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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규태왕복서병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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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11월 9일 올린 편지

공주 달동(達洞)에 사는 접주(接主) 장준환(張俊煥)은 본래 행실이 패악하고 바로 이 읍의 거괴(巨魁)입니다. 그러나 지난 25일에 호남의 비도(匪徒)가 패하여 돌아간 뒤에 감히 포(包)를 만들려고 몰래 그의 집에 돌아왔다는 소문이 매우 해괴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달 1일 밤에 병사와 공주 진관(鎭管)의 포교를 보내 그의 뒤를 밟아 잡게 하였으나, 통탄스럽게도 저 장가(張哥) 놈이 낌새를 채고 달아나서 바로 체포하지를 못했습니다. 그의 집을 수색했더니, 장지(壯紙, 두꺼운 종이)로 《만든》 깃발과 대나무로 깃대를 만든 것이 6~7개였고, 망가진 총 3개·환도(環刀) 1자루·창 13자루와 그밖에 포(包)를 만든 문서 등이 있었습니다. 이 달 3일에 공주에 사는 전 오위장(前 五衛將)이자 본진(本陣) 별군관(別軍官)인 이상만(李象萬)이 원당리(元塘里)와 단평리(丹坪里) 2개 마을의 민정(民丁)을 인솔하여 장준환을 잡아서 진중 앞에 데려왔습니다. 지금 이 이상만이 의기(義氣)를 내어 백성들을 권면해서 거괴의 뒤를 밟아 체포한 것이 가상하기 때문에 우선 본진(本陣)에서 엽전 50냥으로 상을 주었습니다. 또한 금영(錦營)에서 특별히 200냥을 주고 2개 동(洞)의 호포세(戶布稅)를 줄여주어 권장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전 오위장 이상만은 특별히 장려하여 기용하는 일이 없어서는 아니 되기에 특별히 처분하였고, 장준환은 잠시도 용서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진중 앞에서 효수(梟首)하여 백성들이 품은 원한에 사례를 했습니다.
양영(兩營)의 병사가 이인(利仁)과 판치(板峙) 2곳을 번갈아 지키려는 뜻을 이미 첩보(牒報)하였습니다. 8일 미시(未時, 오후 1시~3시) 쯤에 판치에 주둔하고 있는 경리청 참령관(經理廳 參領官) 구상조(具相祖)가 구두로 전하는 급보를 받아보니, “당일 미시(未時, 오후 1~3시)와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쯤에 비도 몇 천명이 경천참(敬天站)에서 바로 올라오거나 노성현(魯城縣)의 뒷 봉우리에서 산을 올라 에워싸서 포소리가 진동하고 깃발색깔이 뒤섞이며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나와 이와 같은 병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편리한대로 효포(孝浦)와 웅치(熊峙) 등지의 요충지와 높은 봉우리로 진영을 옮기고 지켜 살펴보도록 지시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도달된 이인에 주둔하고 있는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永)이 구두로 전한 급보에, “비류 몇 천명이 논산에서 지름길로 고개를 넘어왔고, 또한 몇 천명이 오실(梧室) 산길을 따라와서 배후를 차단하여 포위하였습니다”라고 하기에, 한편으로 일본군 사관(仕官)에게 《편지를》 전하여 군대를 출동하게 하였고, 또한 영(營)에 주둔하고 있는 통위영(統衛營)의 병사 2소대를 보내어 구원하였습니다. 연이어 판치의 진중에서 급히 보고한 것에 의하면, “효포와 웅치를 지킨 뒤에 비도가 산과 들에 가득차서 비록 감히 바로 올라오지는 못하더라도 깃발을 두루 꽂아놓아 기세가 매우 대단하지만 저물 때까지 아직 소란을 일으키는 별다른 정형은 없습니다”라고 하였고, 이어서 이인에 주둔한 진중의 급한 보고를 받아보니, “두 갈래 길의 적병과 힘을 다해 《싸워》 죽여 적을 격퇴하고 다시 우금치 10리쯤 되는 곳에 주둔했는데, 술각(戌刻, 오후 8시)에 이르러 양영(兩營) 부대의 병사와 휴대한 군수품에 별다른 손실은 없었고, 좌2소대(左二小隊) 병사 김명수(金命壽)가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아 실려 왔으나, 밤이 깊어 그 사정을 다시 정탐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형이 불편한데다가 뒤에 구원하러 오는 병사가 없어 이렇게 물러나 주둔하였는데, 비록 용서할 만하더라도 군율이 있어 경계가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래서 서산 군수 성하영과 경리청 대관 윤영성(尹泳成)·백낙완(白樂浣) 등을 인솔하여 진중 앞에 오게 해서 각별히 지시하고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하였습니다. 각처를 지키고 척후(斥候)를 하는 일은 더욱 더 단단히 하도록 지시하였고, 일본군 사관 육군 보병 대위가 직접 군사를 인솔하여 우금치에 나가 함께 주둔하였습니다. 다음날 9시 해가 뜰 때에 적의 형세를 상세히 살펴보았더니, 각 진(陣)이 바라보는 곳에 여러 깃발을 두루 꽂아놓고 동쪽으로 판치 뒷 봉오리에서 서쪽으로 봉황산(鳳凰山) 뒤의 산등성이까지 30~40리에 걸쳐 이어져있었습니다. 산위에 진이 늘어서 있고 사람이 병풍처럼 둘러싸서 적의 기세가 매우 창궐하여 고립될 염려가 없지 않았습니다. 웅치와 효포 건너편의 비도는 10리쯤 서로 바라보는 높은 봉우리에 늘어서서 모여 있으나,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고, 우금치 서남쪽의 양쪽에 있는 적들은 고함을 지르며 요란스럽게 늘 경계를 침범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먼저 주둔하고 있는 경리청의 각 부대에 지시하여 일본군과 합세하여 나가서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 쯤부터 포격을 시작하여 여러 번 적을 죽였으나, 여전히 적은 많고 아군은 매우 적은 형세였습니다. 미시(未時, 오후 1시~3시) 쯤에 이르러도 적을 격퇴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모두 충의(忠義)에 떨쳐 일어나고 병사들이 비분강개할 때에 참모관 전 도사(前 都事) 권종석(權鍾奭)·전 주서(前 注書) 이규백(李圭白)·유학(幼學) 정도영(鄭道永) 등이 병사를 통솔하여 용감하게 나아가게 하였고, 본영(本營, 순무영)의 계차군관(啓差軍官, 임금에게 아뢰어 임명한 군관) 출신(出身) 이달영(李達營)·송흠국(宋欽國), 전 만호(前 萬戶) 이지효(李志孝)·전 감찰(前 監察) 이재화(李在華)·전 중군(前 中軍)이종진(李宗珍)·전 수문장(前 守門將) 유석용(柳錫用)·전 부장(前 部將) 박정환(朴晶煥)·사과(司果) 이흥교(李興敎)·본진(本陣) 차정군관(差定軍官) 전 오위장(前 五衛將) 황범수(黃凡秀)·유학(幼學) 이주위(李周瑋)·사과(司果) 이선(李璿)과 서산 군수 성하영 및 경리청 교장(經理廳 敎長) 김명환(金命煥)·정재원(鄭在元)·정인갑(鄭寅甲) 등은 먼저 오르도록 명하였더니 힘을 내어 통솔하여 쏘아죽인 적이 이어졌으나, 그 수를 상세하게 《알 수가 없었습니다.》 비류(匪類)를 추격하여 적들이 모여있는 높은 봉우리를 점령하고 군기와 대포 등의 물건 및 여러가지 깃발 60~70개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일본군 사관, 대위와 일본군과 함께 10여리를 추격하였습니다. 공주 영장(營將) 이기동(李基東)은 해당 영의 병사를 인솔하여 봉황산 뒤의 산등성이를 지키다가 몸을 들어 병사를 이끌고 함께 나왔다가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정각(正刻, 오후 6시)에 비로소 철수하여 진중에 돌아왔습니다. 비도가 사방으로 흩어져서 달아났으나, 날이 이미 저물어서 《적을》 모두 토벌하지 못했는데, 적의 기세가 비록 조금 꺾였으나 남은 무리가 아직도 많아 실제로 그 정형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대로 지키도록 지시하고 척후를 한층 더하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립된 병력으로 풍찬노숙(風餐露宿)한 지가 6~7일 될 정도로 오래되었고, 격렬한 싸움을 한 뒤에 밤에 노숙을 하니 매우 근심스럽고 절박합니다. 경리청의 좌1소대 남창오(南昌五) 병사가 몸을 내어 앞장서서 싸우다가 왼쪽 가슴에 탄환을 맞았으나, 다행히 죽음을 면했기 때문에 어제 탄환을 맞은 병사와 함께 치료를 하였습니다. 비도가 창궐할 때에 온 성의 인민이 울부짖고 달아나서 거의 잠시도 보전할 수가 없는 듯하였고, 보는 게 참담하였는데 승리를 한 뒤에는 나이가 들거나 어린 민인들이 각자 빼앗은 대나무 깃대를 가지고 기뻐 춤을 추며 각 진과 각 아문(衙門)에 고마움을 표하였습니다. 한편으로 울고 다른 한편으로 기뻐서 웃으니 하늘의 뜻과 민심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부상을 당한 병사 2명과 몸을 내어 먼저 《봉우리에》 오른 장졸 및 군관 등이 비록 자신의 본분에 있는 직책이라도 권장하여 포상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하지만 감히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획득한 군물(軍物)은 먼저 적어 성책(成冊)해서 올려 보내고, 빼앗은 군물을 진중에 납부하는 병사는 마땅히 구별해서 따로 적어 보고할 것입니다. 그 뒤의 사정은 차례대로 빨리 보고할 계획입니다.

갑오년 11월 9일

주석
풍찬노숙(風餐露宿)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한데서 먹고 잔다는 곧 객지에서 고생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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