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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내면 1리 집강과 방수도대장에게 보내는 전령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94년 11월 24일
일러두기

내면 1리 집강과 방수도대장에게 보내는 전령 [傳令 內面一里執綱及防守都隊長]

지시에 따라 거행할 일이다. 지금 본면의 조항리(鳥項里)에 있는 김영모(金榮模) 등 네 집이 모두 농상계원(農桑稧員)으로 비도를 토벌할 것을 주창하다가 도리어 비도의 방화를 입어 가재도구와 식량이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추운 계절에 집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 더욱 가련하고 불쌍하다. 그들이 집을 지을 방도를 면내(面內)에서 전례를 살펴 도와주고, 식량은 비도의 곡식을 압류한 것 중에서 넉넉히 주어 돌아가서 집을 짓게 한 뒤에 그 형편을 보고하도록 하라.

1894년 11월 24일

강원도 행 강릉대도호부사 겸 관동소모사 첩보[江原道行江陵大都護府使兼關東召募使]

지난 달 29일에 도착하여 받은 전령에 의하면, “소모사로 임금이 계하(啓下)했으니 직임(職任)을 살펴라”고 하였습니다. 본 관아의 영서 6면은 외진 산골짜기에 있어 읍과의 거리가 수백리가 되고 민심이 어리석어 부랑하고 패악한 부류가 동도와 결탁하여 창고에 불을 지르고 사람의 목숨을 해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달 22일에 군정을 징발하여 본부의 중군 출신 이진석과 전 감찰 이영찬(李英燦) 및 유생 박동의로 하여금 인솔해서 봉평면의 비도를 치게 하였습니다. 해당 면에 사는 강우서(姜禹瑞), 강위서가 비도의 못된 짓에 격분하고 백성들이 목숨을 보존하기가 어려울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의병을 모집해서 비도의 괴수인 윤태열과 정창호 등 13명을 이미 잡아서 바쳤습니다.
중군 이진석이 들어가는 날에는 그 죄상의 경중을 따져 총살하거나 목을 벤 뒤에 강우서를 대장으로 차출하여 군정을 이끌게 하였습니다. 내면과 봉평 등지의 비도를 토벌하고 각별히 지키도록 더욱 엄중하게 타일렀습니다. 박동의를 소모종사관으로 차출하고 그 다음 날에 이진석과 박동의는 대화면에 나가 백성들의 마음을 잘 추스렸습니다. 그 뒤에 이진석은 그대로 정선군 여량으로 가서 비도와 접전을 하여 접사(接司) 이중집(李仲集) 등 14명을 쏘아 죽였습니다.

이 달 6일에 강위서의 수본에 의하면, “동도 거괴(巨魁) 차기석이 1,000여 명을 모아 봉평과 내면 및 영서의 각 읍 등지에 출몰해서 창과 총을 빼앗아 사람의 목숨을 해치고 창고와 가옥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습니다. 그 기세가 대단하여 약간의 군병으로는 막기가 어렵습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박동의에게 군병을 인솔하도록 하여 바로 내면으로 보내고 이어서 다시 양양관아에 관문을 보내어 병정을 모집하였습니다. 해당 관아의 사인(士人) 이석범은 진신(縉紳)의 후예로서 이미 의병을 모집하여 경내의 비도를 토벌하였고, 소모사의 명령을 듣고 바로 같은 마을의 유생인 최주하·김준수·장혁주와 함께 병정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내면 등지로 보냈습니다.

이 달 11일에 박동의가 내면 1리 창촌에 주둔하고 강위서와 홍천(洪川)의 허경(許埛)에게 통문을 내어 합세하여 바로 토벌을 해서 자운포(自雲包)에서 접주 위승국(魏承國)과 접사 심성숙(沈成淑) 등 17명을 쏘아 죽였습니다. 그 다음 날에 박동의가 이석범의 분의군병과 합세하여 바로 원당리로 진격하였습니다. 차기석을 토벌할 때에 성찰(省察) 오덕현 등 3명을 우선 쏘아 죽였고, 차기석은 승세를 타서 사로잡았습니다. 청두리(靑頭里)로 진격하여 홍천의 비괴인 권성오(權成五) 등 12명을 쏘아 죽이고 약수포로 들어갔습니다. 이석범의 동생인 국범(國範)은 병정을 이끌고 신배령으로 바로 들어갔습니다. 이석범의 부종(副從)인 김익제(金翼濟)는 병정을 인솔하여 응봉령으로 바로 나아가 3 방향의 길에서 협공하여 접주 김치실(金致實) 등 11명을 쏘아 죽였으며, 접사 박학조(朴學祚)를 사로잡았습니다. 사로잡은 비도 중에 손응선(孫應先) 등 60여 명은 개고기를 나누어서 먹게 하고, 잘 타일러서 귀화시켰습니다.

강위서는 흥정(興亭) 3리 등지로 방향을 바꿔 임정호(林正浩) 등 38명을 쏘아 죽였고 나머지 무리 100여 명은 잘 타일러서 귀화시켰습니다. 홍천 등지에서는 지평현감(砥平縣監)이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하였고, 횡성 등지에서는 해당 현감이 소모관 정준시(鄭俊時)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으며, 평창과 영월 등지에서는 일본군이 먼저 토벌을 하였습니다. 다른 군대가 이미 지나간 곳은 나아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각 군대는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사로잡은 거괴 차기석과 박학조 2놈은 이 달 22일에 교장(敎場)에서 머리를 베어 사람들을 경계한 뒤에 수급(首級)은 역자(驛子)를 정해 본도의 감영에 보냈습니다.

부사가 지금 소모의 임무를 맡아 각 처의 비도를 직접 가서 토벌할 겨를이 없고 쇠약한 몸에 병까지 연이어 얻어서 직접 보고하는 것이 불편하였으며, 병사를 모아 행군하는 것을 지금에야 조정하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눈은 쌓이고 날씨가 차가운 때를 맞아 병사들이 가련하기 때문에 차례대로 돌아가게 하고 여러 차례 비도의 약탈을 겪은 백성들은 잘 타일러서 불러 모아 각각 안집(安集)시킨 연유를 사실에 의거하여 첩보합니다.

1894년 11월 23일 도순무영에 첩보합니다.

주석
역자(驛子) 역에 속한 마부나 역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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