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동학당정토략기(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대일본 육군보병소위 스즈키 담화 [大日本 陸軍步兵少尉 鈴木彰 講話]
소관(小官)은 작년 10월 충청도 방면의 동학당 토벌을 위해 출장의 조선병사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용산(龍山)을 출발하여 공주(公州) 및 청주(淸州) 부근에서 동도(東徒)와 싸운 뒤, 공주에서 체류 중 독립 제19대대(獨立第十九大隊)와 교대하고 귀대하라는 명령을 받고, 다음달 11월 26일 용산으로 돌아왔다. 남방의 정황에 대해서는 남방 토벌대장으로부터 이야기가 있을 것이지만, 소관은 이곳으로부터 북방, 즉 황해도 지방의 정황에 따라 그 경과의 대략을 보고하겠다.
충청도에서 귀대한 다음날, 즉 작년 11월 27일, 어은동(漁隱洞)에 있는 후쿠하라(福原) 병참감의 명령을 받았는데, “재령(載寧)부근의 비도(匪徒)가 요즈음 평산(平山) 부근에 나타났으니 속히 그들을 토벌하고 수괴를 체포하여 그를 이노우에 (井上馨) 공사에게 보내라”고 하였다. 소관은 명령을 받자마자, 바로 용산을 출발 개성부에 도착하여, 동도의 상황에 대해 얻어들은 것을 말하면, “2~3일전 적(賊)은 금천병참부(金川兵站部)에서 총수병참부(蔥莠兵站部)로 보낸 식량을 평산 부근에서 약탈당했다는 풍설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그날 밤 1시경 금천병참부에서 개성 병참사령관에게 급보로 전하기를, “동도가 평산에 급습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관사를 불태우며 약탈과 폭력이 극에 달하고, 금천 역시 위험하니 토벌대로 하여금 빨리 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날 밤 2시 바로 개성부로 급히 갈 때 야행인 동시에 도로가 험악하여 보행이 자유롭지 않은 불효점(拂曉漸)청석관(靑石關) 에 이르자, 재차 금천의 급보 소식을 전한 연락병을 만나니 말하기를, “급히 달려오라”기에 즉시 달려 나아갔다.
이처럼 급히 금천으로 달려가자, 평산의 적도(賊徒)가 이미 금천으로 향했기에, 금천 병참사령관은 병력 10명을 이끌고 마을의 빈곳을 방어하였고, 또 병참부는 이미 금고를 흙 속에 파묻어 어느 때 동도가 습격하여도 대비가 가능하도록 용의주도하게 기다렸는데, 그때 평산부사도 달아나 이 곳에 있었다. 소관은 서서 병사와 함께 설익은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급히 평산으로 가는 도중에 전신(電信) 인부로서 선혈이 낭자하고 칼을 찬 한 사람의 부상 인부를 호판(戶板)에 싣고 오기에, 그 까닭을 물어보자 말하기를 “오늘 새벽 우리 인부는 총수병참부 병력 십 수명과 함께 평산에 집합하는 동학당을 습격하여 이미 모두 물리쳤다”라고 했다. 이에 동도의 숫자와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도주했는지를 묻자 말하기를, “그 수는 대략 300~400명이고, 남서 즉 해주 방향으로 도주했다”고 했다.
그곳에서 평산에 이르자 관사는 모두 불타고 민가 역시 3~4채가 불타버렸고, 관사에 보관했던 우리 공병의 철선(鐵船) 및 전신기기도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보았다. 또 인민의 가재도구는 모두 파괴되었고, 게다가 집안 내에 많은 수의 큰 돌을 던져 관리를 비롯하여 인민 모두 도피하여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잠시 지나 두세명의 관리와 인민이 돌아오기에 적의 동정을 물어보니 말하기를,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지만 이곳을 습격했던 적은 평산 이남에서 온 자일 것이라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적을 추적하여 누천(漏川)에 이르자, 이미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토민(土民)이 말하기를, “평산에서 도망 온 적도들이 어제 밤 모두 이곳에 모였다가 갑자기 흩어져 도주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촌리(村吏)를 불러 적이 도망간 방향과 이 마을 안에 적도의 가옥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보자 그들이 말하기를 “하나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서 하나의 수차(水車)에 조 백수십 가마니가 저장된 것을 발견하고 그 소유자를 묻자, 말하기를 “이 마을의 쌀”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소관은 이 마을 안에 동도의 쌀이 약간 저장되어 있다고 평산에서 들었기 때문에 이 촌리의 대답을 의심했으나 그날 밤에는 일부러 방임했다.
다음 날 아침 출발할 때, 다시 촌리를 심문하자 마침내 자백하여 말하기를 “모두가 동도의 양식”이라고 하였다. 소관은 그 촌리가 동도의 소재를 알 것이라 여겼으나, 촌리가 고하지 않으므로 즉시 협박하여, “사실을 고하지 않는다면 너를 죽일 것이며, 네가 곧바로 말하면 불문에 부칠 것”이라 말하였다. 소관이 우선 칼을 한번 쳐서 상투를 잘라 내자 그는 크게 공포를 느끼고 애걸하며 말하기를 “내가 말한 것을 비밀로 해 달라. 여기서 1리 반쯤 떨어진 곳에 가지촌(加之村)이 있다. 그 마을은 모두 동도들이다”라고 말했다.
양식은 어떻게 해서든 병참부로 수송하려고 생각했으나 도로가 멀고 운반이 곤란하기 때문에 끝내 그 뜻을 이룰 수 없어서 불을 놓아 불태워버렸다. 그러니 수차장(水車場) 주인이 거듭 감사하며 말하기를, “동도가 날을 정하여 이것을 빻도록 하였는데,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수족이 끊겨 나갔거나, 듣는다 해도 노임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귀군이 이것을 다 불살랐으니, 저의 몹시 어려운 일을 없애주어 후일 화가 될까 하는 근심이 사라졌으니 매우 기쁩니다”라고 말했다.
촌민을 선도에 세우고 가지촌을 포위하여 수색하니, 한 사람의 남자도 보이지 않고 부녀자와 노인만이 겨우 남아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여자를 붙잡아서 무슨 까닭에 남자가 없는가를 묻자 말하기를, “오늘 아침 성인은 모두 온정(溫井)에 모이라는 격문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온정으로 갔다”고 하였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촌내의 큰 집 두서넛을 수색하였으나 한 사람의 동도도 없었고 겨우 3~4가마니의 떡과 여러 명이 식사할 수 있는 식기를 넣은 가마니만 발견하였을 뿐이다. 떡은 우리 군사가 구워서 다 먹었는데, 이것도 역시 적도의 식량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곳에서 전진하여 온정에 이르렀으나 한 사람의 동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촌민에게 그 이유를 질문하자 말하기를 “일찍이 온 적이 없다”고 하였다. 마침 해주 감사가 과거 동도에게 부상을 당해 그 아들 정헌시(鄭憲時)라는 자가 경성에서 간호를 위해 해주에 가겠다며 소관의 뒤를 쫓아오므로 해주로 먼저 떠나게 하여 적의 유무를 보고할 것을 약속하였다. 다음 날 그로부터 해주에 적이 없다는 보고가 와서 우리 소대는 각 마을을 정찰하면서 12월 6일 해주로 들어갔다.
해주는 황해도 감사(監司)가 있는 곳으로 호수가 3천정도 되는 도회지이다. 그러나 이전에 동도가 이미 난입하여 약탈하였기에, 우리 소대가 들어갈 때 민가를 살피니, 모두 다 비어있을 뿐만 아니라 관사 같은 곳은 문짝 하나도 파괴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감사는 협소한 민가에 거주하고, 인민은 물론 관리도 도주하여 그 적막함은 실로 해주에 사람이 없다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관리로서 성내에 남아 있는 사람은 감사, 중군(中軍), 판관(判官)과 그 밑에 있는 관료 7~8명에 불과했다.
소관은 먼저 감사를 만나 동도의 동정을 물으려했으나, 감사의 나이가 70~80세로 눈을 볼 수 없고 귀로는 들을 수 없으며 입술이 떨려 말을 할 수 없기에, 소관은 처음에는 감사의 아버지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바로 감사라는 것을 듣고 매우 놀랐다. 그 판관도 역시 70~80세의 노인으로 감사와 같으며 중군도 역시 노인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도와주며 사무를 맡아보고 있는, 이름이 이민조(李敏祚)라는 자에게 가서 동도의 동정을 묻자 대답하여 말하기를, “해주 부근의 인민은 모두 동학당”이라고 하였다. 다시 이들이 집합하여 있는 곳을 묻자 말하기를, “남쪽으로는 녹산(綠山)의 송림(松林) 끝에서부터 강령현(康翎縣), 서쪽으로 옹진(瓮津), 장연(長淵), 죽산(竹山) 등지에서 북쪽으로 송화(松禾), 신천(信川), 문화(文化) 등지에서 발호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또 말하기를 “그들이 나타나면 인민을 살해하고 돈과 곡식을 빼앗고 가옥을 불태우며 난폭함이 극심하여 도저히 조선의 병력으로 진압할 수 없으니, 바라건대 남아서 진무시켜주십시오”라고 했다.
처음에 소관은 용산에서 그것을 듣건대 황해도의 적은 오직 재령에만 있다는 것이었으나, 이번에 그곳에 이르러 상황을 듣고는 실로 놀랐다. 바로 황해도의 3분의 2는 모두 동도로 채워지고 있으니, 어떻게 오합지졸로 그것도 겨우 40~50명의 적은 병사로, 병참감의 명령대로 신속히 그들을 평정할 수 있으며, 더구나 그 수괴를 체포하여 공사(公使)에게 보내는 것은 도저히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소관은 지금의 책략으로 먼저 한쪽 방향에서 파괴 유린하여 적의 세력을 좌절시킨 후, 수괴를 체포함과 동시에 중요한 문서도 획득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강령현 현감이 해주감사에 급한 사환을 보내 말하기를, “동비 수백 명이 다음 날을 기약하여 이 읍을 습격할 것이라고 하니 속히 와서 도와달라”고 했다. 소관은 그 보고를 받자마자 바로 강령 쪽으로 출발토록 했다. 원래 동비는 그 잔학하고 사나운 것과 달리 일본병사를 보면 바로 도망가 숨으므로 불의의 타격을 주고자 하여 야행하였다. 새벽에 강령에 도착하여 먼저 이 지방 사람을 보내 적의 상황을 정찰시켰는데 돌아와 보고하여 말하기를 “이곳에서 남으로 반 리(里) 떨어진 고현장(古縣場)에 수백의 동비가 집합하여 종을 울리고 큰 북을 치며 깃발을 세우고 있으니, 장차 강령을 향해 갈 것 같다”라고 하였다.
바로 병력을 나누어 하나는 정면에서 다른 하나는 측면에서 나아가 격전을 치른 지 한 시간 만에 마침내 그들을 격파하였고, 적은 세 방향으로 나뉘어 도주하였다. 강령의 양민은 그 동도와 구별하기 위해 현감의 날인된 종이조각을 모자에 부착시켰다. 모여든 적 가운데 길을 잃은 자 수명이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우리의 병사가 추격하여 체포하니, 모두 모자에 종이가 붙어있으나 그 관인(官印)은 색이 달랐다. 매섭게 추궁하니, 그들은 결국 일시의 궁여지책으로 나왔음을 자백하였다. 여전히 가슴 속에 수십의 가짜 관인을 찍은 종이조각을 갖고 있으므로 사로잡아 해주로 보내 참수하였다.
또한, 앞서 말한 송림과 녹산 방면의 동비 수천인이 그 부근에 집합하여 재차 해주를 습격하려고 한다고 감사로부터 급보가 옴에 따라, 소관은 강령에서 옹진, 장연 등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이 급보를 접하고 바로 해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인민이 소관을 둘러싸며 애걸하기를 “귀 군사의 일부가 가버리면 동도가 다시 습격할 것이니, 바라건대 병력을 나누어서 이곳에 남겨두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통솔하는 병사 겨우 40~50명 만으로는 그 요청을 따를 수 없다고 위로하여 말하고, 바로 해주로 출발하였다. 우리 부대가 장차 가버릴 것이라고 하자, 인민은 동도의 집에 불을 질러 4~5채를 불태웠다. 그리고 현감을 비롯한 소리(小吏), 인민 등이 모두 출발하여 우리 부대와 함께 해주로 왔다.
그 후 우리 부대가 해주에 있을 때, 그 지역의 인민이 글을 써가지고 와서 애걸하여 말하기를 “관아는 동도에 의해 파괴되고 몇 명의 인민도 역시 살해되었으니, 바라건대 도와 달라”라고 했다. 그러나 해주가 위험하기 때문에 끝내 다시 가서 그곳을 원조하지 않았다. 강령현은 겨우 2~3명을 제외하고 모두 동도에 반대하였는데, 소관이 고현장(古縣場)을 공격토록 할 때, 남자는 각각 칼과 창을 휴대하고 우리 부대의 말미에 와서 있는 힘을 다하였다. 관아를 파괴하고 많은 인민을 살해하였으니, 이는 대개 복수를 당한 것이다.
해주로 돌아와 한인(韓人)들로 하여금 적의 상황을 살피도록 하니, 돌아와 보고하여 말하기를 “송림과 녹산의 동도 천여 명이 취야장(翠野場)에 모인 뒤 계속해서 그 근방의 동지를 규합하여 그날로 해주를 습격하고자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동도는 일본 병사의 모습을 목도하면 바로 도주하니, 이번에도 불시에 토벌하려고 새벽 3시에 해주를 출발하여 오전 6시 취야장 부근에 도착하였다. 그때 적의 초병이 먼저 알고 발포하였다. 우리는 즉시 부대 일부를 적의 측면으로 우회시키고 다른 일부 병사와 한국 병사 약간은 정면으로 나아가 격전을 치르니, 대략 2시간이 지나자 적의 병력이 궤멸되어 도주했다.
마을 내의 모든 집은 적이 기거하는 집이 되고, 또 천여 명의 취사를 명령을 받아 모두 그 부담으로 곤란하게 되었다. 소관 등이 마을 안으로 들어오자, 촌민 최약(崔躍)은 기뻐하며 와서 술과 안주를 내어 크게 노고를 위로하였다. 동도 집합지의 인민은 모두 이처럼 양식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갑자기 살해되거나 또는 집이 방화되니 하니 양민의 고통을 진실로 생각해야 된다.
이 싸움에서 적 십수명을 죽이고 수 명을 포획하고 또 서류를 획득하였다. 여기에 있는 것은 충청도 감사와 황해도 감사에게 동도의 수괴가 보내온 서류를 베낀 것이다. 황해도의 것은 새로 온 감사의 훈시를 받은 후에 보낸 것이고, 계속해서 충청도 동도의 격문 및 황해도 수괴의 편지도 일람하도록 제공하였다. 이 두 통은 따로 따로 획득한 것이다. ≪이때 소위는 여러 통의 문서 사본을 총리대신 등에게 보임. 서류의 사본은 권말에 첨부했다≫그 외 2~3통은 이노우에 공사와 후쿠하라 병참감에게 제출하였다.
취야장에 최윤학(崔潤鶴)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우리 부대가 강령을 왕복할 때 그의 집에서 음식을 끓여 식사를 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그 자는 일본병사에게 취사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결국 동도에게 살해되었고, 가산은 모두 빼앗겨 유족은 나중에 해주에 와서 대단히 힘들게 생활하였다. 그 모습에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서 우리 장교와 사병들은 전날의 의리를 갚기 위해 약간의 금액을 갹출하여 유족으로 하여금 주점을 개업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가련한 인민은 아직도 많이 있다고 생각된다.
취야장에서 획득한 적들의 편지에 따르면, 평산, 배천(白川), 연안 등지로 적도들이 집합하고 있었고, 또 해주를 동서에서 협공하려는 것 같았다. 또 이때 개성 병참부로부터도 배천, 연안 부근에 적도가 집합한다는 보고가 있었으므로 배천 부근에 집합하는 것을 점차 분명히 알았다. 병참부의 위험을 생각하여 곧 연안을 향해 가서 도착했으나, 이미 연안부사 이하계(李夏啓)가 배천 연안 부근의 동도를 설득하여 해산시킨 후였다.
그때 후쿠하라 병참감이 명령하기를 해주로 돌아가 적의 상황을 정찰하라고 말했다. 바로 급히 다시 해주로 가는 도중에 해주에서 6리 떨어진 청단(靑丹)에서 감사의 급보를 접하였는데, 말하기를 “동도 수 천명이 4~5리 떨어진 곳에서 습격했으니, 빨리 와서 구원해 달라”고 했다. 즉시 급히 가서 해주에 이르니 해주성의 교외 멀리서 이미 총성이 들리고 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에 대해 소관은 동도가 우리 부대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해주를 함락시키려고 습격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급히 해주성에 들어가니, 인민 가운데는 이미 물건을 지고 난리를 피하려고 하는 자가 있었고, 혹은 칼·창·총기를 휴대하고 사방으로 도망하는 자가 있었고, 혹은 부녀가 낭패하여 흐느끼는 자들이 있었다. 그 혼란한 모습은 말로 이루 다할 수 없었다.
소관이 성문에 올라갈 때, 남쪽과 서쪽의 산꼭대기에는 이미 동도가 모여있어 새하얀 모습을 이루고 있었고 그 수는 적어도 6,000~7,000명 정도였다. 남문 가까이에 온 적병 300여 명이 근방의 소나무 숲에 은밀히 모여 있기에 포격을 하여도 서쪽의 적은 단지 깃발만 흔들 뿐이고 재차 포격하지 않음에 따라 총포가 없음을 알았다. 40명의 병력을 둘로 나누어, 20명은 성에 남아 남문의 적을 맡게 하였고, 나머지 20명을 이끌고 성 밖으로 갑자기 나아가서 2~3회의 사격을 가하자, 갑자기 도주를 시작하여 마침내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거기서부터 남문의 적을 향해 그 전면과 측면에서 십자형으로 사격하여 몇 명을 쓰러뜨렸으나 여전히 퇴각하지 않았다. 저들이 더욱 왕성해져 계속 발포하였기 때문에 탄환이 거의 떨어지게 되어 매우 위험하게 되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사격을 멈추고 두 방향에서 돌진하였다.
그러자 이 형세에 두려움을 느끼고 마침내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거의 1리 반 정도를 추격했지만, 그들은 3~4방면으로 나뉘어 신속히 도주하여 결국 그 방향을 놓쳤다. 전투개시부터 종결에 이르기까지 대략 5시간을 허비하였다. 이처럼 강경하게 저항하는 동도는 많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저들의 총기는 대개 화승총이지만 그들은 많고 우리는 적고 휴대한 탄약도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분열되어 고전하였다.
그 후 들은 바에 의하면, 그 날 적은 무려 30,000명이 넘었고, 재령, 신천, 문화, 장연, 옹진, 강령 등의 적도가 모두 왔다고 한다. 즉 성문 밖까지 접근한 자가 6,000~7,000명, 또 1리 밖에 있는 자가 10,000명, 3리 밖에 떨어져 있는 취야장에 13,000~14,000명이 있었다. 그 총수를 합하면 무려 30,000명으로 실로 그들이 전력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
소관이 해주로 돌아오자 인민이 기뻐하며 좋아하고 인민의 총대표가 와서 감사해 하며 말하기를 “오늘 귀관이 없었다면 동도는 성내로 침입하여 민가는 물론 관사도 불살라지고 가산은 약탈되었을 것이다. 감사를 비롯하여 인민도 반드시 그들의 독수(毒手)에 걸려 비참한 상황에 빠졌을 것인데, 다행히 그 재해를 면하게 되어 귀관 등에게 감사한다”라고 하며 대단히 기뻐하며 소관의 송덕비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이 전투가 시작될 당초, 동도는 성 밖 민가를 불태우고 노략질하였는데, 우리 부대가 그것을 격파하고 추격하였다. 그러자 인민은 또 동도의 집에 불을 놓아 복수하였기 때문에 해주성 밖 1~2리 사이의 인가는 모두 화재로 몽땅 타버렸으니, 실로 참상이 극에 달하였다. 이처럼 동도가 양민의 집을 불사르면 양민도 역시 동도의 집을 방화하여 서로 복수로 치달아 거의 방화를 어린아이 장난처럼 생각하였다.
작년 충청도에 갈 때에도 경성 및 지방의 한인 병사가 누차 방화하여 소관은 매우 경계한 적이 있었다. 어느 정도의 군기가 있는 관병으로 하여금 약탈방화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지만 그 지휘관인 자가 묵과하며 재차 이를 제재하는 일이 없어서, 인민이 이들을 칭하여 제2의 동학당이라고 불러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하물며 지방의 이른바 의용병(義勇兵)인 자는 동도 토벌을 명분삼아 약탈을 자행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일전으로 적의 세력이 크게 줄어든 것 같지만, 그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본디 추측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부하 병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겨우 소수이므로, 도주道主, 감사가 교묘한 수괴들을 추격 체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휴대한 탄약도 거의 소모되고 남아 있는 것이 평균적으로 겨우 12~13발에 불과하여 할 수 없이 보급과 증병을 병참감에게 요구하였다.
마침 이 싸움 후 4~5일이 지나 신임감사 조희일(趙熙一)이 평안도에서 와서 전 감사 정씨와 교대했다. 조씨는 부임 도중 재령 부근에서 동도 때문에 억류되었고, 백방으로 설득해도 풀어주지 않자, “감사의 사무인계가 목전에 있다”고 협박하면서 점차 설득하고 속여서 달아나 왔다고 한다. 그때 감사에게 딸려 온 마부 2명은 일본 은화를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도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신임 감사와 동도 진압을 위해 종종 상담하였으며, 그가 말하기를 “나는 새로 부임하여 동도와 은원(恩怨)이 없어 혹여 내가 설득하면 복종할지 모르니, 바라건대 한번 설득을 시도하려 한다. 그래도 그들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즉시 청하여 귀군의 토벌에 일임하겠다”라고 말했다.
그 때 경성에서 초무사(招撫使) 및 소모관(召募官)도 와 있었으므로 소관은 그 의견을 받아들였고, 감사는 바로 여러 곳으로 설유사(說諭使)를 보냈다. 또한 소모관 등도 직접 갔기 때문에 점점 좋은 결과를 보고하게 되었다. 종래 해주에 한국 병사가 30~40명이 있었으나, 이때 감사와 협의하여 병력을 증가하여 거의 300명이 되었고, 그 복장도 대체로 일정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들을 훈련시키고 통솔하는 자가 부족한 것은 소관이 가장 유감으로 여기는 바였다. 그때부터 4~5일을 지나 즉 금년 1월 2일 나카야마(中山) 중대장이 왔다. ≪이 경과는 이후 중대장으로부터 들어야 할 것이다≫
그 후 소관은 장연부(長淵府) 방면으로 향하였다. 그 이유는 어은동의 병참감으로부터 “그곳에 동도 3,000~4,000명이 있으니 속히 가서 그들을 토벌하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출정은 봉산 병참부로부터 우리 병력의 한 부대가 장연 북방에서 오고, 소관은 부하와 해주의 한인 병사 30명을 인솔해 남방에서 오게 해서 협공하려는 목적으로서 장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적을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는데, 마침 그 때 부사가 왔다. 내가 온 이유를 묻자, 그 까닭에 대해 답하여 말하기를 “당부(當府), 장연부에 모여 있는 자는 모두 의용병(義勇兵)으로 결코 동학당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의용병은 우리 부대가 도착하는 전날에 도망가서 숨어 하나도 남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묻자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과거 일찍이 동학당이었지만 신임 감사의 설득에 따라 그 잘못을 깨닫고 지금은 장연의 의용병이 되었고 동학에서 이름을 거짓으로 빌려 썼다. 동학당을 토벌하려고 모여 있었지만, 귀 부대가 왔다는 것을 듣고 만약 동도로 오인되어 살육된다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모두 도주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소관은 “과연 마음을 돌려 진실로 의용병이라면 속히 불러 모아야 한다”고 하니, 날을 약속한 뒤 봉산에서 왔고, 군조(軍曹)와 병졸을 남겨두었다. 과연 부사가 이를 실행하는지 아닌지를 보도록 하고, 소관은 신천을 향해 출발하였다. 다음날에 이르러 백여 명이 와서 집합하였다고 한다.
이 부사는 신임자로 아직 지방의 정황도 정통하지 않았다. 우연히 전 부사가 여전히 이곳에 체재하고 있어서 동도의 정황을 들으니, 그가 말하기를 “작년 10월 동도가 처음 난입하여 관사에 와서 무기를 탈취하고 양민의 가산을 약탈 난폭함이 극에 달해 도저히 우리들이 설득할 수 없었고, 또 위해를 가하려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감사에게 보고하려고 해도, 그들은 항상 내 주위에 있으면서 그것을 방해하여 사자(使者)를 보내면 길에서 억류하였으니, 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동도가 봉기한 지방의 관리는 모두 이런 종류이다. 만약 강하게 동도에게 저항한다면 관리는 머리가 잘리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가옥은 불살려지고 양민은 살해되고 말았다. 적도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고 이들의 모습은 과거 무정부와 같은 상황이었다.
이곳에 동도의 화약제작소가 있는데, 큰 가마 3~4개를 갖추고 회즙취착소(灰汁取搾所)를 설치하였지만 추위가 심했기 때문에 회즙을 얻을 수 없었다. 제조도 중지되어서 단지 몇 가마니의 목탄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것들은 바로 파괴하여 불을 질러 태워 없앴다. 그곳에 있었던 구식 조선대포 몇 문과 포탄 약간을 보고 판단하건데, 어느 지방의 관사에도 반드시 총기 탄약이 있으며 그들의 총기 탄약은 그 이전에는 모르지만, 지금은 적을 방어하는 무기가 아니라 오히려 적에게 공급되는 무기가 되었다. 바로 관아가 적의 무기 공급소라고 해도 될 것이다.
여기에서 송화 온정에 이르는 곳에 도창(刀槍) 제작소가 있고, 그 근방 눈 속에서 조선에서 진귀하고 뛰어난 창 30~40자루를 얻었다. 창은 해주로 보내고 제작소는 파괴하였다. 거기서부터 재령 지방에 있는 본대와 합류할 목적으로 신천을 향해 갔다. 그곳에는 의용병이 있었는데, 그 수는 200~300명이었다. 또 신천의 남쪽으로 약 3리 떨어진 어떤 읍에 안태운(安泰運)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의용병을 모집하여 스스로 의병부대 대장이 되어, 그들을 통솔하여 산속에서 농성하면서 누차 동도와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지만 그 안태운이라는 사람은 단지 자기 읍을 지키기만 하였고, 다른 지방의 적을 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아울러 안태운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부사, 군수, 현감 등이 모두 이처럼 1군 1읍의 안전만을 도모해왔다. 소관은 글을 써서 안태운에게 보내어 한번 만날 예정이었지만, 그가 병이 있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부호이면서 또한 명성이 자못 높은 인물이었다. 일찍이 전 감사 정씨가 재직할 때 수양산성(首陽山城)의 별장(別將)을 했던 자에게 부탁하였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신천에 이르러 군수 모씨와 면회하여 적의 상황을 묻자, 군수는 다른 사람이 듣는 것을 꺼려 적의 수괴와 그들이 거주하는 곳을 글로 써서 말하기를 “이 일이 누설되면 안된다. 이 글을 잃어버려 다른 사람이 주워서도 안된다”고 했다. 이것은 대개 훗날 해를 당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동도를 두려워하는 것이 이와 같다. 이곳에서 수비지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바로 그곳으로 군사를 돌렸다.
먼저 소관이 경과한 대략은 위와 같다. 소관이 황해도에 있는 기간은 대략 3개월로 해주성 같은 곳은 처음 매우 적막했던 것과는 달리 인민들은 거의 귀가하여 각각 생업에 종사하고 아침에 여는 시장의 경우는 실로 시끌벅적한 모습이 되었다. 소관이 해주성을 떠나는 날, 한국 병사와 인민은 멀리 성 밖까지 와서 송별하였다. 어떤 한인 부대장의 경우는 석별의 정으로 슬피 울었다. 그들이 얼마나 동도를 두려워하는지, 얼마나 소관들을 큰 힘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그 일단을 엿보기에 족했다. 모든 한인 병사에 대하여 의용봉공(義勇奉公)과 부국강병(富國强兵)에 관한 간단한 연설을 하니 크게 감격해 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과연 진실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해주에 체류 중 감사의 요청에 따라 한국 병사에게 간단한 조련 및 전투법을 교육하거나 혹은 소학교를 설치하여 아동을 교육할 것 등을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쨌든 소관은 동도 토벌의 명령을 받았고 또한 짧은 일수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유감스럽게도 그 청에 응할 수 없었다. 지방의 한인 병사는 온순하게 명령에 복종하였고, 용기에 있어서도 경성의 병사보다 나은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전투할 때, 민가에 난입하여 재산을 약탈하는 점은 차이가 없었다. 이들은 군인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군기와 규율이 없었고, 그들의 가슴 속에는 군주도 국가도 없었다. 단지 급료 때문에 병사가 된 자가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앞으로 교육을 잘 시킨다면 선량한 병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출군 당초부터 지방관 가운데 “동학당에 가담하는 자가 자못 많다”는 풍설을 누차 들었으나, 실제로 보면 고등 관리로 적도에 가담한 자는 거의 없었다. 단지 소리들이 처지에 따라서 적도와 통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풍설이 생겨나는 이유는 오로지 서로 의심하거나, 혹은 그 거동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여 추측하는 말을 하거나, 혹은 그 부하로서 도망간 소리(小吏)들이 동도에 가담한 것을 가지고 그 상관도 모두가 동도가 되었다는 풍설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동도의 거동을 들추어내거나 혹은 방해할 경우 후환이 두렵기 때문에 각 군현의 관리는 모두 자기 관할 내의 동비에 관해서는 알고 있어도 비밀로 하고, 오직 다른 관내만을 적발하여 결국 서로 다른 이를, 동도가 되었다는 풍설을 받게 했던 것 같다.
황해도에서 봉기한 동학당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지금 소관이 목격한 바를 생각하여 말하겠다. 황해도의 동학당은 다음의 3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제1종 진정동학당(眞正東學黨)
제2종 일시적동학당(一時的東學黨)
제3종 위동학당(僞東學黨)
제1종의 동학당은 동학이라는 일파의 종교를 신봉하는 무리로서 경전을 암송하고 그 가르침을 신봉하면 온갖 병도 모두 나을 수 있고 재물도 모이고 온갖 재앙이 사라지고 수명도 연장된다고 믿는 무리로 바로 진정한 동학당이다.
제2종의 동학당은 동학의 가르침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위협을 당하거나 기타의 이유로 그 생명 재산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여기에 가담한 자이다.
제3종에 속한 비도 즉 위동학당은 그 종류가 자못 많다. 지금 중요한 것을 들면, 지나인을 제외하고 모든 외국인을 혐오하는 무리, 강도·절도 기타의 범죄자·무직자로서 생계를 찾으려는 무리, 지방관에 원한이 있는 무리, 당오전 1문의 손실에도 분노하는 무리, 사금채집 광부 등이다.
그 대부분은 모두 사금채집 광부이다. 소관이 신천, 장연, 송화 등에서 실제 조사한 바이다. 그리고 이처럼 다수의 사금 광부가 무엇 때문에 변하여 동비가 되었는가를 살펴보니, 작년에 채집을 금지했기 때문에 갑자기 호구지책을 잃어버려 바로 적도가 되어 협박해 빼앗는 것을 일삼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 이 사금광부 같은 자는 대부분 집도 없고 처도 없고 따라서 애들도 없으며 오직 매일의 노동으로 자신의 몸을 유지하는 자라고 한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채집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호구지책을 찾을 수 없어서 도당(徒黨)과 결합하여 스스로 동학당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사금 채집의 일에 대해서는 대군주폐하께 아뢸 때, 폐하께서도 크게 고민스러운 모습으로 종종 하문하셨다. 이 채집을 금지한 이유를 들으니, “채집자는 마치 쥐새끼처럼 논밭 도로 교량을 가리지 않고 땅을 파서 그 황량한 모습을 그대로 방치하고 돌보지 않으므로 농민과 기타의 이유로 손해가 적지 않기 때문에 금지했다”고 한다.
총리대신이 논밭에 피해를 주지 않는 채집은 지장이 없다고 훈령을 내리고 황해도 감사가 말하기를, “채집 방법이 일정하여 다른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채집을 허가할 것을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다.
황해도에 봉기가 일어나고 동학당이 발발한 원인은 앞서 이와 같은 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동학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자, 즉 진정한 동학당은 겨우 몇몇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평하는 무리와 먹고살기 힘든 궁박한 백성뿐이라고 믿는다.
위(僞)동학당 수괴로서 중요한 인물은 다음 4명이지만, 그들은 출몰이 마음대로여서 결국 사로잡을 수 없었다.
임종현(林鐘賢), 김명선(金明善)
원용일(元容一), 김영하(金榮河)
이 4명은 가장 흉악한 무리로 그 중 임종현은 스스로 해주를 함락시켜 감사의 위치에 오르고 기타의 흉악한 무리를 각 부군현(府郡縣)의 수장으로 삼으려고 이미 부사와 군수로 할 인물을 선정하였다고 한다. 또 김명선과 같은 자는 해주의 수대산(水大山)에 108명의 흉악한 무리를 모아, 옛 양산박(梁山泊)이라고 자임하고, 원근에서 약탈을 일삼았다고 한다.
명치(明治), 28년 3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