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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예순아홉 11월 18일 [其六十九 十八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17일에 도착한 통위영 소속 우참영관(右叅領官) 장용진(張容鎭)의 보고 내용에, “오늘 14일 진시 경에 선봉의 주력부대 가운데 동시에 떠난 참모관 권종석, 별군관 유석용·이지효·황범수·이주서 등이 유시 경에 용수막 30리에 도착하여 유숙하였습니다.

선봉진이 공주로 되돌아가 주둔한 뒤로 일본군 대위 부대와 함께 각각 배정을 하고, 해시 경에 일본군 대위의 통지에 따라 참모관 권종석, 별군관 유석용 등을 이인에서 주둔하고 있는 장위진(壯衛陣)으로 보내 노성읍 서쪽 길을 따라 곧장 들어가게 하고, 일본군 대위 부대는 노성의 봉수대 뒷길을 따라가며, 본진은 경천 길을 따라서 노성의 동쪽 길로 곧장 들어가서 세 길을 석권하고자 자시에 출발하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상지소(相池所)로 간 좌 3소대가 일제히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때맞춰 출발하여 곧바로 노성 동쪽 길로부터 적이 진을 치고 있는 곳까지 서둘러 들어가니 날이 샐 무렵에 이르렀습니다.

이른바 진을 치고 모여 있다는 적진은 적막하기가 마치 사람이 없는 듯하여 의아스러웠습니다. 약속대로 총포를 쏘니 봉수대 뒷길로 온 일본 병사 및 서쪽 길을 취하여 온 장위진이 일제히 총소리에 호응하여 두 길에서 달려오니 기세가 산악(山嶽)과 같았습니다. 함께 나란히 노성읍으로 전진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적들을 추격하여 잡았고 각 부대는 그 잡는 대로 포살하였습니다. 이윽고 비류들이 논산 등지로 도주한다는 말을 듣고는 길을 나누어 뒤쫓아 가보니 과연 큰 마을 뒤 둥근 산봉우리 위에 여러 깃발들이 연립해 있었으며 간간이 총포를 쏘아대니 보기에 통탄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병정 및 대관·참모관·군관 등을 독려하여 힘을 다해 쫓아 올라가니 진을 치고 모여 있던 약간의 적들은 대부분 도망쳐 흩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 곳을 빼앗아 차지하고 적들의 여러 깃발을 뽑아버린 뒤에 아군의 대장기로 대응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관군이 주둔하여 웅거하고 있음을 알게 하였습니다. 또 봉수대가 있는 높은 봉우리를 바라보니 진을 치고 있는 적들이 있었는데 서로의 거리가 수십 리쯤 되었습니다. 승세를 탐에 따라 일본 병사와 일제히 출발하여 날래게 올라가 웅거지를 탈환하였습니다. 이때 장위진의 주력 부대가 또 다른 쪽에서 진격해 옴에 힘을 합쳐 적을 토벌하고 모두 쫓아버렸는데, 한쪽에서는 총포를 쏘며 뒤쫓아 죽인 적의 수가 매우 많았으나 그 수효를 알 수 없었습니다. 적을 뒤쫓아 10리쯤 갔으나 날이 벌써 저물어 각 부대 모두는 논산 등지로 되돌아가 주둔하였습니다.

주둔지에는 몇 백의 여염집 전부가 텅 비어있어 보기에 걱정스럽고 참혹하였습니다. 밤을 지낸 뒤 그 이튿날 16일에 높은 곳에 올라가 관찰하였으나 적들의 형적(形跡)을 전연 볼 수가 없었고, 곧장 호남의 경계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 부대는 노성읍의 길로 돌아와 주둔하였고 강촌(江村)에 도착하여 화약을 제조했다는 곳과 접(接)을 설치한 곳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참모관·별군관 등이 병정 여러 명을 거느리고 곧장 그 집에 가서 화약을 제조하는 기구들을 모두 파괴하였고 남겨진 여러 깃발과 잡물 짚신의 등속들도 하나같이 파괴하거나 태워버렸습니다.

한편 일본군 대위의 지휘에 따라 경천점의 앞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방어하게 하고 있으며 각 부대의 장졸(將卒)들은 한 명도 상해를 입은 자가 없었습니다. 노획한 군물과 앞장서서 적진으로 올라간 장졸의 성명은 차례로 책자를 만들어 달려가 보고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도착한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의 보고 내용에, “오늘 늦게 도착한 전령에 따라 정산에서 출발하여 이인으로 향한 사유는 이미 보고하였거니와, 어제 정산에서 주둔하여 묵을 때에 적의 정형을 탐지하니 해당 읍의 건지동(乾芝洞)에 저들 무리가 많이 있다고 하기에 밤 오경 때가 되어 병정을 파견하여 주거지를 포위하고는 엄습하여 동도(東徒) 100여 명을 체포하고 철저하게 조사하여 이인에서 접전할 때에 따라 간 사람 및 멋대로 행패를 부린 자를 적발하여 10명에 한하여 즉각 처단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여러 놈들도 이미 다 무리에 들어갔기에 당장에 모두 죽여야 하지만 다들 위협에 못 이겨 따랐으며 행패도 없었고 ‘과오와 불행으로 지은 죄는 풀어 놓아 준다’라는 죄목에 관계되어 용서하는 은전을 베푸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에 앞으로 유회소를 빨리 설치하여 동도들을 기회에 따라 죽일 수 있다는 뜻으로 깨우치며 또 타이르고는 모두를 석방하여 민심을 안정시킨 다음 행군하여 이인에 이르러 주둔하여 묵었습니다. 그리고 처단한 동도의 성명은 책자를 만들어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도착한 통위영 중에 우참영관 장용진의 보고 안에, “본진이 행군하여 논산 등지에 도착하여 비류를 대파한 사유는 이미 보고하였거니와, 비류와 접전할 당시 본진의 장졸들은 의기를 떨쳐 힘을 내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그 중에서 앞장서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운 자를 나열하고 기록하여 다시 보고합니다. 본 좌 3소대 병정 이원근(李元根)·김계운(金啓云)·조용이(趙用伊)·김의준(金宜俊)이 가장 앞서 적을 쫓았고 용기를 떨치며 출전하여 그들의 깃발을 빼앗아 적들로 하여금 놀라 겁먹고 후퇴하게 하였습니다.

병정 김복용은 적들의 인신(印信)과 문서를 빼앗았고, 병정 김량일(金亮一), 십장(什長) 김수길(金守吉), 화병(火兵) 최점동(崔點同) 등은 적진에 깊이 들어가 그들의 군수물자와 병기를 탈취하였으며, 대관 오창성, 교장 박상길, 규칙 김원석(金元錫)·이귀길(李貴吉), 십장 김봉두(金奉斗)·오성겸(吳性謙), 중(中) 4소대 대관 신창희, 교장 황수옥·김상운, 규칙 박원식(朴元植)·홍복영(洪福英), 십장 차흥규(車興圭)·김순일(金順一) 등은 맨 앞에서 병정을 이끌고 적을 무수히 무찔러 죽여서 적들은 이내 크게 궤멸하여 멀리 달아났습니다. 노획한 각 항목의 군수물자는 책자를 만들어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차례로 도착한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의 보고 내용에, “이달 14일에 이인에서 주둔하여 묵은 사유는 이미 보고하였거니와, 그날 밤 해시 경에 선봉진 참모관이 와서 일본군 장교의 통지를 전하기를 ‘즉시 용수막에서 합류하자’고 하기에 그날 자시 경에 행군하여 용수동(龍水洞)에 도착하여 일본군 장교 모리오 가이찌(森尾雅一)을 접견하니, ‘장차 노성에 있는 적을 칠적에 병력을 세 길목에서 출동시키되 본진은 서쪽 길을 따라서 날이 새기 전에 싸울 곳에 도착하여 서로 호응하자’고 말을 하므로 듣는 즉시 행군하여 노성의 주산(主山) 서남쪽 능선에 도착하니 날이 아직 밝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을 암석과 소나무 사이에 잠복시키고는 멀리 적의 무리가 모여 있는 곳을 살펴보니 저 멀리에 불더미가 매우 많았고, 노성읍을 살피니 고요하여 사람의 그림자나 소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숨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고 한 때가 지나 날이 채 밝지도 않았는데 주산에서 먼저 불이 붙어 아군이 먼저 싸움에서 이긴 줄을 알았고 이어 발걸음을 크게 하여 노성읍으로 향하니 주민들이 전하기를 적들은 어제 벌써 도망쳤다고 하였습니다.

대관 이규식을 보내 일본군 장교와의 약속을 이행하게 하고는 성읍에서 병사를 이끌고 전진하여 논산에서 10리 떨어진 지초동(地轈洞)에 도착하였습니다. 밥을 짓기 위하여 잠간 머물렀고 이미 일본 병사와 통위영 병사들이 논산을 향해서 앞서 갔다는 말을 듣고는 즉각 군장(軍裝)을 묶고 뒤를 따랐습니다. 겨우 몇 리를 지났더니 급히 말을 몰고 와서 보고하기를, ‘논산의 적들이 들판을 가득 메우고 관군에게 항거할 태세이다’라고 하므로 이를 응원하기 위하여 병사를 재촉하여 전진하였고 또 몇 리를 이르지 않아 앞서 간 부대의 포성이 들녘에 진동하였고 적병의 깃발은 해를 가릴 정도였습니다. 본진의 병사들은 포성을 듣고 깃발을 보더니 제각기 날뛰며 앞으로 달려 나갔으며 장관들은 부대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후면을 따라 호응하였고 일본 병사와 총위영 병사들은 벌써 작은 토산(土山)에 있던 적진의 깃발을 빼앗고는 함성을 질렀고 본진의 병사들도 일제히 호응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주둔한 적들은 아직 흩어져 낙오하지 않았고 무리를 정돈하더니 몇 백보의 땅으로 후퇴하여 은진의 황화대를 차지하고는 다시 돌격해 올 염려가 있었습니다. 헤아려보니 일본 병사와 총위영 병사들은 먼저 적을 격파하느라 지쳐있기에 본진이 이에 앞 언덕을 점거하고 적진을 살폈습니다. 적이 방어하는 황화대는 커다란 들판 중앙에 우뚝 서있고 사방에는 산기슭이 둘렀는데 가운데 산봉우리는 펀펀하고 이곳을 두른 산발치는 천연의 견고한 성벽이었습니다. 망원경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주위는 매우 널찍하고 적병은 사방에 서서는 번갈아 각종의 총을 쏘았는데 그 소리가 각각 달랐습니다.

천보총(千步銃) 소리는 크면서 멀리 갔고 후문총(後門銃) 소리는 작으면서 급했으며 화승총(火繩銃) 소리는 퍽퍽하면서 가까웠는데 제각기 격발하여 멀고 가까운데서 날아오는 탄환이 곡식이 흩어지는 듯 했습니다. 이에 의분과 용기가 격동되어 이를 개의치 않고 적을 업신여겨 즉시 대관 윤희영·김진풍, 별관군 윤지영·이겸래를 보내어 2개 소대를 거느리고 황화대 서쪽 광야 중앙을 따라 그 서남쪽을 포위하게 하고 참영관 원세록에게 반 개 소대를 주어 뒤에서 의병(疑兵)을 만들게 하고, 대관 박영호(朴永祜)·이규식, 별군관 김광수(金光洙)와 함께 몸소 1개 반 소대를 거느리고 황화대 동북쪽의 작은 능선을 따라 함성을 지르면서 곧장 올라가서 적의 서쪽 포위망을 부수게 하니 적은 남쪽 산기슭을 향해 미친 듯 달아났습니다.

이어서 모든 부대의 장졸을 지휘하여 함성을 지르며 추격하여 그 후미를 압박하면서 사격을 하니 남은 적 천여 명이 마치 새벽하늘에 별이 지듯 가을바람에 잎이 떨어지듯 쓰러졌고 길에 버려진 무기와 밭두둑을 따라 시체가 눈에 들어오고 발에 채였습니다. 이때 서쪽으로 해가 산에 걸리고 바다 장기(瘴氣)가 점차 일어남에 지는 해를 돌리지 못함을 탄식하고는 이어서 부대로 복귀한 병정을 수습하여 마침내 황화대에 주둔하고는 마을 집을 수색하여 병정을 먹이고 풍설을 무릅쓰고 밤을 지냈습니다.

그날 전투는 병사를 부리는 등 여러 가지에 대해 일본군 장교 모리오 가이찌(森尾雅一)와 같이 오르고 본 사람라면 참으로 그의 용심과 용력에 실로 흠탄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병정들이 몸을 바치면서 명령을 따랐던 것 역시 가상한 일입니다. 이튿날 모리오(森尾)의 통지에 따라 노성으로 회군하여 주둔하며 묵었습니다. 회군하는 길에 은진(恩津)의 묵동(墨洞)을 수색하였습니다. 적이 화약을 제조한 곳이라 하기에 참영관 원세록의 휘하 병정을 나누어 묵동으로 들어가게 하여 엄습하고 체포하여 죽인 자가 7명이나 되었고, 나머지 모두는 깨우치도록 설득하고 놓아 보냈습니다.

화약을 만드는 기구는 모두 파괴하였으며 어떤 지방으로 진군할지는 다시 명령을 기다려 시행할 생각입니다. 적과 접전 할 때에 적에게 부상을 당한 병정 김치순(金致順)은 보부상을 보내 공주 판관에게 후송하여 치료해주고 음식을 제공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이 노성·논산 두 곳에서의 승리는 비록 괴수를 다 섬멸하지는 못했지만 포살자·익사자가 도합 수삼 백 명이 넘으며 이미 목인(木印)도 빼앗았고 또 저들이 말하는 괴수의 깃발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저들을 흩트려 놓았다하더라도 다시 호남 등지에서 날뛰게 한 것은 진실로 극히 통탄스럽습니다. 힘을 다해 의기를 떨치고 목숨 바쳐 앞장서 올라갔던 각 진영의 장졸들은 분명한 포상과 격려의 방도가 있어야 하니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통위영에서 만든 탈취한 군물의 책자 및 장위영에서 만든 죄인의 책자는 모두 다듬어 순무사께 올립니다.

지금 호서(湖西)의 왼편≪충청북도≫으로 모여 진을 쳤거나 다시 소요가 있다는 보고가 없으니 조금은 정화되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내포(內浦)·임천(林川)·한산(韓山) 등의 읍과 서산(瑞山)·태안(泰安) 두 읍은 아직 토벌하여 평정하지 못하였으나 이미 경리청의 두 소대가 있으니 이후의 상황을 차례로 급히 보고할 계획입니다.

제(題): 장계로 아뢴 보고가 도착하였다. 장졸들이 앞을 다투어 적진으로 달려들어 여러 번 승전의 소식을 올렸으니 극히 가상한 일이다. 장령(將領)들이 몸을 바쳐 사졸(士卒)을 격려하였음을 볼 수 있었다. 종당에 포상이 있을 것이니 더욱더 면려할 일이다.

통위영, 장위영, 경리청, 총어영에도 그대로 베껴서 보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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