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화성 유수가 보내온 전보에, “지금 금백(錦伯, 충청 감사) 선봉(先鋒)의 편지를 보니, ‘이 달 14일에 적괴(賊魁)김개남이 청주에 들어와서 성을 압박하니 청주 병사(兵使)가 미리 격퇴하여 1,000여명을 죽였고 무기를 빼앗았는데, 그 중에 붉은 갑옷을 입은 자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이 자가 김개남인지 모르겠습니다. 15일에 군사를 보내 노성(魯城)의 적을 토벌했는데, 금영 영장(營將)이 먼저 노성의 괴봉(乖峯)을 점거하고, 일본군과 경군(京軍)이 그 앞을 정리하니 전봉준은 여전히 거리에 진을 치고 있으나 나머지는 각기 흩어졌습니다. 전적(全賊, 전봉준)을 잡아 목을 베었다고 하기도 하고 탄환에 맞았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2적(賊)들이 비록 패배했어도 이밖에 적들이 곳곳에서 날뛰어 차례대로 토벌해야합니다. 시일이 만약에 늦어진다면 나머지 무리의 기세가 다시 일어날 것이니 하루가 아니 되어 군사를 내어서 바로 토벌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5호(五號)
영백(嶺伯)에게 전보하기를, “달성판관에 창녕(昌寧)의 조병길(趙秉吉)을 임명하니 바로 부임하도록 지시하라”고 하였다. 정부.
화성 유수가 보내온 전보에, “호남 소모관(召募官) 전동석(田東錫)이 순무영(巡撫營)에 전한 관문에, ‘총과 환도(環刀)각각 200자루와 탄약을 적당히 헤아려서 주라’고 하였으나 관문에 따라 주는 것은 다시 처분을 기다려서 거행하려고 합니다. 본영(本營)의 군기고에 있는 총의 숫자는 적지 않으나 하나도 쓸 만한 것이 없습니다. 아병(牙兵, 본진에서 대장을 수행하는 병사) 중에 총을 소지하지 못한 자가 23명입니다. 탄약은 지난날에 요청하여 500근(斤)을 얻었으나 변포(邊圃, 주변 지역인 듯) 10여 곳을 방어하고 3삭(三朔) 동안 시험 삼아 발사하는데 사용해버려서 남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환도 외에는 줄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6호(六號)
화영(華營)에 전보하기를, “환도는 순무영의 전보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정부(政府).
기백(箕伯)이 보내온 전보에, “신임 해백(海伯, 황해도 관찰사)의 교유서(敎諭書)는 무슨 이유로 오지 않는지 모르겠고, 아직도 부임하지 않아서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도중에 의주의 전보를 보았더니, ‘김유현(金有鉉)이 김우용(金禹用)과 함께 갔다’고 합니다. 김우용에게 물어보시면 그 거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새로 부임한 안주 병사가 보낸 전보에, “일본군의 접대와 운송 및 전선(電線)은 먼 거리에 어려운 일이 많아 일본군 진영과 상의하여 안주 등지에 가서 대면하여 지시하고 규정을 세울 것입니다. 또한 순영(巡營)과 일을 처리하고 의주에 돌아가서 조처할 계획입니다. 그러나 부임하는 일은 아직 조령(朝令, 조정의 명령)이 없어 단지 갔다가 돌아올 뿐입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