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향소의 좌수가 첩보하는 일 [留鄕座首爲牒報事]
방금 도착한 전령(傳令)에 의하면, “동도를 몰아낸 일을 첩보하라”고 하였습니다. 순영의 제사에 의하면, “말을 타고 군기를 소지한 채 관아에 들어와서 삼정(三政)을 고치고 관원과 백성에게 형벌을 가하여 옥에 가두니 그 밖의 약탈은 말할 겨를이 있겠는가? 그들이 강상(綱常)을 거스르고 법을 무시하는 것은 강도에 그치지 않는다. 강도가 사람을 대적하면 사람들은 모두 잡아서 죽이려고 하는데, 더욱이 강도에 비할 데가 없는 자들에게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 백성들이 의거를 일으켜 그들을 박살낸 것은 매우 가상하다. 의거를 먼저 제기한 사람과 현장의 사실을 즉시 상세하게 보고하고, 빼앗은 창과 총은 숫자를 대조하여 관아에 들이며 말은 원래 주인을 찾아서 돌려줘라. 부상을 입은 백성에게는 감영의 수납 중에서 넉넉히 주어 치료를 하게하고 나중에 형편을 보고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초의 사실은 이미 급히 감영에 보고하였습니다.
이번 달 4일에 평창의 전 좌수 이치택(李致澤), 이름을 알수 없는 권지관(權地官), 진사 박재회(朴載會), 영월의 이름을 알수 없는 나교장(羅敎長), 삼척(三陟)의 황찰방(黃察訪), 정선(旌善)과 여량역(餘糧驛)의 지왈길(池曰吉), 본 관아 대화면(大和面)의 김상오(金相五)·공계정(孔啓正)·김순길(金順吉)·손영팔(孫永八) 등이 동학을 칭하면서 영월·평창·정선 등의 3개 읍에서 수천여명을 이끌었습니다.
먼저 노문(路文)을 내면 도착할 때에 지나가는 곳의 인접한 도로에서 말을 빼앗아 타고 총과 칼을 가져갔으며 포를 쏘고 관아에 들어가 공해(公廨)를 점거하여 4~5일을 머물렀습니다. 향촌의 두민(頭民)을 불러들여 군세(軍稅)와 적세(糴稅) 등의 삼정을 마음대로 삭감하였고 요호(饒戶)를 잡아가서 재물과 전답문서를 요구하였으며 관원과 백성을 구타하고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민간의 송사(訟詞)를 쉽게 처결하고 주리를 트는 형벌로 위협하여 군기를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읍촌에서의 못된 짓이 끝이 없으니 그 광경을 상상하면 화적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접(接)의 이름이 각각 달라서 도착한 순서를 따지고 서로 적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비(是非)가 어수선합니다. 마침 그 때에 군사를 징발하여 토벌하라는 감영의 감결(甘結)이 도착했기 때문에 유향소의 수교(首校)와 공형이 그들에게 감사(甘辭)를 내려서 타일렀습니다. 이어서 다시 민간에 명령을 내려 단단히 경계하였습니다.
각 면(面)의 대소 민인 4,000~5,000명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이 달 7일 술시(戌時) 쯤에 의병을 일으켜 일제히 일어나 한꺼번에 읍에 들어왔고, 관아의 백성들도 의기(義氣)를 내어 힘을 합하여 그들의 죄를 성토하였습니다. 그들을 몰아낼 때에 현장에서 죽인 자가 20명이고 부상을 당한 뒤에 도주하다가 죽인 자가 수십여 명이며 본읍의 백성들 중에 다친 자는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빼앗은 총은 7자루이고 창은 157자루이며 말은 3필입니다. 부상을 당한 읍촌의 백성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치료를 하여 거의 죽음을 면할 지경이 되었으나 감영의 물품으로 치료를 도와주는 것은 관아가 비어 마음대로 거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감영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빼앗은 창과 총은 숫자를 대조하여 관아에 들였고, 말은 원래 주인이 찾으러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내어 줄 계획입니다. 의거를 먼저 제기한 사람과 매우 심하게 다친 백성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서 성책(成冊)하여 올려 보내고 연유를 첩보합니다.
1894년 9월 일 겸관 사또에게 보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