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초 [文狀草]
삼가 준거하여 아뢸 것은, 본 관아의 신임부사는 아직 임소(任所)에 도착하지 않았고, 지난번에 동도를 몰아낸 이유는 글로 아뢰었습니다. 그랬더니 제사(題辭)에서 말하기를, “동도가 당(黨)을 조직하고 접(接)을 설치하여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이 없는 것이 어떻게 재물을 빼앗고 마을을 침탈하는 것 뿐이겠는가? 심지어 관부(官府)를 위협하고 군기를 탈취하기를 끝이 없다는 소문은 이미 들었다. 그 못된 악습을 살펴보면 다만 화적을 다스리는 형률로만 해서 안된다. 지금 백성들의 의거는 매우 가상하다. 바로 그 사실과 의거를 먼저 제기한 사람들의 이름을 상세히 조사하여 급히 보고하고 특별히 단속하여 저들이 경내에 들어와서 다시 소란을 피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제사의 지시를 베껴 각 면의 대소의 민인(民人)들을 잘 타이르고 의거를 먼저 제창한 사람의 이름과 현장의 사실을 차례대로 급히 보고할 생각입니다.
본 관아의 대화면(大和面)은 읍의 관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한양과 감영으로 가는 길목으로 공납(貢納)의 진상(進上)과 문첩(文牒)의 운송이 계속해서 끊이지 않습니다. 해당 면의 구도미(九道味)에 사는 김상오(金相五)·사전(士田)에 사는 공계정(孔啓正)·안미(鴈尾)에 사는 전순길(全順吉)·계촌(桂村)에 사는 손영팔(孫永八)·평창(平昌)의 진사(進士) 박재회(朴載會) 등이 동도라고 칭하며 본읍에서 그들을 몰아낸 것에 반감을 품어 군호(軍號)로 도당(徒黨)을 모으며 포수(砲手)를 모집해서 복수를 하러 영동(嶺東)을 공격할 계획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영동사람들을 왕래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진상(進上)과 상납(上納) 및 각양의 문첩을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 중에 영월(寧越)·평창·정선(旌善)의 3개 읍은 죽음을 당한 친척들이 난류(亂類)와 결탁하였고 영서(嶺西)지역에 머물고 있습니다. 영동사람이 맞는 봉변을 당하는 일이 간혹 있고 끝내는 살해하려는 태도가 있는 것을 보면 이 불법한 부류와 비슷합니다. 읍에서 바로 잡아다가 훗날의 폐단을 막아야 하지만 본관(本官)에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 이에 사실을 적어 글로 아룁니다. 위에서 말한 5명을 잡아들여 순영의 뜰에서 엄중히 징계하여 폐단을 막고 그 밖의 폐단을 저지르는 난류를 모두 몰아내어 이 영동사람들이 편안한 땅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1894년 9월 26일 글로 순영에 보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