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영영(嶺營)에서 보내온 전보에, “정조 전문(箋文)은 정식(定式)에 따라 이 달 12일에 봉(封)해서 바쳤는데, 다시 봉해서 바쳐야 할지와 관례대로 존호(尊號)를 써야 하는지, 그리고 장계(狀啓)는 감사와 유수가 모두 중지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하교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금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회인(懷仁)에서 보고하기를, ‘적괴(賊魁) 양홍개(楊紅盖)가 들어와서 그 수가 점차 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병사가 보고하기를, ‘별군관(別軍官) 이태(李泰)가 보은(報恩)의 죽암(竹巖)에 도착하여 30여명을 죽였으나, 고립된 군대로 적을 상대하기 어려워서 물러나 미원(米原)과 충주(忠州)의 병참(兵站)에서 병사를 징발하게 하였습니다. 제천(堤川)에서 구원하러 나오는 것이 아직 더디고 만약 제천의 군사가 오지 않는다면 물러나서 청주를 지킬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서산에서 1대(一隊)의 군사가 오늘 아침에 여기에 도착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