기울어지고 배우던 글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청운(靑雲)의 꿈이 깨진다고 여겼다. 그러나 평생에 뜻한 바가 활달해 큰 도량으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높은 마음으로 삼아서 각기의 이치를 살펴보았지만 무릇 술수는 반드시 사람을 속이고 세상을 오도하는 이치라고 여겼다. 그래서 한 번 웃으면서 버리고 나서 다시 무예(武藝)로 돌았다. 20세쯤에 이르러서는 활을 간직해 두고 장사로 돌아서, 팔도를 주유(周遊)했지만 생업이 어그러졌다. 이때부터 나이가 들어갔지만 한 가지도 뜻대로 되지 않아서 신세를 한탄하고서 울산에 옮겨가서 살았지만 사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초당에 누워서 이리저리 생각에 잠기면서 세상의 걱정을 풀어갔다.
마침 을묘년(1855년) 2월 봄에 봄잠을 자고 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어떤 선사(禪師)가 밖으로부터 와서 주인을 찾았다. 선생이 지게문을 열고 바라보니 어디에서 왔는지 용모가 청아하고 모습이 의젓한 늙은 선사가 있었다. 맞이해 묻기를 “스님은 어디에서 나를 찾아왔습니까?” 하니 스님이 말하기를 “생원님이 경주에 사는 최선생이시오?”라고 했다. 선생이 그렇다고 대답하니, 늙은 선사가 말하길 “그렇다면 소승이 긴밀하게 할 말이 있으니 초당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소?”라고 했다.
선생이 데리고 들어와 초당에 자리를 잡고 묻기를 “무슨 의논이 있습니까?”라고 하니 스님이 웃으면서 “소승은 금강산 유점사(留漸寺, 楡岵寺의 오식)에 있는데 독경을 했으나 끝내 신령스런 효험이 없어서 백일의 공부를 해서 신령스런 효험을 보려 지성으로 감축했습니다. 공부를 마치는 날에 탑 아래에서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깨어 탑 앞을 보니 한 권의 책이 탑 위에 놓여 있어서 거두어 펼쳐보니 세상에서 보기 드문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승이 곧바로 산을 나와서 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혹 박식한 사람이 있는지 곳곳을 찾아보았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소문을 들으니 선생님이 박학하다고 해서 책을 품고 왔습니다. 선생님이 이걸 아시겠습니까?”라고 했다. 선생이 말하길 “책을 보여 주시오”라고 했다.
늙은 스님이 절을 하고 바쳐서 선생이 펼쳐보니 유교 책인 것 같기도 하고 불교 책인 것 같기 도 했지만 글의 뜻을 해독할 수 없었다. 스님이 “그렇다면 3일의 말미를 주고 모래에 다시 올 터이니 그 사이에 자세히 읽어 보낸 게 어떠시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물러갔다. 약속한 날에 그 스님이 와서 묻기를 “혹 깨침이 있습니까?”라고 했고 대답하길 “내 이미 알았습니다”라고 했다. 스님이 백배로 사례를 하면서 기뻐 어찌할 줄 몰라 하면서 말하길 “이 책은 그야말로 생원님이 받아야 하니 소승은 전해줄 뿐입니다. 원컨대 이 책을 가지고 실행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말을 마치고 뜰 아래로 물러났는데 몇 걸음 걷지 않아 갑자기 사라졌다.
선생이 마음으로 신이(神異)스럽게 여겼는데 곧 신인(神人)임을 알아차렸다. 그런 뒤에 깊이 살펴보고 이치를 뚫어 보았더니 그 책은 기도를 가르치는 내용이었다. 병진년(1856년) 한 여름에 이르러 폐백을 받들고 한 중과 함께 양산 통도사(通道寺, 通度寺의 오식)의 천상산(天上山)에 들어가 3층의 제단을 쌓고 49일 동안 축원해, 마음과 정성을 다해 천주(天主)가 강령(降靈)하길 빌기로 결심했다. 이틀이 차지 않을 적인 47일에 이르러 지성을 드리다가 스스로 생각해 보니 숙부가 이미 죽어 복(服)을 입는 사람이 되었다고 여겼다. 이미 복인이 되었으니 치성을 드리는 것은 맞지 않으므로 곧 내려오니 숙부가 과연 작고를 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비통스러웠다. 기년(朞年)을 지내는 복을 입으려고 생각했지만 재물이 없어서 어찌할 수 없이 논 여섯 두락을 일곱 사람들에게 팔았다. 그러고는 바깥에 철물점을 열고 안에는 기도처를 두어 정성을 다했다. 다시 천상산에 올라가서 뜻대로 계획을 마쳤다.
정사년(1857년)에 가을을 보냈지만 무오년(1858년)에 이르려 가산이 탕진되고 빚이 산처럼 쌓였고 논을 판 자취가 드러났다. 논을 산 일곱 사람이 날마다 논을 내놓으라고 독촉을 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군색함을 불러왔다. 일곱 사람이 각각 소장을 만들어 던져 주면서 “아무 날 함께 관가에 낼 터이니 말을 잘해서 풀어보아라”라고 했다. 정해진 날에 이르러 일곱 사람이 함께 관아에 불려왔는데, 먼저 질문에 대답하길 “잘잘못이 나에게 있고 처결은 관가에 있으니 오직 영감(令監, 수령의 호칭)이 처결할 뿐이다”라고 했다. 그 처결에 “먼저 산 사람이 차지하라”고 했다.
마을에 사는 노파가 안채 뜰로 달려들어 이早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작폐를 부렸다. 선생이 그 분을 이기지 못해 손을 휘저어 밀치니 노파가 갑자기 기절을 해 죽었다. 그녀의 아들 셋과 사위 둘이 흉악스럽고 패악한 말을 하면서 부여잡고 말하길 “우리 어머니가 죽었다. 사람을 죽이면 아들이 복수하는 법이 있다. 만약 이미 죽어 살릴 수 없다면 관아에 보고할 것이다”고 했다. 선생이 스스로 생각해보니 사세가 드러나면 큰일이어서 직접 그 집에 가서 혹 살릴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큰 소리로 “너희 어미를 살려준다면 너희들이 다시 다른 말을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살려만 달라고 빌었다.
그래서 선생이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몸소 시체 곁에 가서 맥을 짚어보고 몸을 만져보니 아 주 죽어 있었다. 그래 한 자쯤 되는 꿩 꼬리를 목구멍에 넣어 휘저으니 순식간에 목구멍에서 기침 소리가 나면서 한 사발의 피를 토해내고 어깨를 흔들면서 돌아누울 즈음에 선생이 그 아들들을 불러 맑은 물을 입에 넣게 했다. 노파는 곧바로 살아나서 일어나 앉았다. 이 때문에 선생이 신명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기미년(1859년)에 이르러 거처가 일정하지 않아 군색하기가 말할 수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이어 권솔을 돌볼 생각을 했다. 이 해 10월에 다시 용담(龍潭)으로 돌아왔다. 용담은 곧 산림공이 제자를 가르치던 재실이다. 이때부터 의관을 모조리 벗어버리고 깊이 천석(泉石)에 맹세해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 쉬면서 시끄러운 세태를 비웃고 한가로운 삶을 누리면서 세월을 희롱하고 즐거움을 정자와 연못에 두었다.
경신년(1860년) 4월 초 5일은 곧 장조카 맹륜(孟倫)의 생일이었다. 갓과 웃을 보내 선생이 오시기를 청하자, 그 정의를 저버릴 수 없어서 억지로 잔치 자리에 참석했다. 얼마 되지 않아 몸이 떨리는 기운이 있어서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일어나 오다가 정신이 혼미해 미친 듯하고 취한 듯해서 고꾸라지기도 했다. 겨우 마루 위에 오르니 기운이 솟기도 하 고 죽기도 하여 병이 증세를 잡을 수도 없었고 말을 제대로 할 수도 없었다. 그럴 즈음에 공중에서 뚜렷이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데 그 단서를 알 수 없었다.
공중에 대고 묻기를 “묻노니 공중의 소리는 누구의 소리요?”라고 했다. 상제(上帝)가 가로되 “내가 상제이다. 너는 상제를 모르느냐? 너는 백지를 펴놓고 나의 부도(符圖)를 받으라”라고 했다. 곧바로 백지를 펴놓으니 부도가 뚜렷이 종이 위에 그려져 있었다. 선생이 그의 아들을 불러 보여주면서 “나는 형체를 볼 수 없구나”라고 했다. 그러자 상제가 가로되 “너는 우매하구나. 이걸 붓으로 베껴 태워서 깨끗한 그릇에 담아 냉수를 부어 마셔라”라고 했다. 선생이 한 장을 태워 마셨더니 처음 시험 보는 즈음에는 전혀 무성무치(無聲無臭) 했다.
상제가 가로되 “너는 내 아들이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라.”라고 했다. 그래서 공경하게 가르침대로 아버지라 부르니 상제께서 말하시길 “너는 진실로 이 아름다운 부적이 삼신산(三神山 )의 불사약(不死藥)임을 너 어찌 알리오?”라고 했다. 선생이 부적 수백 장을 연달아 물에 타서 마시고 일곱 여덟 달을 지내니 몸이 윤택해지고 용모가 바뀌었다. 상제께서 또 분부하시길 “너를 백의재상(白衣宰相)으로 제수(除授)해 줄까?”라고 하니 선생이 대답하길 “상제의 아들로 어찌 백의재상이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상제께서 말하시길 “네가 그걸 못하겠다면 내가 조화(造化)를 주어서 조화에 참여케 하리라” 하니 선생이 분부를 받들겠다고 하자, 시험해 말하되 “모두 세상의 조화가 있다”고 했다. 선생이 응하지 않자 또 가로되 “이 조화를 행한 뒤에 저 조화를 행하라”라고 했다. 선생이 곧바로 이 조화와 저 조화를 행하니 이 또한 세상에 있는 조화였다. 이 조화로 사람을 가르치게 되면 반드시 사람들이 꾀를 낼 것이라고 여겨 영영 거행하지 않았다. 상제께서 다시 조화를 보이면서 “이 조화는 진정 실행할 만한 조화이다”고 했다. 선생이 애써 실행했더니 이 또한 그러했다. 그런 뒤에 비록 상제의 가르침이 있었지만 맹세코 거행하지 않았다.
물도 마시지 않은지 열하루 만에 상제께서 단 한 마디의 말로도 가르침이 없다가 거의 한달 쯤 지나서 분부하시길 “아름답다, 너의 절개여! 너에게 무궁(無窮)의 조화를 내릴 것이니 천하에 포덕(布德)하라”고 했다. 선생이 드디어 밥을 먹었다. 이 뒤로부터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기운을 바르게 해서(安心正氣) 거의 한 해가 되도록 수련을 하니 자연스럽지 않음이 없었다. 곧바로 용담가(龍潭歌)를 짓고 또 처사가(處士歌)와 교훈가(敎訓歌)와 안심가(安心歌)를 지었다.
아울러 주문(呪文) 두 건을 지어서 한 건은 선생이 읽고 한 건은 아들과 조카에게 전해 주었다. 또 강령(降靈)의 방법을 짓고 또 검결(劍訣)을 짓고 또 고축문(告祝文)을 지으니 이게 백의동(白衣童) 청의동(靑衣童)이다. 주문을 만드는 제식은 있으되 현기불로(玄機不露)이기 때문에 하늘에 간직하고 땅에 숨겨 두었다 하더라.
뜻하지 않게도 어느 날, 상제께서 가로되 “너는 내일 친산(親山)에 가서 성묘를 하라”라고 했다. 선생이 내일 성묘하러 가려고 생각했다. 그 날 큰 비가 쏟아져서 나가지 못했다. 상제께서 독촉하기를 “무엇 때문에 머뭇거리느냐? 곧바로 성묘를 가라”고 일렀다. 선생이 비를 무릅쓰고 가면서 우구(雨具)를 한 가지도 쓰지 않았는데도 젖지 않았다. 곧 집에 이르러 종과 말을 빌리려 하니 조카가 “이처럼 비가 많이 오는데 성묘하는 게 그리 급합니까?”라고 말했다. 선생이 만류를 뿌리치고 종과 말을 빌려 가면서 10리를 왕복했는데도 햇볕이 위에서 쪼이고 종 도 젖지 않고 돌아왔다. 기괴하도다. 선생이 말하길 “이는 곧 천주의 조화이다”라고 했다. 그 조카도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이해 10월에는 그의 조카 맹륜이 와서 입도하기를 요청했다. 선생이 이를 상제에게 전하니 또 상제께서 이르기를 “너의 앞뒤 길흉화복은 내가 반드시 간섭하는 바이다. 그렇지만 네가 이 정자에 들어온 뒤 자(字)를 고치고 산 바깥을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른바 입춘(立春)의 글을 보니, 도의 기운이 길이 온전해서 사가 들어오지 못하고(道氣長存邪不入) 세간의 뭇 사람들이 함께 돌아가지 못한다(世間衆人不同歸)
마침 신유년(1861년) 봄에 이르러 포덕문(布德文)을 지었는데 그때는 6월이었다. 장차 포덕할 마음이 있어서 어진 사람을 만나려 했다. 자연스럽게 소문을 듣고 오는 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혹은 불러 입도케 하고 혹은 포덕을 지시했는데 전해준 것은 다만 21자뿐이었다. 선생이 그 도를 천도(天道)라 하고, 가르친 것은 첫째 식고(食告)였다. 집을 나갈 적이면 알리고 집에 들어올 적에도 알리며 약을 쓰지 말 것이며, 수심정기(守心正氣)로 악을 버리고 선을 하며, 물욕을 버리고 다른 이익을 찾지 말며 유부녀(有夫女)를 취하지 말게 하고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으며, 나쁜 고기를 먹지 말게 하고서 성경신(誠敬信) 석 자로 중심을 삼게 했다.
이달 11일에 갑자기 길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새로 입도한 자들이 우매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먼저 성주로 가서 충무묘(忠武廟)를 배알하고 나서 첫 번째로 남원에 사는 서공서(徐公瑞)의 집으로 가서 열흘쯤 머물렀다. 그때 같이 갔던 이는 최중의(崔仲義)였다. 그 고을의 정경을 보니 산수가 아름답고 풍토가 순박해 절승(絶勝)의 땅이어서 시인 묵객들이 들끓을 만하였다.
그래서 대나무 지팡이와 헤어진 미투리를 신고서 마을마다 찾아 들어가고 골골을 돌아보면서 구경을 했다. 은적암(隱跡菴)에 이르니 시절이 섣달이어서 해가 이미 저물었다. 절의 종이 새벽에 울리고 뭇 중들이 모두 모여 새벽 불공을 드리니 모두들 부처에게 비는 소원이 있었고 송구영신(送舊迎新)의 감회도 있었다. 그래서 하룻밤을 머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차가운 등불 아래에서 외로운 목침을 베고 이리 둥글 저리 둥글하다 보니 모든 어진 벗들이 떠오르고 처자가 생각났다. 그래서 애써 수도사(修道詞)를 지었고 또 동학론(東學論)과 권학가(勸學歌)를 지었다.
임술년(1862년) 봄 3월에 경주 현서(縣西)에 사는 백사길(白士吉)의 집으로 돌아와서 최중의를 시 켜 집에 보내는 편지를 보내게 하고 또 수도사와 가사 두 건을 박대여(朴大汝)의 집에 숨겨 간직하게 하고는 한결 같이 번거롭게 하지 말고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아지 못하게 하라고 일렀다. 각 곳에 사는 사람들이 선생이 전라도에 있는 줄만 알고 여기 경주에 있는 줄은 몰랐다. 여러 제자들이 마음이 저절로 통하여 찾아오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생각 밖에도 3월에 최경상(崔慶翔)이 갑자기 선생을 찾아오니 선생이 묻기를 “그대는 혹시 소문을 듣고 왔는가?”라고 하니 최경상이 대답하길 “소생이 어찌 알았겠습니까? 저절로 오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진정 그러해서 왔는가?”라고 하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최경상이 묻기를 “소생이 공부한 바가 부실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기이함이 있으니 어찌 그러합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더 말해보라고 하였다. 그러니 최경상이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기름 반 종자기로 밤을 세운지 21일이나 되었습니다. 그 까닭이 어찌된 것입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선생이 가로되 “이는 조화의 큰 징험이다. 그대는 홀로 기뻐하면서 자부심을 가져라”라고 했고 최경상이 또 묻기를 “지금부터 덕을 펴도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포덕(布德)을 하라고 허가해 주었다.
최경상이 왔다간 뒤로 사방의 어진 선비들이 날로 몰려와서 감당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마침내 6월에 이르러 수덕문(修德文)을 지었고 또 몽중가(夢中歌)를 지었다. 강원보(姜元甫)라는 이가 있었는데 몸소 그의 집에 가서 혹 자기도 하고 먹기도 하면서 지냈다. 7월 집으로 돌아오는 날에 말을 타고 오다가 회곡(回谷)의 길 위에 이르니 논 아래 여섯 일곱 발이나 되는 언덕이 있었다. 말이 갑자기 여기에서 멈춰 가지 않아 대여섯 사람이 채찍을 쳐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럴 즈음에 여섯 일곱 발이나 되는 언덕이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면서 무너져 내렸다. 비록 갈기를 흔드는 미물이라도 또한 사람의 뜻을 알아먹었다. 말고삐를 돌려 사잇길로 왔다.
며칠을 머문 뒤에 대여(大汝)의 집으로 가려 했는데 밤에 갑자기 큰 비가 내려서 강물이 크게 불어났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물이 비록 백척(白磩)이라도 사람이 건너지 못할 것인가”라고 하고 곧바로 말을 타고서 한 발쯤 되는 깊은 물을 스스로 고삐를 잡고 건너가니 모든 사람들이 놀라면서 장엄하다고 하더라.
대여의 집에서 돌아왔다. 본부(本府, 경주부)에 윤선달(尹先達)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때 현직으로 있는 영장(營將)과 서로 친한 사이였다. 그가 영장을 부추겨 가로되 “이 고을에 사는 최선생의 제자가 천 명쯤 된다고 하더라. 만약 최선생을 잡아들인다면 한 명마다 한 푼을 바친다고 해도 천 냥 가까이 될 것이니 잡아들이는 게 어떨까?”라고 말했다. 영장이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곧바로 차원(差員)을 보내 최선생을 잡아들이게 했다. 그때는 가을 9월 29일이었다.
선생이 차원이 온다는 풍문을 듣고 마음이 비록 분개했으나 성화(成化)의 분수가 있을 것이기에 제자 10명쯤을 데리고 말을 타고 서주(西州)에 이르렀다. 나루를 건너려 할 적에 동쪽 물가에 뺄래하는 여인 백여 명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선생을 우러러 보았다. 선생은 마음이 의아해 하면서 곧바로 관아에 들어갔다. 영장이 묻기를 “너는 일개 한사(寒士)로 무슨 도덕이 있다고 해서 선비 수천 명을 모아 세상을 농락하고 이름을 얻었느냐? 술가(術家)가 말하길, 의원은 의원답지 아니하고 점쟁이는 점쟁이답지 아니하고 무당은 무당답지 아니하다 했는데 술인(術人)으로 생계를 삼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라고 했다.
선생이 성이 나서 대답하길 “천명을 성품이라 이르고 성품 거느리는 걸 도라 이르고 도 닦는 것을 교라 이른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이 세 가지 단서로 사람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게 이치에 합당치 않는가?”라고 말하고 눈을 부릅뜨고 영장을 바라보니 영장이 그 위의(威儀)를 보고 얼이 빠져서 감히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래서 곧바로 풀어주었다.
선생이 물러나서 경주부 안에 들어간 사이에, 서방에서 온 자가 5,6백 명 가까이 되었다. 이들이 경주부 관정(官庭)으로 몰려가서 윤선달을 찾아내려 했지만 윤가 놈이 영장 방의 벽장에 피해 숨어 있었다. 뭇 사람들이 영장이 잘 대해 주는 걸 보고 물러 나왔다. 빨래하는 여인들이 선생을 우러러 본 연유를 물어보니 웃으며 서쪽 하늘을 가리키면서, 상서로운 기운이 있었기 때문이라 했다. 이윽고 영장이 차원을 보내서 매를 때려 달라며, 죄를 청했다. 그러자 선생이 가로되 “나는 벼슬하지 않은 한사(寒士)이다. 어찌 관가의 차원에게 매를 때리겠는가?”라고 말하고 용서해 주고 물러가게 했다.
또 경주부 사또의 예방(禮房)이 급히 알리기를 “사또님의 내아(內衙)께서 위급한 병환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선생이 “약을 쓰지 말라. 저절로 나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래도 부도(符圖) 한 장을 달라고 요청하자 선생이 묵념하고 뜸을 들이다가 “병이 곧 나을 것이다. 너는 곧바로 가보아라”라고 했다. 예방이 돌아와서 사또에게 알리기를 “선생이 곧 나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라고 하자 사또가 “병이 이미 나았다”라고 말했다더라.
선생이 대엿새 머문 뒤에 용담으로 돌아와서 10월 14일 통문(通文)을 보냈다. 밤에 선생이 책을 읽고 있는데 안식구들이 방아를 찧거나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휘황찬란한 기운이 달처럼 문을 비추었다. 지게문을 열고 보니 캄캄한 밤하늘에 채색 구름이 영롱하고 서기가 밝게 비치어서 용담의 한 동네가 대낮 같이 밝았다. 뭇 사람이 선생에게 의심스레 묻기를 “마을 앞의 나무 위에 한 미녀가 초록 옷과 붉은 치마를 입고 어여쁘게 앉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선생이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고 일렀다. 선생께서는 홀로 선녀가 강림했다는 걸 알았다.
11월에 최경상이 와서 청하길 “선생께서 소생의 집에 왕림하심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그대의 집은 좁으니 다른 곳으로 정해보라”라고 하시었다. 최경상이 배처소(拜處所, 절을 하는 곳)를 흥해(興海) 매곡(梅谷)에 있는 손봉조(孫鳳祚)의 집으로 정했다. 최경상이 다시 선생을 찾아 가서 뵈옵고 초 9일에 선생을 모시고 곧바로 손봉조의 집에 이르러 좌정(座定)했다. 이튿날 각 곳의 도인들이 분주하게 가서 뵈었다. 최경상과 함께 머물면서 좋은 일이나 어려운 일을 즐겨 했다.
또 어린이와 더불어 어울려 때때로 글씨 연습을 날마다 가르쳤다. 선생께서 장지(壯紙)를 갖추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글씨를 쓰게 했으나 한 글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종이만 한두 묶음을 허비했다. 선생께서 하늘에 아뢰길 “신인(神人)이 어찌하든 내 반드시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하면서 무수히 글씨를 썼으나 끝내 글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상제께서 이르길 “너는 잠시 그쳐라. 뒤에 반드시 붓을 내려주겠노라”라고 했다. 그들 어린이와 더불어 글씨 쓰기를 과공(課工, 공부의 과제)으로 삼았다. 선생이 천주와 함께 화답한 결구(訣句)인 송송(松松) 백백(栢栢)의 편을 그때에 냈다.
이때에 최경상이 이불 한 벌과 상의와 하의를 만들어 선생에게 들였다. 선생께서 말하시길, “그대는 평소에 가난한데 어찌해서 이렇게 힘을 다했느냐?”고 말했다. 선생께서 정의로 말하시길 “내 처자가 먹을거리가 어려운데 그대가 구할 수 있는 계책이 있느냐?”라고 말하니 최경상이 곧바로 쌀과 고기와 돈 4,5백금을 모아 들였다. 그러자 선생이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본가로 보내주었다.
날이 가고 달이 지나서 세모(歲暮)가 임박하자 이곳에서 설을 지낼 계획을 하였다. 섣달 그믐날을 맞이해서 선생께서 각처의 접주(接主)를 정해 주었는데 경주부 서쪽은 백사길(白士吉)과 강원보(姜元甫)로 임명하고 청하(淸河)에는 이민순(李敏淳)으로 임명하고 연일(延日)에는 김상서(金尙瑞), 안동(安東)에는 이무중(李武中)으로 임명하고 단양(丹陽)에는 민사엽(閔士葉)으로 임명하고 영양(英陽)에는 황재민(黃在民)으로 임명하고 영천(永川)에는 김선달(金先達), 신녕(新寧)에는 하치욱(河致旭)으로 임명하고 고성(固城)에는 성한서(成漢瑞)로 임명하였다.
계해년(1863년) 정월 초 6일 상제께서 비결을 선생에게 내려주니 그 글에 이르되 “도를 묻노니 오늘 무엇을 아느뇨? 뜻은 새해인 계해년에 있도다”(問道今日何所知 意在新元癸亥年)라고 했다. 초 6일에 최경상과 작별을 할 때 이르기를 “그대는 영녕(盈寧)의 지경을 돌아오라”고 이르고 선생께서는 곧바로 본가로 돌아왔다. 2월에 임천(臨川)에 있는 이가 성을 가진 구실아치의 집에서 혹 어린이와 함께 글씨 쓰기를 하다가 잠시 신녕(新寧)의 하치욱(河致旭) 집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그러고는 본가로 돌아왔다. 그때는 2월 초9일이었다.
선생께서 날마다 둘째 아들인 세청(世淸)과 김춘발(金春發)과 성일규(成一奎)와 하한(河漢)과 김규(金奎)와 함께 소일하였다. 처음으로 필법을 만들어서 액자(額字)를 썼고 혹은 진첩(晉帖)을 쓰기도 하였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필법이 왕희지(王羲之)와 같았다. 사방의 도인들이 필법이 기이하다고 해서 날마다 몰려들었다. 4월에 영덕에 사는 사람 강수(姜洙)가 찾아와서 도를 닦는 절차를 물으니 선생께서 “다만 성경신(誠敬信) 석 자에 있다”고 하였다.
선생께서 영덕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각도의 도인들을 경계해 지목을 받는 단서를 만들지 말고 십분 엄격하게 행동하라고 일렀다. 이해 6월 무렵에 각처의 도인들에게 액 자 한 장씩을 때때로 써서 주고 각처에 반포하게 하였다. 그 때 강수가 선생을 뵈러 오자 선생께서 말하시길 “20여 장 속에서 성(誠) 글자가 들어있는 걸 그대가 가지고 가라”라고 말하고 또 경신(敬信) 두 글자를 써서 주었다.
8월에 전시광(全時胱)이 와서 뵙자, 선생께서 액자 22장을 주었는데 그 속에 특별히 이행(利行) 두 글자를 주면서 말하길 “이것으로 멀리에서 온 정을 표시하노라. 나머지 20장은 주동접(鑄銅接)에 주라”고 일렀다. 또 흥비가(興比歌) 한 장을 특별히 주면서 말하길 “이 노래는 염송하기도 좋고 생각하기에도 좋다. 효명접(嘵明接)과 상종해서 또한 공부하게 하지만 마산(馬山)과는 삼가해서 상종하지 말라”고 일렀다 하더라.
선생이 갑자기 통문을 내서 7월 23일에 접소 정한 것을 없앴다. 그 때 모인 사람들이 45인이었다. 접을 없앤 뒤에 글씨 쓰기도 없앴다. 이때에 수도가(修道歌)를 지었는데 그 시구(詩句)에 “용담의 물이 홀러 사해의 근원이 되고 구악에 봄이 드니 한 세상의 꽃이로다”(龍潭水流四海源 龜岳春廻一世花)라고 했다. 최경상이 마침 오래 애기를 나누고 나서, 특별히 주인(主人)이라 지정했다.
선생께서 친히 탄식하시면서 성낸 기색을 띠다가 다시 가라앉히고 부드러운 소리로 “참으로 성공했다고 이르는 자들은 가거라. 이 운수는 생각건대 반드시 그대를 위해 나온 것이다. 이 뒤로는 삼가서 간섭하되 나의 교훈을 저버리지 말라”라고 하니 최경상이 대답하길 “어찌해서 이 같은 훈계가 있으십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길 “이는 운수이다. 내가 운수에 어찌하리오. 진실로 그대는 마음을 밝혀 잊지 말라”라고 하였다. 최경상이 또 대답하길 “선생의 가르침은 소생에게는 지나칩니다”라고 하니 선생이 웃으면서 가로되 “사업은 하늘(자연)에서 나온 것이다. 번거롭게 하지도 말고 의심하지도 말라”라고 하였다.
8월 13일에 흥비가(興比歌)툴 지었지만 전해줄 곳이 없을 즈음에 최경상이 마침 이르러서 선생께서 기뻐 묻기를 “명절날이 머지 않는데 그대는 어찌 급하게 왔는가?”라고 하니 최경상이 대답하길 “선생께서 홀로 명절날을 지내시기 때문에 모시고 함께 지내려는 뜻으로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한참 동안 묵념을 하시다가 최경상을 불러 말하길 “그대는 무릎을 꿇지 말고 평좌를 하라”라고 하니 최경상이 그 말씀에 따라 평좌를 했다.
선생께서 이르시길 “그대의 손과 발이 마음대로 굽히고 펴지는가?”라고 하니 최경상이 갑자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정신이 있는 듯, 없는 듯하고 몸을 구부리고 펼 수조차 없었다. 선생께서 말하시길 “그대의 수족이 전에는 어찌 펴지 못하다가 지금에는 펴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하니 최경상이 대답하길 “그 꼬투리를 알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말하시길 “이는 조화의 큰 징험이다. 어찌 후세의 어지럽힘을 근심하랴. 삼가고 삼가하라”라고 하더라.
15일 새벽에 선생이 최경상을 불러 말하시길 “이 도는 유불선(儒佛仙) 세 도를 겸해서 낸 것이다.”라고 하니 최경상이 대답하길 “어찌해 겸했습니까?”라고 하니 “유도는 붓을 던져 글자를 이루고 입을 열어 운자를 부르며 소와 양과 돼지를 쓰니 이게 유도이다. 불도는 정결히 해서 손에 염주를 쥐고 머리에 흰 고깔을 쓰며 쌀을 바치고 등불을 밝히니 이게 불도이다. 선도는 용모를 바꾸고 의관과 복색을 비단으로 만들며 단술로 잔을 올리니 이게 선도이다. 시의에 맞추어 합당한 제사의 법을 쓴다”라고 하더라.
날이 새자 수심정기(守心正氣) 넉 자를 써서 주면서 가로되 “일후에 병을 고치는 데에 사용하라” 하였고 또 부도(符圖)를 내려 주면서 특별히 붓을 잡게 하여 두 글자의 글을 받게 하고는 상제에게 아뢰어 비결을 받게 했는데 용담의 물이 흘러 사해의 근원이 되고 검악에 사람이 있어 일념의 마음이다(龍潭水流四海源 劍岳人在一念心)
이에 청하(淸河) 사람 이민여(李敏汝)가 초막을 얽어 사람들의 출입이 들끓자 사람들의 음해를 입은 탓으로 관아에서 염탐을 해서 유배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덕의 도중(道中) 사람들이 2백여 금을 모아서 납속(納續)을 해서 유배에서 풀어주었다. 선생께서 이 소문을 듣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영덕 사람 유상호(劉尙浩)가 몸소 백금을 내서 손님을 접대하는 밑천으로 삼으니 그 정성이 아름다웠다.
겨울 10월 28일은 선생의 탄신일이다. 만일 통문을 낸다면 사방의 제자들이 너무 많이 모일 것 같았다. 그래서 선생의 본 뜻은 잔치를 베푸는 일은 먼저 시끄럽고 분주해 좋지 못한 동정(動靜)이 있을 것 같다고 여겼다. 그래서 주인이 비밀히 영덕에 기별을 해서 예물을 갖추게 하고 큰 잔치를 베푸니 그 모인 숫자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선생이 수저를 놓을 때,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하되 “세상 사람들이 나를 천황씨(天皇氏)라 이르리라” 하더라. 전날 한 시구를 지었는데 오심극사묘연간(吾心極思杳然間) 의수태양유조영(疑隨太陽流照影)이라 했다.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 “이 시의 뜻을 그대들이 혹 해득하는가?”라고 하니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들 몰랐다. 선생께서 말하시길 “흥비가는 먼젓번 반포했도다. 혹 숙독을 해서 외울 수 있는가?”라고 하고 각각 면강(面講, 맞대고 강의를 받음)을 했다. 차례로 면강을 한 뒤 강수(姜洙)가 홀로 좌중에서 나와 선생을 대하여 읽고 나서 뜻을 물으니, 선생이 구구 절절마다 먼저 뜻을 물으니 강수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선생께서 가로되 “전에 꿈을 꾸었는데 태양의 살기(殺氣)가 왼쪽 겨드랑이에 붙어서 화기(火氣)로 변해서 밤새도록 인(人)의 글자를 썼다. 꿈을 깨고 난 뒤에 겨드랑이를 보니 한 점 붉은 흔적이 있어 사흘 동안 드러났다. 이 때문에 걱정거리가 있었는데 마음으로 홀로 화 가 장차 이를 것임을 알았다”하였다. 연달아 선생의 탄신일에 미쳐 주동접(鑄銅接)에서 술과 안주와 유과 몇 그릇과 어포 몇 묶음을 갖추고서 잔치 자리에 내와서 얼굴을 뵈옵고 가르침을 받고서 물러나왔다.
그해 11월 13일에 주동의 전광(全胱)이 선생의 팔절(八節) 척구(隻句)의 댓글에 응답했다. 선생을 뵈옵고 여러 척구의 댓글을 말하니 선생께서 보시고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가로되 “어찌해 이걸 무슨 척구의 댓글이라고 하는가?”라고 물으니 전광이 무릎을 꿇고 묻기를 “선생의 안색을 보니 어찌해서 수척하고 피곤해 보입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선생이 가로되 “나도 모른다. 내가 팔절의 척구를 지어 그대들에게 보인 것은 응대하는 사람을 보고자 함인데 지금 척구의 댓글을 보았다. 도인 중에 사람다운 사람이 없어서 탄식해 이렇게 조치해 본 것이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가로되 “내가 그때에 상산(商山, 괴산의 별칭) 사람 황맹문(黃孟文)이 도를 향하는 마음으로 마침 와서 포덕(布德) 권학(勸學) 등 몇 가지 조건을 물었다. 하지만 별도로 포덕해서 교화할 사람을 아지 못해서 몇 사람이 수도와 공과(工課)를 어떻게 하는지 알아보려 보냈다”라고 하더라.
이때에 도인들 사이에 풍습(風濕)이 혼탁하게 크게 번졌다.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그 습증(濕症) 때문에 거의 수도 공부를 폐지하였다. 어떤 도인이 이를 가지고 선생에게 물어보니 대답하시길 “돌아가서 소지(所志)를 써서 천주에게 호소하라”라고 일렀다. 빈해(瀕海) 사람 박하선(朴夏善)이 소문을 듣고 글을 만들어 선생을 찾아가서 뵈니 선생께서 말하시길 “내 반드시 천명을 받아서 제서(題書)를 얻었노라”라고 하였다. 이윽고 제서를 내리시기를 “얻기도 어렵고 구하기도 어렵지만 실로 이는 어려운 게 아니요(得難求難 實是非難) 마음이 화평하고 기운이 화평해 봄 화평을 기다린다(心和氣和 以待春和). 아아, 시운(時運)이 불행하도다”라고 하였다.
해는 계해년(1863년) 12월, 접소를 돌아보는 도중이었다. 이때에 선생께서 안 협방(夾房, 골방)에 침소를 정하고 있는데 밝은 등불이 감회를 돋고 심신이 산란했지만 그런 속에서도 편안한 기색이 있었다. 밤을 새워 새벽을 기다렸다.
경주부에 사는 도인이 와서 선생에게 아뢰길 “저의들이 들으니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논의를 벌이고는 선생을 해코지한다고 합니다. 미리 피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가로되 “도는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 차라리 내 스스로 감당하리라. 하물며 제군(諸君)을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하고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때에 선전관(宣傳官) 정구룡(鄭龜龍)이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갑자기 경주부에 와서 나장(羅將)을 많이 거느리고서 불의에 돌입해서 ‘어명’(御命)*이라 하면서 선생을 잡아갔다. 그때의 광경을 차마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 10여 명이 잡혀가서 모조리 경주부에 갇혔다. 이튿날 길을 떠나 영천(永川)에 이르렀는데 나쁜 악습과 모욕하는 기풍이 액송곤채(厄宋困蔡)의 날보다 더욱 심하였다.
선생이 말을 타고 있었는데 말의 발이 땅에 닿지도 않았고 발을 옮겨도 걸음을 떼지 못하였다. 몇 십 명의 하례(下隷, 사령 아래 군졸)들이 크게 놀라 어쩔 줄을 모르고 위급함을 아뢰기를 “소인들이 진정 선생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바라옵건대 선생께서 평안하게 행차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니 잠깐 사이에 말이 갑자기 발을 떼서 달려갔다. 대구 감영에 이르러 숙박을 하고 이튿날 선산(善山)에서 숙박을 하고 또 출발해 상주(商州, 尙州의 오식)에서 숙박을 했다.
임금의 분부를 받든 정구룡이 올라가는 길을 조령(鳥嶺, 새재)으로 잡았지만 도인 수천 명이 고갯길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겁이 나서 화녕(化寧)으로 길을 잡아서 공충로(公忠路)에 이르러 보은(報恩)에서 묵었다. 보은의 우두머리 구슬아치는 곧 도인이었다. 그는 대접을 잘하고 물품을 공급했으며 노잣돈 5민(緡)을 바쳤다. 선생이 일찍 출발해 회인(懷仁)에 이르러 묵었다. 또 충주에서도 묵었다. 출발한 지 며칠 만에 겨우 과천(果川)에 이르렀다.
해는 12월 초 7일이었다. 곧 철종(哲宗)이 승하(昇遐)한 날이었다. 지금 임금이 대리청정(代理聽政)하는 초기여서 여러 날 지체해서 각도에 국상(國喪)을 반포하였다.
선생이 처음 국상 소식을 듣고 슬퍼했다. 선생께서 가로되 “내가 비록 죄인이나 반위(班位)에 곡을 하겠노라”라고 하고 북쪽을 향해 재배를 하면서 애통해 마지않았다. 관아에서 며칠을 머무르자, 전교(殿敎, 傳敎의 오류)를 내리기를 “경상도 경주 죄인 동학선생 최아무개를 해영(該營)으로 돌려보내서 문초하라” 하였더라. 그 때는 갑자년(1864년) 정월 초 6일이었다. 대구에 이르러 감옥에 갇혔는데 명사관(明査官)은 조영화(趙泳和), 감사는 서헌순(徐憲淳)이었다.
순사(巡使)가 문초하는 마당에 선생이 차꼬를 하고 뜰에 들어서자, 순사가 묻기를 “너는 어찌해 무리를 모아서 풍속을 혼탁하게 하느냐?”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대답하시길, “교인이 주문을 외우는 것은 약을 쓰지 않고 스스로 낫는 것이요 아이를 권장해 글씨를 쓰게 한 것은 하늘이 준 필법이었소. 내가 도를 구한 게 아니라 사람마다 나를 구한 것이니 또한 멀리에서 온 것은 즐겁지 아니하오? 이와 같이 도를 위했는데 풍속을 어지럽혔다고 어찌하겠소?”라고 했다. 순사가 달리 물어볼 게 없어서 하옥시켰다.
2월 다시 문초하는 날, 장형(杖刑)을 집행할 때 갑자기 우레 소리가 들려왔다. 순사가 장형을 집행하는 형리(刑吏)에게 묻기를 “매 때리는 데서 소리가 나니 어찌된 일이냐?”고 하니 형리가 대답하길 “죄인의 다리가 부러져서 소리가 났습니다”라고 했다. 곧바로 분부해서 형리가 하옥시켰다. 선생께서 감옥에 있을 적에 시를 지었는데 “등불 물 위에서 밝혀보아도 한 점 혐의의 틈이 없으며 기둥이 말라가는 모양 같지만 힘이 남아 있다”(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3월에 순사가 드디어 임금의 전교에 따라 10일에 엄형(嚴刑)을 시행해서 선생께서 그대로 받아 돌아가셨다. 사흘이 지나 잡아들였던 선생의 아내와 아들을 곧바로 풀어주게 하고 시신을 수습해 가라고 지시했다. 시신을 염습하는 사람으로 김경필(金敬弼) 정용서(鄭用瑞) 곽덕원(郭德元) 임익(林益) 그리고 상주의 김덕원(金德元) 등 네댓 사람이었다. 운구를 하는 길에는 천지가 참담했는데 이를 보는 여러 도인의 아픔이 어떠했겠는가?
상례 행렬이 자인현(慈仁縣) 서후연(西後淵, 서쪽 뒤에 있는 연못)에 있는 술집에 이르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밤에 잠을 기로 요청했더니 주인이 “어디로부터 옵니까?”라고 물으니 박하선(朴夏善)이 대답하기를 “대구에서 옵니다”라고 하였다. 술집 주인이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시신을 방에 들게 하고 일절 지나는 사람을 금지시켰다. 시신을 어루만져 보니 습기가 있고 따뜻했다. 행여 혹시 회생할 징험이 있을까 해서 사흘 동안 지키면서 기다렸다. 쌍무지개가 연못에서 일어나고 하늘에 구름 안개가 끼어 연못과 술집을 에워쌌는데 영롱한 오색이 사흘 동 안 가렸다.
선생의 혼이 하늘에 오르자 구름이 걷히고 무지개가 풀어졌다. 그 뒤에 시신에 냄새가 나서 곧바로 다시 염습을 했다. 이튿날 길을 떠나 용담에 이르렀다. 선생의 장조카 맹륜(孟倫)이 용담의 서쪽 언덕에 안장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