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1월 1일 순영에 첩보 [甲午十一月初一日 牒巡營]
첩보(牒報) 하는 일입니다. 지난 달 22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도착한 비감(秘甘)내 감결의 내용을 요약한 것에 의하면, “홍천현감의 보고를 지금 받아보니, ‘동학의 무리가 이번 달 12일 밤에 불을 질렀습니다. 괴수(魁首) 차기석(車箕錫)과 접주 박종백(朴鍾伯)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강릉 사람들을 함부로 죽였습니다. 행패를 부린 놈들은 모두 본현의 사람들이어서 현감이 검시(檢屍)할 몇 사람을 데리고 시신이 보관된 곳에 도착하니 몇 백명의 동학의 무리들이 각기 총과 창을 소지하고 시신을 둔 곳을 에워싸서 검시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동학의 무리가 강릉으로 방향을 바꿔 운지(雲地)에 머물러서 점점 도당을 모으고 아직 해산하지 않고 있습니다. 포(砲)가 형편없고 교졸(校卒)이 열악한 본 읍으로서는 토벌할 계책이 전혀 없으니 특별히 강릉 관아에 관문을 내어 힘을 합쳐 토벌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지금 동비(東匪)가 끝내 귀화(歸化)하지 않고 갈수록 어리석고 완고하며 매우 극악합니다. 본 관아에서 포군(砲軍)을 징발하여 힘을 합쳐 토벌하는 것이 마땅하여 감사(甘辭)에 따라 그 날 미시(未時, 오후 1~3시) 쯤에 본 관아의 중군(中軍) 이진석(李震錫)과 전 감찰 이영찬(李永燦)을 영수(領首)로 차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포군과 읍하군(邑下軍) 150여명을 이끌고 가서 영서의 군정과 힘을 합쳐 봉평(蓬坪) 내면(內面)의 동도들을 토벌하도록 단단히 타일러서 보냈습니다.
10월 28일에 중군 이진석과 영수(領首) 이영찬의 보고에 의하면, “봉평 비도의 괴수 윤태열(尹泰烈)과 같은 패거리 이창문(李昌文)·김대영(金大永)·김희열(金喜烈)·용하경(龍河京)·오순영(吳順永)·이화규(李和奎) 등 7명은 사람들의 분노가 격발하여 그 자리에서 총을 쏴서 죽였고, 나머지 도망간 적들은 특별히 추격하여 체포한 뒤에 내면(內面)으로 방향을 바꿀 계획입니다. 본 관아의 전 좌수 김상연(金商演)은 지난 번 9월 7일에 동학의 무리를 쫓아낼 때에 중군으로 그 일을 거행한 자입니다. 그러나 집이 영서에 있어서 동도가 김상연과 아들 3명을 붙잡아 모두 산채로 묻어 죽였기 때문에 시신을 그의 큰아들에게 내어주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동도가 얼마나 어리석고 완고한 무리인지 4부자의 목숨을 함부로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정선과 평창 2개 읍의 비도가 창궐하여 각기 읍내에 모였는데, 그 수가 몇 천명에 이르러 기세가 대단하고 본부로 향하려 한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그래서 군정을 여러 곳의 요충지에 보내어 각별히 지키고 그들을 섬멸하려고 하지만 본읍의 형편으로는 이 비도들을 혼자 수색하여 토벌하기 어렵습니다. 평창과 정선의 2개 읍에 감결을 보내 함께 그들을 섬멸하도록 엄중히 타일러 주십시오. 또한 삼척부(三陟府)와 삼척진(三陟鎭)에 감결을 보내 군정을 징집하여 힘을 합쳐 토벌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나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뒤의 형편은 계속해서 빨리 보고할 계획입니다. 그 연유를 우선 빨리 보고합니다.
1894년 11월 1일 순영(巡營)에 첩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