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1월 일 순사에게 첩보하는 글 [甲午十一月日 牒巡使]
첩보한 일입니다. 본부의 봉평과 내면 등지의 동비를 토벌하는 일은 포수대장 강위서와 양양의 유생 이석범이 분의군병 50명을 인솔하여 힘을 합쳐 그들을 보낸 연유를 이미 첩보하였고, 본 관아의 유생 박동의를 종사관으로 차출하여 보냈습니다. 이 달 14일에 박동의와 이석범의 수본에 의하면, “지금 12일에 내면 원당리에 행군하니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개 읍의 동비를 접주 차기석이 무리를 인솔하여 깃발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기세가 매우 대단하였기 때문에 양양과 강릉의 2개 진영이 길을 나누어 협공하여 차기석을 사로잡았고, 다시 이른바 성찰 오덕현·집강 박석원·지덕화 등 3명을 문초(問招)하니, ‘내면의 창고와 김학서(金學瑞) 등 14명의 집을 방화할 때에 함께 모의하여 흉악한 짓을 했다’고 하여 한꺼번에 쏘아 죽였으며, 나머지 무리 19명은 어리석은 기질로 차기석의 협박에 빠졌고 이와 같은 실상이 가련하였기 때문에 개고기를 나누어 먹게 한 뒤에 잘 타일러서 귀화시켰다”라고 하였습니다.
16일에 수본에 의하면, “13일에 청두리에 나아가 홍천의 비도 중에 흉악한 자인 권성오와 권수청(權守淸) 등 13명을 잡아서 바로 쏘아 죽였습니다. 14일에는 약수포(藥水包)로 방향을 바꿔 잔도(棧道) 70리 길을 벽(壁)을 의지하면서 나아갔다. 이석범의 부종인 김익제는 병정을 이끌고 응봉령으로 곧장 나아갔고, 이석범의 동생인 국범은 병사를 인솔하여 신배령으로 바로 나아가 길 3곳에서 크게 협공을 하여 접주 김치실 등 11명을 잡아 바로 쏘아 죽였다. 접사 박학조는 사로잡았고, 그 밖에 사로잡은 손응선과 김성화(金成化) 등 40여 명은 잘 타일러서 귀화시켰으며 세 곳의 별당(別堂)은 바로 태워버렸다. 비도의 집 37채가 험준한 곳에 있어 만약 그대로 둔다면 흩어진 비도가 다시 거처하여 소굴이 될 수가 있기 때문에 바로 태워버렸고, 화철총(火鐵銃) 3자루와 철창(鐵鎗) 9자루를 획득하여 왔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날에 도착하여 받은 강위서의 수본에 의하면, “홍천의 유생 허경이 의병 60여 명을 이끌고 자운동(自雲洞)에 와서 힘을 합쳐 비도를 토벌하여 접주 위승국형제·접사 심성숙·박군오(朴君五)·정창호 등 17명을 쏘아 죽인 뒤에 홍천의병이 그대로 물러났다”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도착하여 받은 강위서의 수본에 의하면, “차례대로 3리·흥정·신흥동(新興洞) 등지에 나아가 비도인 임정호 등 38명을 쏘아 죽였고 나머지 무리 100여명은 잘 타일러서 귀화시켰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선읍의 비도를 토벌할 때에 이 달 6일에 본 관아 중군 출신 이진석과 출신 조철승(曺轍承)이 군정을 이끌고 가서 바로 정선군 여량으로 들어가 비도와 접전을 하여 10여 명을 쏘아 죽였고 이중집 등 5명을 사로잡아 결박하여 보냈습니다. 비도의 빈집 70여 호는 흩어진 비도가 돌아와서 거처하여 소굴이 될 것을 염려하여 바로 불태웠습니다. 방향을 바꿔 해당 읍으로 들어갈 때에 일본군이 먼저 들어가 그들을 섬멸했다고 합니다. 다른 군대가 이미 지나간 곳을 나아가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대로 회군하였고, 봉평대장 강위서가 인솔한 병정과 이석범이 인솔한 분의군(奮義軍)은 모두 박동의가 통솔하였습니다.
차기석과 박학조 괴수 2명은 한꺼번에 왔기 때문에 이 달 22일에 장시(場市)에서 우선 비괴 차기석과 박학조의 목을 벤 뒤에 수급은 역자를 정해 감사에게 올려 보냈습니다. 정선의 비도 이중집·임순철(林順哲)·김윤언 등 3명은 한꺼번에 쏘아 죽였고, 나정백(羅正伯)과 정만천(鄭萬千) 등 3명은 산골짜기 백성으로 협박에 겁을 먹고 어쩔 수 없이 이름을 올렸다가 바로 돌아왔다고 했기 때문에 잘 타일러서 귀화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아! 저 동비가 얼마나 완악합니까? 창궐하여 무리를 모으고 사람의 목숨을 해치며 돈과 곡식을 빼앗고 창과 총을 쌓아놓았습니다. 반역의 형세가 이미 드러났고 그 죄를 살펴보면 죽여 없애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본 관아의 종사관 박동의는 궁벽한 산골에 있지만 이런 일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서 계책을 세워 승리하였습니다. 이석범 형제는 진신의 후예로서 해당 읍에서 의병을 일으켜 비류를 토벌하였고, 지금 병사를 모집할 때에 같은 마을의 유생 김익제·최주하·김준수·장혁주 등을 이끌고 때에 맞춰 협공을 했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봉평대장 강위서는 포수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해당 면의 비도를 토벌하는 데에 공을 세웠고, 홍천의병과 힘을 합하여 도처에서 50여 명을 쏘아 죽였으며 귀화시킨 자들도 100여 명에 이르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중군 출신 이진석과 출신 조철승 등은 2차례 행군하여 비당(匪黨)을 섬멸하였으니 상을 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부사가 병사를 모집하는 임무를 맡아 각처의 비도를 직접 토벌할 겨를이 없고 쇠약한 몸에 병까지 연이어 침범하여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병사를 모집하여 본 관아의 영서와 정선 및 여량 등지에 행군해서 비도를 지금에야 평정했습니다. 각 요충지를 지키는 일을 특별히 단속하여 감히 흩어진 비도가 다시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이런 엄동의 추운 날씨에 눈이 산마루에 쌓인 때를 만나 군정을 점차 돌려보내며 잘 타일러서 생업을 안정시켰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
1894년 11월 일 순사에게 첩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