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同日]
선봉진이 보고합니다. 두 영의 군사가 이인·판치 두 곳을 돌려가며 지키고 있다는 것은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초 8일 미시 쯤에 판치에 유숙하고 있던 경리청 참령관 구상조가 말로 급히 전한 보고를 접하니, “당일 미시 쯤에 비도 몇 만 명이 혹은 정천점(定川店)에서 곧바로 올라오거나 혹은 노성현 뒷 봉우리에서 산으로 올라와서 에워싸는데 포성이 진동하고 깃발이 어지럽게 섞여서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전진하여 오는데, 이러한 병력으로는 당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때문에 편의에 따라 효포·웅치 등의 길이 좁고 험하고 높은 봉우리로 나가서 진을 치고 각별히 명령하여 지키고 망을 보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인에 출두하고 있는 서산군수 성하영이 입으로 전한 급한 보고가 차례로 도착하였는데 그 내용에, “비류 몇 만 명이 논산에서 직로로 고개를 넘어 왔고, 또 몇 만 명이 오실(梧室)의 산길을 따라 뒤를 끊고 포위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일본군 장교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출병하게 하고, 또 파견되어 진영에 머물고 있는 통위영 병사 2소대를 나누어 출동하여 지원하도록 보냈더니, 연이은 판치 진영에서 급히 보고하는 내용에, “효포·능치를 지킨 뒤로 비도들이 들과 산에 가득하여 비록 감히 곧바로 올라오지는 못하지만 여러 깃발을 두루 꽂아 놓아 기세가 매우 대단합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도 아직 별다른 소요를 일으키는 정황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인에 머물러 주둔하고 있는 진영의 보고를 연이어 접하니 그 내용에, “양쪽 길의 적병을 힘을 다해 섬멸하여 앞뒤의 양쪽 적들을 격퇴시키고 10리쯤 되는 우금치로 물러나 주둔하였는데 이때가 술시였습니다. 두 부대의 병사들과 치중대의 여러 물품들은 버리거나 손실이 없으며, 좌 2소대 병사 김명수가 왼쪽 팔에 탄환을 맞고 들것에 실려 왔습니다. 밤이 이미 깊어져서 다시 적의 형세를 정탐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형이 불편한 곳이 있고 또 병사들의 지원이 없어서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금치로 물러나 주둔하게 하였습니다.
서산군수 성하영·경리청 대관 윤영성·백락완은 소수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인에 파견되어 지원해야 하는 처지에서 앞뒤로 적을 받아서 몇 만 명의 비류를 죽이고 격퇴시켰습니다. 병사들을 독려하고 모든 군대가 물러가 주둔하고 있으니 만일 힘껏 힘을 내지 않았으면 이 승리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각지에서 방어하며 망을 보는 일은 각별히 더욱 독려하였습니다. 일본군 장교와 육군 보병 대위가 병사들을 친히 거느리고 우금치로 와서 모두 주둔하였습니다. 이튿날 초 9일 아침에 적의 형세를 자세히 탐색해 보니 각 진영이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에 여러 깃발을 어지럽게 꽂아 놓고 동쪽으로는 판치 뒷 봉우리로부터 서쪽으로는 봉황산(鳳凰山)의 뒷 기슭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30∼40리를 산 위에 진을 펼쳐 마치 사람들이 병풍을 친 것처럼 둘러 있는데 형세가 매우 창궐하여 고립무원의 염려가 없지 않았습니다. 금학·웅치·효포 건너 봉우리에 있는 비도가 10리 쯤 되는 곳에 서로 바라다 보이는 높은 봉우리에 죽 늘어서 머물고 때로는 고함을 지르고 때로는 포를 쏘아 항상 침범할 태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금학동을 지키는 통위영 대관 오창성, 교장 박상길, 웅치 양쪽에 지키고 있는 경리청 영관 홍운섭·구상조·조병완·이상덕, 참모관 이상덕·황승억, 별군관 유일환(兪一煥), 교장 김홍엽·이봉춘·이장혁·우기준, 효포의 봉수를 지키는 통위영 영관 장용진(張容鎭), 대관 신창희, 교장 김상운 등에게 각별히 지시하여 망을 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비류의 움직임은 종일 출몰하면서 침범하여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쳐 올라올 것 같았습니다. 한번 시험 삼아 포를 쏘아보니 몸을 피하며 이리 번쩍 저리 번쩍 하는데 만일 우리를 유인하려는 계책이 아니면 필시 자기편 군사를 응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을 단속하는 것이 섬멸하는 것보다 배는 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금치 서남 양쪽가의 적의 무리는 고함을 지르고 어지럽게 소란을 피우며 항상 침범할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먼저 군사를 주둔케 하였고, 서산군수 성하영, 경리청 대관 윤영성·백락완 등을 거느리고 일본 병사와 더불어 합세하여 나가서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사시 쯤부터 비로소 총을 쏘아 섬멸하였는데, 일본 병사가 앞의 봉우리 위에 진을 일렬로 벌리고 있다가 한꺼번에 포를 수십 차례 쏘아서 적을 많이 섬멸하자 감히 가까이 침범하지 못하였지만 아직도 적병은 많고 우리 군사는 적은 형세였습니다. 미시 쯤에 이르러서도 격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분격하고 병사들이 분개할 즈음에 참모관 전 도사 권종석(權鍾奭), 참모사(參謀士) 전 주서(前 注書) 이규백(李圭白), 유학 정도영 등이 병사들을 독려하여 용맹스럽게 나가게 하였습니다. 본 진영에서 임명된 별군관 출신 이달영(李達榮)·송흠국(宋欽國), 전 만호(前 萬戶) 이지효(李志孝), 전 감찰 이재화(李在華), 전 중군 이종진, 전 수문장(前 守門將) 유석용(柳錫用), 전 부장(前 副將) 박정환(朴晶煥), 사과(司果) 이흥교(李興敎), 본 진영으로 임명된 군관 전 오위장 황범수(黃凡秀), 유학 이주서(李周瑞), 사과 이선(李璿) 및 서산군수 성하영, 경리청 교장 김명환·정재원(鄭在元)·정인갑(鄭寅甲)·장대규 등이 명에 따라 먼저 올라가서 몸을 떨쳐 독려하여 포살이 연이어 졌는데 그 숫자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비류들을 추격하여 적의 무리가 주둔하고 있는 높은 봉우리를 탈취하여 차지하고, 군기와 대포 등의 물건과 잡기(雜旗) 60∼70개를 탈취하고 나서 일본군 장교 대위, 일본병사와 더불어 중로(中路)를 따라 남쪽으로 향하여 급히 추격하였습니다.
공주영장(公州營將) 이기동(李基東)은 충청감영의 수교(首校) 박준식(朴準植), 병교(兵校) 박춘직(朴春稙)·안재후(安在厚), 집사(執事) 김백현(金伯鉉)·양원길(梁元吉), 천총(千摠) 박순달(朴順達), 좌별장(左別將) 박춘명(朴春明), 우별장(右別將) 조광승(曺光承), 파총(把摠) 말시원(末始元), 장무(掌務) 군관 정평오(丁平吾)와 그 곳 감영의 병사들을 통솔하여 봉황산 뒷 기슭의 원봉(圓峰)을 방어하다가 몸을 떨쳐 군사를 이끌고 북쪽에서부터 길을 따라 오른쪽을 추격하였습니다.
경리청 대관 조병완·이상덕, 참모관 황승억 등은 웅치의 최고봉을 방어하고 있다가 백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지나가는 길의 왼쪽부터 돌격하여 힘을 합하여 섬멸하면서 10리쯤에 이르렀습니다. 경리대관 윤영성·백락완 등은 우금치 동쪽 최고봉을 지키고 있다가 연이어 먼저 올라온 몇 천명의 비류를 힘을 다해 막아내고 총을 쏘아 격퇴함에 다행히도 실수한 것이 없었습니다. 비록 비도를 사방으로 흩어지게 했으나 날이 이미 어두워져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진영으로 돌아와서 결국 완전하게 토벌하지는 못했습니다. 참모관 전 학관(前 學官) 이구영(李龜榮), 유학 이승욱(李承郁), 전 사과 신효식·이윤철, 별군관 전 부사 이필영, 전 오위장 김진옥(金振玉) 등은 탄환을 조달해 보내어 각 진이 조금도 궁핍하지 않게 하고, 병사들을 독려하여 방심하여 실수함이 없게 하였습니다.
공주감영은 서북쪽의 큰 도로에는 큰 강물이 가로 흐르고 산성이 험한데 위치하고 있으며, 동남쪽에는 산세는 높고 험하여 다만 세 갈래로 통하는 길이 있어 비록 성첩으로 방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믿을만한 보장(保障)이라고 일컫습니다.
아! 저 몇 만 명되는 비류의 무리가 40∼50리를 연이어 에워싸서 길이 있으면 빼앗고 높은 봉우리는 다투어 차지하여 동쪽에서 소리 지르다가 서쪽으로 달아나고 왼쪽에서 번쩍 하다가 오른쪽에서 튀어나오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죽을 각오로 먼저 산에 올라오니, 저들은 무슨 의리가 있는 것이며, 저들은 무슨 담력이 있습니까. 저들의 정적을 생각해 보면 뼈가 떨리고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이와 같은 병력으로 전후좌우로 대비하지 않은 바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힘을 쏟고 용기를 다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저들을 깨끗하게 토벌하지 못하여 비류가 아직 이와 같이 날뛰게 한 것은 지극히 애통합니다.
다행히 일본군 대위와 각 진영의 장졸과 종군(從軍)한 여러 관원 및 토병과 장정이 힘껏 마음을 합한 데 힘입어서, 비록 적의 형세가 조금 꺾이었지만 남아있는 무리가 아직 많으니 실로 형세를 예측하기 어려우므로 이전처럼 지키도록 명령하여 더욱 힘써 망보게 하였습니다. 이같이 고립무원한 병력으로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밖에서 먹고 자면서 6∼7일이나 되었고 큰 싸움을 겪은 뒤에도 연이어 밤에 노숙을 하니 지극히 안타깝고 절박합니다.
경리청 좌 2소대 장병인 남창오(南昌五), 중 2소대 장병인 김관일(金寬一)은 몸을 떨쳐 앞장서서 인도하다가 남창오가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고, 김관일은 오른쪽 다리에 총환을 맞았으나 다행히 죽음은 면했습니다. 그러므로 어제 탄환을 맞은 병사 김명수와 더불어 모두 치료하였습니다. 비류가 날뛰는 때에 성에 가득한 사람들이 부르짖으며 달아나고 거의 잠시도 목숨을 보전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보기에 참담하였습니다. 전투에서 이긴 뒤로는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들이 각각 빼앗은 기와 죽창을 가지고 기뻐하며 발을 구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각 부대와 각 아문에서 효유할 적에, 한편으로는 울부짖고 한편으로는 환호하며 웃으니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이 서로 밝게 부합된 것입니다.
앞서 말한 다친 두 명의 병사와 몸을 떨쳐 먼저 올라간 장졸·참모 군관은 비록 자신의 분수 안의 직분을 한 것이지만 격려하고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합당할 듯한데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빼앗은 무기는 다듬어 책으로 엮어 위로 올려 보내며, 탈취한 군수물자를 부대로 가지고 와서 바친 병사들은 마땅히 구별하여 각별히 갖추어 다듬어 보고합니다. 군관 전 오위장 황범수·사과 이선·유학 이주서 등은 우선 임금께 아뢰어 임명하여 격려하고 본받게 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뒤의 상황은 모두 차례로 급히 보고하겠습니다.
제(題): 임금께 아뢸 글이 도착하였거니와, 장관의 적개심과 사졸들이 목숨을 바치려는 일은 행군 이래로 최대의 승리이다. 지극히 가상하고 감탄스럽다. 마땅히 포상을 하여야 하지만 남아있는 적들이 아직 극성을 부리고 거괴를 잡지 못하였으니 지금은 앞을 향해 크게 힘을 쓸 때이다. 군사를 진군하여 적을 토벌하기를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되고 상황에 따라 각별히 도모하도록 하라. 다친 3명의 병사는 각별히 구호하고, 이후의 상황은 계속하여 급히 보고하라. 요청한 3군관은 다시 공을 세우는 것을 기다렸다가 포상하도록 하겠다. 16일 발송.
통위영 제(題)
장위영 제(題)
총어영 제(題)
경리청 제(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