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4일. 11일에 발송하여 14일에 도착. 수원에 있음 [同日 十一日出 十四日到付 在水原]
출정했다가 해임된 친군경리청(親軍經理廳) 부영관(副領官) 성하영(成夏永)이 보고하는 일입니다.
제가 안성군(安城郡)에 있을 때에 순무영의 전령(傳令)이 도착하였습니다. 곧 계원(繼援) 영관 구상조(具相祖)와 더불어 3개 소대를 거느리고 청주(淸州)로 달려간 사유는 이미 순무영에 보고하였습니다. 행군하여 청주에 도착하여 주둔하였더니 또 도착한 순무영의 회답 내용에, “죽산(竹山)에서 머뭇거리고 진군하지 않고 있어 응접(應接)하는 것이 오히려 더디게 되었으니, 어찌 이러한 군대의 법률이 있단 말인가? 지금 듣자하니 청주병영의 사정이 조금 완화되고 또 경영의 병사와 일본 군대가 도착하였다고 말하니 진천(鎭川)·목천(木川)의 《동학농민군을》소탕하는 것이 급선무가 된다. 이를 공문을 주고받아 거행할 것이며 주력 부대는 응접하기 위하여 지금 막 출발하였으니, 토벌하는 방법은 본래 선봉진에서 지시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약속한 날에 목천의 복구정(伏龜亭)으로 함께 전진하여 선봉진의 지시를 기다리겠다는 뜻으로 먼저 공문을 죽산부(竹山府)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영관은 지금 이미 해임되었고 신임 영관의 부임은 여러 날이 지났지만 아직도 오지 않고 있습니다. 군대를 거느리는 책임으로 따로 맡은 책무가 없는 장수로서 과연 마음대로 진퇴(進退)를 결정하기가 어렵기에 이런 사정을 보고합니다.
제(題): 이미 순무영에서 명령이 있어서 그 사이에 반드시 변통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응접하는 일은 다시 마땅히 지휘할 것이고 전쟁에 임하여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