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7일 [十七日]
좌선봉진이 보고합니다. 무안읍으로부터 목포(木浦)를 향하여 출발한 연유는 이미 보고하였거니와 13일 유시 경에 목포진(木浦鎭)에 도착하였는데 밤이 되어 비가 내린 뒤에 바람과 파도가 크게 일더니 16일에 이르러도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후퇴하자니 200여 리의 길을 돌아서 가야하고, 전진하자니 30리의 험한 나루를 건너야 했으므로 결국 별다른 길이 없어 목포에서 나흘을 체류하였습니다. 군대의 행군을 생각하면 지극히 송구하고 민망합니다. 상민 보당(步塘)은 철수하라는 명령이 이미 해당 소임자(所任者)에게 내려졌기 때문에 상리국(商理局) 사람인 이원배(李完培)·송성운(宋成云)은 이제 올려 보내오나, 지나는 길가 고을들은 아직도 안정되지 못하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소식을 전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경포교(京捕校) 또한 긴요히 관계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내려 온 두 포교도 함께 올려 보냅니다. 상리국의 일을 맡은 두 사람은 천리 길을 종군하여 보초를 설 때나 정탐할 때에 처음부터 끝까지 수고를 다하였으며, 포교 정태식(鄭台植)·이성근(李成根)도 또한 《동학농민군을》뒤쫓아 체포하고 문초하는 일에 수고를 많이 하였으니 모두 지극히 가상합니다.
또한 각 읍의 상민으로 말하자면, 비도가 날뛸 때 각자 화를 피하여 감히 몸 둘 바가 없다가 또 행군한 뒤에 조금씩 모여 들어 문득 임방을 만들기도 하고 혹 군대를 쫓아와 거행한 자도 있습니다. 보초를 설 때에는 부지런히 수고를 다하여 조금도 실수가 없었으니 마땅히 각 읍의 경내에서 권장함이 있어야 하나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장흥·강진·영암·해남 등의 읍으로 각 부대를 동원하여 파병한 뒤로 비도의 정태를 아직 정탐하지 못하였으며 또 보고된 바도 없습니다. 이는 군무(軍務)에 있어서 매우 안타깝고 답답한 일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보고합니다.
제(題): 보고가 도착하였거니와 일의 상황을 계속하여 급히 보고하라. 그리고 상민의 보초 선 일과 경포교가 부지런히 애쓴 일은 가상하다. 1895년(乙未) 정월 초 4일 발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