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2월 [甲午十二月]
초 1일 오후에 감사가 감영에 도착하여 본부(本府) 동헌(東軒)에서 교구 교대의식을 행하였다. 초 2일에 길을 떠나 중간에 강령의 수령 유관수(柳灌水)의 편지를 보니 노옥(鷺玉)일체를 찾아 보냈다고 하였다. ≪거기에 강령읍민의 가옥이 불타버렸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행차가 고양(高陽)에 도착하자 홀연히 적(賊)의 우두머리 성재식(成載植)을 만나 노비로 하여금 잡아 묶게 하였고 해당 군의 교졸(校卒)을 빌려 순무영에 압송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재식의 주머니에서 옥로(玉鷺)를 찾아내어 보내며 경영(京營), 순무영에서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도내의 10여개의 읍과 5개의 진보(鎭堡)와 수영(水營)은 모두 적변(賊變)을 만났으며, 정부의 초기(草記)에는 지은 죄를 지고 업무를 거행하라고 하였지만 도내의 모든 유생들이 서울로 와서 간절히 유임해 줄 것을 원하여 3차례에 걸쳐 소장을 올렸으나 그대로 기각하였다.
신천의 안태훈과 노제석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소탕하였다. 그러니 상을 논의하는데 합당하여 격려하고 장려하는 뜻으로 임금에게 아뢰었으나 정부에서 처음부터 답변이 없어 역시 다시 아뢸 수가 없었다. 도내의 의병을 일으키려는 많은 자들이 모두 보고 해체하려고 하였다. 서울로 돌아간 후에 해영(海營)의 소식을 들으니 “일본병사 100여명이 더 와서 감영에 더 주둔하였고 포병의 숫자도 더해져서 적당(賊黨)이 흩어져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