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의 심문기록은 법무아문의 심문관과 일본 영사관의 영사가 공동 신문한 내용을 수록했다. 편집과 정리는 법무아문의 뒤를 이은 법부(法部)에서 맡았으며 현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필사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한편 국가기록원에도 이 공초가 전봉준판결선고서와 함께 필사본으로 보관되어 있다. 이들 공초의 한 본은 한문, 한 본은 국한문 혼용현토한 수준으로 되어 있는데 이 번역에는 국한문 혼용본을 대본으로 사용했다.
이 문서의 제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공초(供草)는 법률용어가 아니다. 굳이 뜻을 풀이하자면 공초(供招)를 베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죄인에 대한 문초는 어디가지나 공초(供招)라고 해야 옳다. 그런데도 공초(供草)라 표기한 것은 처음 문서의 표지 제목을 쓰면서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내용에도 초초(初招) 재초(再招)라고 표시해 공초(供招)임을 나타내고 있다.
다음, 전봉준은 태인전투 이후, 서울로 올라올 계획을 가지고 정읍과 장성의 경계에 있는 입암산성을 거쳐 순창 피로리로 몸을 숨겼다가 현지 민병들에게 12월 2일에 잡혀 나주 초토영의 감옥에 억류되었다. 그러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남산 밑에 있는 일본영사관 감옥에 갇혔다. 이 때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등 동지들도 함께 갇혔다. 일본 영사는 개화정부의 법무아문 심문관과 함께 전봉준 등 연루자를 조사 심문했다. 공초에는 무슨 연유인지 두 사람 다 성명이 밝혀져 있지 않다. 하지만 전봉준판결선고서에 따르면, 선고에 참여한 담당자는 법무아문대신 서광범 이하 협판 이재정, 참의 장박, 주사 김기조, 오용묵 등이고, 일본측은 경성주재일본제국영사인 우치다 사다츠지(內田定搥)였다.
심문 월일에 따라 5차에 걸친 심문 내용의 순서를 보면, 1차 2월 초9일, 2차 2월 11일, 3차 2월 19일5차로 잘못 표시, 4차 3월 7일, 5차 3월 10일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4차인 3월 초7일자의 신문 기록이 다섯 번 째에 수록되어 있으면서 “4차 문목”이라 기재되어 있어서 착각을 일으키게 편집되었다. 그런데 제목 위에는 “마땅히 위에 있어야 한다”고 잔글씨로 부기(附記)되어 있는데 3월 초10일자의 앞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부분은 편집상의 착오이므로 3월 초10일 5차 문목은 당연히 맨 마지막에 놓아야 한다. 내용으로 따져보아도 이런 순서가 맞을 것이다.
내용은 문(問)과 공(供)으로 표시해서 공은 한 글자를 낮추어 기록했다. 여기에서는 일반체제대로 문은 공초, 공은 공술로 표시했으며 관례에 따라 문초 어투는 하대의 말로, 공술 어투는 존댓말로 번역했으며 문초나 대답에서 죄인을 부르는 관용어인 의신(矣身)도 “나” 또는 “너”로 단순하게 번역했다. 전봉준은 의연하게 답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반 관례를 감안한 것이다. 문초 가운데 1차, 2차, 3차는 법무아문 관원과 일본 영사가 담당했고, 4차, 5차는 일본 영사가 공초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순서에 따라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러하다.
1차 공초; 전봉준의 개인 신상과 동학과의 관련 사항, 고부봉기의 동기, 조병갑의 부정행위, 고부봉기 뒤의 행적, 안핵사 이용태 관련 사항, 장성전투의 과정, 전주성 점령, 집강소 활동, 삼례 결집과 공주전투 등을 다루었다. 비록 사건 과정은 사건이 일어난 월일 순서대로 문초하지는 않았으나 전봉준 봉기의 실상을 모두 다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2차 공초; 주로 탐관오리의 불법 탐학의 문제와 중앙세력인 민씨의 부정행위, 홍계훈과 전주에서 맺은 약속, 동학 접주가 된 동기, 동학교단의 조직, 2차 봉기의 동기와 목적, 흥선대원군과 소모사 관련, 최시형과의 관계 등을 다루었다.
3차 공초; 흥선대원군의 사자인 송희옥 관련문제, 흥선대원군 효유문 내용 등을 다루었다. 이어 송희옥과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집중해 문초하고 있다. 삼례대회와 재봉기, 흥선대원군 효유문의 진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문제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4차 공초; 다시 전봉준의 이름 별호 등 신상문제와 집강소 설치과정, 손화중, 최경선 관련 사항, 삼례 회동과 각지의 접주, 은진 논산 경과와 공주 접전, 전봉준 문서의 대필 문제 등을 문초하였다.
5차 공초; 전봉준이 통문 격문을 보낼 때 친필 또는 대필 문제와 주변 인물에 대해 주로 공초를 벌였는데 보충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공초는 대체로 한 달쯤 진행되었다. 문초는 274개의 문항으로 진행되었다. 이 기록을 통해 전봉준이 주도한 봉기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농민군의 규모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더욱이 전봉준이 남긴 개인 기록이 없는 마당에 이 1차 사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전봉준은 동지와 부하 특히 흥선대원군을 보호하려고 했는지, 이와 관련된 내용은 부실하다고 볼 수 있겠다. 이 1차 사료는 전봉준판결서 원본의 기초 사료가 된다 하겠다. 이 공초가 끝난 뒤 법무아문 권설재판소(權設裁判所)로 이관되어 판결이 나왔던 것이다.
아무튼 이 공초를 최초로 분석한 김용섭은, “이 공초는 전봉준 자신의 기록이 발표되고 있지 않은 오늘날에는, 그의 동학란에서의 반봉건적 반제국주의적 태도나 그 이론적 근거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전봉준공초의 분석고 말하고 있다. 이 지적이 맞기는 하지만 흥선대원군과의 관련설에는 거의 기휘(忌諱)로 일관했다고 볼 수 있고 자신의 부하나 동지의 관련 사실에 대해서도 애써 감싸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이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