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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전봉준 공초 全捧準供草
  • 기사명
    을미 3월 7일 전봉준 4차 문목 일본영사 심문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95년 03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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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 3월 7일 전봉준 4차 문목 일본영사 심문[乙未 三月 初七日 全琫準 四次 問目 日本領事 審問]

문(問) : 너의 이름과 호(號)는 한둘이 아니던데 얼마나 되느냐?

공(供) : 전봉준(全琫準) 하나뿐입니다.

문(問) : 전명숙(全明淑)은 누구의 성명(姓名)이냐?

공(供) : 이 몸의 자(字)입니다.

문(問) : 전녹두(全綠豆)는 누구이냐?

공(供) : 그때 사람들이 지목한 이름이지 이 몸이 정한 이름이나 자(字)는 아닙니다.

문(問) : 너는 별호(別號)가 있느냐?

공(供) : 없습니다.

문(問) : 이 밖에 또한 별호(別號) 및 어릴 적의 자(字)의 칭호(稱號)는 없느냐?

공(供) : 없습니다.

문(問) : 네가 매번 사람들에게 글을 보낼 적에 이름으로써 채웠느냐, 자(字)로써 채웠느냐?

공(供) : 이름으로써 채웠습니다.

문(問) : 네가 작년 10월 다시 봉기한 날짜는 어느 날이냐?

공(供) : 10월 12일 사이 같으나 상세히 알지 않습니다.

문(問) : 삼례(參禮)에서 다시 봉기하기 전 너는 어느 곳에 있었느냐?

공(供) : 제 집에 있었습니다.

문(問) : 네가 전주(全州) 초토영(招討營) 병사(兵士)와 접전(接戰)하고 해산(解散)한 뒤에 너는 어느 곳으로 향했느냐?

공(供) : 10여 고을을 지나면서 귀화(歸化)를 권고하고 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문(問) : 전주(全州)로부터 해산(解散)한 것은 어느 날이냐?

공(供) : 5월 초7~8일 사이입니다.

문(問) : 전주(全州)로부터 해산(解散)할 때 처음 도착한 고을은 어느 고을이냐?

공(供) : 처음 금구(金溝)로부터 김제(金堤), 태인(泰仁) 등지(等地)입니다.

문(問) : 처음 금구(金溝)에 도착한 것은 어느 날이냐?

공(供) : 금구(金溝)의 지경(地境)은 잠시 경과(經過)한 길이었으며 5월 초8~9일 사이에 김제(金堤)에 도착하였고 초10일 사이에 태인(泰仁)에 도착했습니다.

문(問) : 태인(泰仁)에 도착한 뒤에 경과(經過)한 바는 모두 어느 고을이냐?

공(供) : 장성(長城), 담양(潭陽), 순창(淳昌), 옥과(玉果), 남원(南原), 창평(昌平), 순천(順天), 운봉(雲峰)을 경과(經過)한 뒤에 곧바로 제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문(問) : 집으로 돌아간 것이 어느 달, 어느 날이냐?

공(供) : 7월 그믐, 8월 초 사이입니다.

문(問) :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닐 때 너 혼자 다녔느냐, 동행자(同行者)가 있었느냐?

공(供) : 기솔(騎率)이 아울러 20여 인이 있었습니다.

문(問) : 그 때 최경선(崔慶善)이 동행하였느냐?

공(供) : 그렇습니다.

문(問) : 손화중(孫化中) 또한 동행하였느냐?

공(供) : 손(孫)은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문(問) : 전주(全州)로부터 해산(解散)할 때 손화중(孫化中)은 어느 곳을 향하였느냐?

공(供) : 그 때 손(孫)은 우도(右道)의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면서 귀화(歸化)를 권고하였습니다.

문(問) : 손(孫)이 전주(全州)로부터 해산(解散)한 것은 너와 더불어 같은 날이냐?

공(供) : 그렇습니다.

문(問) : 전주(全州)로부터 해산(解散)한 뒤에 너는 손(孫)을 보지 않았느냐?

공(供) : 4~5삭(朔) 동안 서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문(問) : 4~5삭(朔) 뒤에는 어느 곳에서 만났느냐?

공(供) : 8월 그믐 사이에 순상(巡相)의 영(令)를 가지고 나주(羅州)로 가서 민보군(民堡軍)을 해산(解散)하라고 권고한 뒤 돌아오는 길에 장성(長城) 땅에 이르러 비로소 서로 보았습니다.

문(問) : 손(孫)을 만난 뒤에 상의(商議)한 바가 있느냐?

공(供) : 그 때 이 몸이 바야흐로 순상(巡相)으로부터 별도로 부탁받은 일이 있으니 함께 영문(營門)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뜻으로 상의하였습니다.

문(問) : 그렇다면 손(孫)은 무슨 말로 대답하였느냐?

공(供) : 바야흐로 병중(病中)에 있어서 함께 갈 수 없으니 병이 낫기를 기다린 후에 좇아가겠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문(問) : 이 밖에 다른 상의한 바는 없었느냐?

공(供) : 그렇습니다.

문(問) : 일본(日本) 병사(兵士)가 대궐(大闕)을 범했다는 것은 어느 곳에서, 어느 때에 들었느냐?

공(供) : 7월 사이에 처음 남원(南原) 땅에서 들었습니다.

문(問) : 그렇다면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면서 귀화(歸化)하라고 할 때 이 말을 들었느냐?

공(供) : 이는 도청도설(道聽塗說)이었습니다.

문(問) : 이 말을 들은 뒤 무리들을 일으켜 일본(日本)을 공격(攻擊)하겠다는 거사(擧事)는 처음 어느 땅에서 의논하였느냐?

공(供) : 삼례역(參禮驛)입니다.

문(問) : 특히 삼례(參禮)에서 이 거사를 의논하였느냐?

공(供) : 전주(全州) 부중(府中)의 외곽(外廓)에서 저막(邸幕)이 조금 많은 곳으로는 삼례(參禮)만한 곳이 없기 때문일 따름입니다.

문(問) : 삼례(參禮)에 이르기 전에 혹 도회지(都會地)가 없었느냐?

공(供) : 원평(院坪)에 이르러 하룻밤 숙박을 거쳐 곧바로 삼례(參禮)에 이르렀습니다.

문(問) : 집으로부터 처음 출발한 것은 어느 날이냐?

공(供) : 10월 초순 사이입니다.

문(問) : 네가 삼례(參禮)를 향할 때 동행(同行)한 자는 누구이냐?

공(供) : 동행한 자는 없습니다.

문(問) : 길을 가는 중에 또한 서로 만나 동행한 자도 없었느냐?

공(供) : 없습니다.

문(問) : 그 때 최경선(崔慶善)은 동행하지 않았는냐?

공(供) : 최(崔)는 추후(追後)에 왔습니다.

문(問) : 삼례(參禮)에 이르러 누구 집에 모였느냐?

공(供) : 저막(邸幕)일 뿐입니다.

문(問) : 삼례(參禮) 땅에 본디 아주 친한 집이 있었느냐?

공(供) : 처음부터 아주 친한 자가 없을 따름입니다.

문(問) : 삼례(參禮)의 호수(戶數)는 얼마나 되느냐?

공(供) : 100여 호(戶) 입니다.

문(問) : 네가 거하던 근처(近處)에는 100여 호(戶)의 시골 마을이 없지 않을 터인데 특히 여기에 모인 것은 무슨 까닭이냐?

공(供) : 이 땅은 도로(道路)가 네 곳으로 통하고 역촌(驛村)이기도 했기 때문일 따름입니다.

문(問) : 최(崔)가 삼례(參禮)에 이른 뒤 함께 머무른 것이 며칠이냐?

공(供) : 5~6일 함께 머문 뒤 곧바로 광주(光州)・나주(羅州) 등지(等地)로 향하였습니다.

문(問) : 무슨 까닭으로 인하여 광주(光州)・나주(羅州) 등지(等地)로 향하였느냐?

공(供) : 기포(起包)의 일 때문입니다.

문(問) : 최(崔)가 광주(光州)・나주(羅州)로 간 것은 네가 시킨 것이냐?

공(供) : 이 몸이 시킨바 아니요, 다만 그가 광주(光州)・나주(羅州)에 일찍이 친지(親知)가 많아서 기포(起包)가 쉬웠을 따름입니다.

문(問) : 그 때 삼례(參禮)에 모두 모였을 때 동도(東徒) 중에 가장 저명(著名)한 자가 누구이냐?

공(供) : 금구(金溝)의 조진구(趙鎭九), 전주(全州)의 송일두(宋一斗)와 최대봉(崔大奉) 등 몇 사람이 소위(所謂) 가장 저명(著名)한 자였으며 그 나머지 허다(許多)한 자들은 지금 모두 기억하기 어렵습니다.

문(問) : 그 때 삼례(參禮)에 소위(所謂) 의병(義兵)으로 모인 자는 몇 명이나 되었느냐?

공(供) : 4,000여 명이었습니다.

문(問) : 이 무리를 데리고 처음 어느 곳으로 향하였느냐?

공(供) : 처음 은진(恩津), 논산(論山)으로 향하였습니다.

문(問) : 논산(論山)에 도착한 것은 어느 날이냐?

공(供) : 지금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문(問) : 어찌 대략 기억할 도리가 없느냐?

공(供) : 가량(假量) 10월 그믐 사이입니다.

문(問) : 논산(論山)에 이르러 무슨 일을 행하였느냐?

공(供) : 논산(論山)에 이른 뒤에 또한 널리 소모(召募)의 일이 있었습니다.

문(問) : 이곳으로부터 다시 어느 땅으로 향하였느냐?

공(供) : 곧바로 공주(公州)를 향하였습니다.

문(問) : 공주(公州)에 도착한 것은 어느 날이냐?

공(供) : 동짓달 초6~7일 사이 같으나 상세히 알지 않을 따름입니다.

문(問) : 공주(公州)에 이른 뒤에 무슨 일을 행하였느냐?

공(供) : 공주(公州)에 이르지 못하고 접전(接戰)하였으나 끝내 패배(敗北)하였을 따름입니다.

문(問) : 네가 매번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반드시 친서(親書)로써 하였느냐, 설혹(設或) 대서(代書)로써 하였느냐?

공(供) : 혹은 친서(親書)였고 혹은 대서(代書)였습니다.

문(問) : 혹 대서(代書)할 때 반드시 너의 도서(圖書)로써 채웠느냐?

공(供) : 피봉(皮封)에는 많이 도서(圖書)로써 채웠으나 혹은 이를 쓰지 않은 예가 많습니다.

문(問) : 네가 삼례(參禮)에 있을 때 네가 사람들에게 보낸 글이 매우 많은데 이것이 모두 친서(親書)였느냐, 아니면 대서(代書)였느냐?

공(供) : 모두 통문(通文)으로써 보낸 것이지 사사로운 서간(書簡)으로써 한 것이 아니며 오직 손화중(孫化中)이 있는 곳에만 글을 보냈을 뿐입니다.

문(問) : 처음부터 한 자(字)라도 사사로운 서간(書簡)을 사람들에게 보낸 적이 없느냐?

공(供) : 만약 그 서간(書簡)을 본다면 가히 알겠지만 지금은 상세히 알지 않을 따름입니다.

문(問) : [영사(領事)가 서간(書簡)을 내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이 너의 친서(親書)이냐, 대서(代書)이냐?

공(供) : 대서(代書)입니다.

문(問) : 누구로 하여금 대서(代書)하게 하였느냐?

공(供) : 접주(接主)의 필적(筆跡) 같으나 지금 그 사람을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문(問) : 일찍이 네가 최경선(崔慶善)으로 하여금 대서(代書)의 일을 하도록 하였느냐?

공(供) : 최(崔)는 글에 능하지 않는 자입니다.

문(問) : 이 서찰(書札)은 삼례(參禮)로부터 나온 것이냐?

공(供) : 그렇습니다.

문(問) : 이 서찰(書札)의 달과 날은 분명히 9월 18일인즉 어찌 10월 삼례(參禮)의 회합(會合)에서 나올 수 있느냐?

공(供) : 지난 공술(供述)에서 10월이라고 하였는데 9월인 것 같습니다.

문(問) : [영사(領事)가 또 한 서간(書簡)을 내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친서(親書)이냐, 대서(代書)이냐?’

공(供) : 이 또한 대신한 것입니다.

문(問) : 그 서찰(書札)은 또한 대신 누가 쓴 것이냐?

공(供) : 이 또한 접주(接主)로 하여금 쓰게 한 것이나 지금 그 사람을 기억하기가 어렵습니다.

문(問) : 오늘 너의 공술(供述)한 바가 반드시 일일이 바른대로 고한 연후에야 죄안(罪案)이 가히 속히 결정될 것이며 만약 많은 단서(端緖)를 거짓으로 고한다면 일이 지리(支離)해질 뿐만 아니라 또한 너의 몸에 해(害)가 많이 있을 것이다.

공(供) : 월(月)과 일(日)은 과연 상세하게 기억하기 어려우나 그 나머지 범상(凡常)한 일은 어찌 일호(一毫)라도 속여 고하겠습니까?

문(問) : 대서(代書)할 때 반드시 정한 사람이 있을 터인데 어찌 가히 알지 못하느냐?

공(供) : 그 때 이 몸이 본디 필적(筆跡)이 졸렬(拙劣)하여 매번 사람으로 하여금 대서(代書)하도록 하였으나 본래 정한 사람은 없습니다.

문(問) : 이 두 서찰(書札)은 모두 네가 시킨 바이냐?

공(供) : 그렇습니다.

문(問) : 삼례(參禮)에서 규합(糾合)한 일은 모두 너의 손에서 나왔느냐?

공(供) : 그렇습니다.

문(問) : 그렇다면 모든 기포(起包)에 관한 것은 모조리 네가 주도(主導)한 바이냐?

공(供) : 그렇습니다.

문(問) : [영사(領事)가 또 한 서간(書簡)을 내보이며 말하기를] 이 또한 네가 시킨 것이냐?

공(供) : 그렇습니다.

문(問) : [영사(領事)가 또 한 서간(書簡)을 내보이며 말하기를] 이 또한 네가 시킨 것이냐?

공(供) : 그렇습니다.

문(問) : 지난 날 공술(供述)한 바, 너와 김남(金男)이 처음부터 상관(相關)이 없다고 말했으나 지금 이 서간(書簡)을 보니 그간 많은 상관이 있음은 어찌된 것이냐?

공(供) : 김(金)은 이 몸이 왕사(王事)에 힘을 합하자고 권고하였지만 끝내 들어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상의(相議)한 바 있으나 끝내 절대로 상관(相關)하지 않았습니다.

문(問) : [영사(領事)가 작은 조각으로 된 한 기록을 내보이며 말하기를] 이 두 종이의 필법(筆法)은 한 사람의 필적(筆跡)이나 앞의 글은 네가 한 것이라고 공술(供述)하고 지금의 글은 어찌 알지 못한다고 말하느냐?

공(供) : 지금 이 글은 이 몸이 한 바가 아닙니다.

문(問) : 아까 삼례(參禮)의 일은 모두 너에게서 나왔다고 말했으나 지금 보여준 이 녹편(錄片)이 너에게서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실로 모호(模糊)함에 그친다.

공(供) : 녹편(錄片) 중에 서학(徐鶴)이라 한 것은 서병학(徐丙鶴)입니다. 학(鶴)은 이 몸과 더불어 절대로 왕래(往來)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이 시킨 바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問) : 동도(東徒) 중에 접주(接主)를 차출(差出)하는 것은 누가 하는 것이냐?

공(供) : 모두 최법헌(崔法軒)에게서 나옵니다.

문(問) : 네가 접주(接主)가 된 것 또한 최(崔)가 차출한 것이냐?

공(供) : 그렇습니다.

문(問) : 동학접주(東學接主)는 모두 최(崔)에게서 나왔는가?

공(供) : 그렇습니다.

문(問) : 호남(湖南)과 호서(湖西) 일체(一切) 똑같이 그러하냐?

공(供) : 그렇습니다.

문(問) : 도집(都執), 집강(執綱)의 소임(所任)과 같은 것에 이르러도 또한 모두 최(崔)가 차출한 것이냐?

공(供) : 비록 최(崔)에게서 많이 나왔으나 혹은 접주(接主) 등이 차출(差出)한 바 있습니다.

아룀(白)

(번역 : 이이화)

주석
전명숙(全明淑) 전봉준. 『천안전씨세보(天安全氏世譜)』에는 숙(淑)이 숙(叔)으로 표기되어 있음.
기솔(騎率) 장수가 말을 타고 부하를 거느림.
우도(右道) 전라우도(全羅右道). 전라도 서쪽 지대.
순상(巡相)의 영(令) 순상(巡相)은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칭한다. 전봉준은 후임 전라감사인 김학진(金鶴鎭) 사이에 집강소 설치에 대해 합의를 보았다. 그래서 전봉준은 여러 고을을 순행했으며 남원에서 1894년 7월 15일 김개남 손화중과 함께 관민상화(官民相和)의 계책을 논의했다. 황현, 『오하기문』 갑오년조 참조.
영문(營門) 전라감영(全羅監營).
도청도설(道聽塗說) 거리에 떠도는 소문.
소모(召募) 농민군(農民軍)을 불러 모음.
따름입니다. 충청감영을 점령하기 위해 공주성을 향해 진격하다가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패배한 사실을 말한다.
도서(圖書) 도장(圖章)과 수결(手決).
통문(通文) 여러 사람들에게 보낸 글.
김남(金男) 김개남(金開男)을 지칭함.
왕사(王事) 임금의 일.
녹편(錄片) 대강의 내용만 간단하지 적은 쪽지.
서병학(徐丙鶴) 서병학은 최시형의 직계로 1893년 봄 보은집회를 열었을 때 강경파로 알려졌다. 그 뒤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자 관군의 밀정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 한성부(漢城府) 도사(都事)가 되었다. 이이화, 『발굴 동학농민전쟁인물열전』, 한겨레신문사, 1994 참조.
최법헌(崔法軒) 최시형(崔時亨)을 지칭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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