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2월 초 9일. 장성에서 출발 [甲午十二月初九日 長城離發]
선봉진에서 보고합니다. 초 5일부터 초 8일까지 장성부에 주둔하고 아무런 사고 없이 숙박하였습니다. 그리고 방금 도착한 벽사찰방(碧沙察訪)의 보고 내용에, “동도 1,000여 명이 장흥의 사창 등지에 모였다가 이달 초 4일 진시 경에 이르러 곧바로 벽사역으로 침입하여 관아와 여염집에 다 불을 지르고 장흥부로 향하였습니다. 거주하는 백성들은 흩어지고 우관의 힘 정도로는 막을 계책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찰방이 병영으로 말을 달려가 대면하여 《동학농민군을》토벌할 수 있는 방법을 사유를 갖추어 요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병사(兵使)사또가 분부한 내용에, ‘비류가 병영문 가까이까지 닥쳤는데 방어하는 군사를 진영에서 풀어내기가 매우 어려우니 지금 이러한 사유를 가지고 초토영에 가서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토영에 가서 역시 답답함을 고하니 분부하는 내용에, ‘나주의 군대를 일으킬 계획이니 역시 이런 사유를 가지고 주력 부대로 가서 여쭈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찰방인 제가 이미 면대하여 여쭈었거니와 비류가 장흥성으로 침입하여 점거하고 부사를 핍박하니 그의 목숨이 조석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이》함부로 날뛰며 겁탈하고 노략질하여 역에 사는 백성들이 도망가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400여 호가 텅 비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장군의 군병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동학농민군을》토벌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답답하고 절박한 사정을 외람되이 보고하니 특별히 처분을 내려주셔서 경군 몇 100명을 출동하여 읍과 역의 놀라서 흩어진 백성들로 하여금 전처럼 안도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도착한 병마절도사의 공문 내용에, “비류 10,000여 명이 본 병영에서 30리 되는 장흥 등지에 모였다가 이달 초 4일에 벽사역을 불지르고, 초 5일 새벽에 장흥부를 함락시켰습니다. 부사를 잡아 심하게 때려 머리가 다쳤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할 수 없으며, 공형을 총살하고 가호를 불태워 없애고 남녀를 살해하여 흐르는 피가 도랑을 이루고, 부르짖고 통곡하는 소리와 달아나 숨는 모습이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좌측 연안에서 정탐을 한 자들에게 들으니 ‘각처의 비류 수만 명이 막 병영에서 40리 떨어진 장흥의 사창 시장에 진을 치고, 장흥을 함락한 무리와 합세하여 곧바로 본 병영을 도륙하겠다’라고 하는 흉악한 말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방어와 수비를 비록 엄히 단속한다고는 하지만 군병은 모두 민간의 장정이고 게다가 중과부적임을 생각하면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자나 깨나 노심초사하지만 방어할 재간이 없어 성을 잃는 환란이 조석으로 닥쳐있습니다”라고 하는바, 병영과 역에서 알리는 보고가 이렇게 급박하기 때문에 각 소대를 거느리고 진시 경에 나주를 향하여 출발하였으며 여산에서 군대를 위로하는 데 든 물품은 책자로 만들어 위에 올립니다.
군무아문의 제(題): 일의 상황을 계속하여 급히 보고하라. 1895년(乙未) 정월 초 4일에 발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