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 [同日]
서산군(瑞山郡) 공형의 공문 내용에, “비류의 거괴를 토벌하여 붙잡아 오라는 일로 사또의 공문 1통이 지난 달 29일에 발송하여 이달 초 10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래서 겸관 사또에게 고과(告課)하여 거행할 계획이며, 10월 초 1일 자시 쯤에 비류 수천 명이 갑자기 성에 들어와 동헌과 각 관아를 부쉈고 사또가 저들에게 해를 당하고 관인과 병부도 또한 빼앗겼습니다. 이방 송봉동(宋鳳動)이 곧 맞아 죽었고, 호적(戶籍)과 여러 가지의 공문서를 불태웠고 창고의 문을 부숴버리고 무기와 공곡과 공전을 빼앗아 갔습니다. 아전과 교졸의 집 살림을 부숴서 남은 것이 없고 돈과 곡식을 약탈하였습니다. 한 달을 읍 안에 모여서 사람들을 죽이면서 혹 다른 읍으로 흩어지기도 하고 혹은 본 읍에 모여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이달 초 1일에 홍주에서 흩어져 달아난 뒤에 다시 모이지 않았습니다. 초 7일 수백 명이 또 노지면(蘆旨面) 수현(秀峴)에 모였는데, 모인 수백 명을 다 죽이고 남은 무리들이 도망가서 지금은 모여 있는 곳이 없습니다. 읍 안의 사람들이 차례대로 돌아왔으나 저 무리들은 끝내 그만 둘 줄을 알지 못하니, 만약 우레 같은 위엄이 없었다면 옥석이 함께 타는 것을 구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별도로 통촉하여 실오라기 같은 여러 사람의 생명을 보호해야 합니다.
관인과 병부가 있는 곳을 특별히 자세히 탐문하여, 아전과 교졸과 마을 사람들이 마산면(馬山面) 사장리(沙場里)의 현 좌수 유선일(柳善日) 집에 가보니 도망가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집에 있는 한 여자를 엄하게 조사하여 심문하니, ‘관인과 병부를 유가(柳哥) 집의 후원에다 묻어 두었다’고 하여 그날 오시 쯤에 찾아와서 겸읍(兼邑)인 홍주진(洪州鎭)으로 싸서 보냈습니다. 위에서 말한 유선일은 도망가서 잡지 못하였고, 이른바 동도의 접사로 그곳 마을에 살고 있는 유학여(柳學汝)를 마을 사람들을 정하여 체포해 겸읍에 보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題): 변이 생긴 지가 한 달이나 지났는데 이제 처음으로 한번 고하니 가령 비요(匪擾) 때문이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주선하였기에 이런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주력부대가 한번 지나가고 상행(喪行)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그들 행패가 조금은 그칠 것이다. 이 뒤로 안정시킬 방도는 다만 그 지방의 책임에 달려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수령의 자리를 비워두게 되었어도 아직도 마땅한 방법이 없으니 그곳에 있는 여러 관속(官屬)과 각 마을의 장정들은 날짜를 정하여 모여서 각별히 규칙을 정해 편안히 살도록 하게하고 신관 사또가 부임해 오는 것을 기다리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