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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0월 1일[十月 一日]

새벽과 낮에 비가 내림. 궂은 날씨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다. 동선정(洞仙亭)에서 비를 피하였고, 봉산읍(鳳山邑)에서 잤다. 모두 40리를 갔다.

초2일[初二日]

맑고 바람이 붐. 아침에 출발하여 신원점(新院店) 정씨 집에서 잤다. 내를 건너면 흥수원(興水院)의 큰 주막으로 서흥(瑞興) 땅이다. 이날 모두 40리를 갔다. 은전(銀錢) 1원을 사고 값으로 3냥 7전을 지불하였다. 여러 날 동안의 여행으로 인한 괴로움을 견디기 어려웠다.

초3일[初三日]

맑고 서늘함. 도중에 은전(銀錢) 1원을 사고 값으로 3냥 8전을 지불하였다. 서흥읍(瑞興邑) 김점(金店)에서 잤다. 모두 30리를 갔다. 짐이 무거워서 은전 8푼을 사고 1푼당 3냥 6전을 지불하였다. 은전은 도합 10원이 되었다. 황봉산(黃鳳山)에서 서흥에 도착하니 왜군의 식량 운반꾼이 수천 명이나 되어 놀랐다.

초4일[初四日]

맑고 서늘함. 아침에 출발하여 금수역(錦水驛)을 지나 평산(平山) 땅 장지두(長之頭)에 있는 정점(鄭店)에서 잤다. 모두 40리를 갔다. 또 은전 1푼을 먼젓번 가격으로 샀다.

초5일[初五日]

맑고 서늘함. 아침에 총수역(葱秀驛)과 평산읍(平山邑)을 지나 ▣마동(▣馬洞)에서 잤다. 모두 50리를 갔다.

초6일[初六日]

맑고 서늘함. 아침에 저탄교(猪灘橋)를 지나고 낮에 금천읍(金川邑)과 병전(餠廛)을 지나 청석관(靑石關)에서 잤다. 모두 50리를 갔다.

초7일[初七日]

밤에는 비가 내리고 낮에는 흐림. 길이 질었다. 미력당(彌力堂)에서 별도의 지름길로 들어 송도(松都)에 도착하였다. 남문 밖 구리가(九里街)의 이 교관(李敎官) 집에서 유숙하였다.

초8일[初八日]

맑고 서늘함. 이 집은 서울 노파의 종형(從兄) 집이어서 나를 극진히 환대하였다. 남문에 올라 시판(詩板)의 시를 읊조리고 왔다.

초9일[初九日]

맑고 서늘함. 감영 앞의 청향각(淸香閣)을 감상했다. 연못에 가니 그곳에도 읊조려서 적어 둔 시가 많았다.

초10일[初十日]

맑고 서늘함. 선죽교(善竹橋)에 가서 정 문충공(鄭文忠公)의 혈흔을 보고 간절한 흠모의 정이 생겨났다.

11일[十一日]

맑고 서늘함. 두 노파와 함께 길을 떠났다. 길에서 양주(楊州)의 조아(趙雅)를 만났다. 장단읍(長湍邑)에서 잤다. 40리를 갔다.

12일[十二日]

맑고 서늘함. 아침에 출발하였다. 파주(坡州) 신주막(新酒幕)에서 잤다. 모두 55리를 갔다. 현곡(玄谷)의 김아(金雅)를 만났다.

13일[十三日]

맑고 서늘함. 곧장 출발하였다. 고양(高陽) 전석(磚石)에서 잤다. 모두 45리를 갔다. 이곳은 서울에서 20리 거리이다.

14일[十四日]

맑고 서늘함. 길을 출발하였다. 길에서 강령 어른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손을 잡았다. 서울 소식을 들으니, 삼남에서 동학의 무리가 크게 노략질을 하고 있는데 충주가 특히 심하다고 하여 매우 놀랐다. 홍제원(弘濟院)에서 창의문(彰義門)으로 들어가 강령 어른 댁에 도착하였다. 오위장(五衛將)을 못 만나서 즉시 서울 노파와 함께 입동(笠洞)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술과 안주를 내어왔다. 용천 노파도 그 집에 머물렀다. 또 송현(松峴)의 이노미(李老未)를 찾아보았다. 간동(間洞, 間은 諫의 오기인 듯)에 와 자면서 주인 가족과 회포를 풀었다.

15일[十五日]

맑고 서늘함. 교동(橋洞)의 승지(承旨) 영석(永奭)을 만나 세상일을 의논하니 한심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입동(笠洞)의 노파 집에 갔다. 그의 다섯 딸이 나를 은인으로 대접하며 나와서 절을 하였다.

16일[十六日]

맑고 서늘함. 용천 노파를 데리고 길을 출발하였다. 송파(松坡)를 건넜다. 인심이 크게 변하였다. 또 광주(廣州)에서 소요가 발생하여 몹시 걱정이 되었다. 친구 노원오(盧元五)의 집에서 잤다.

17일[十七日]

맑고 서늘함. 길을 떠나 저녁에 근현(勤峴)에 도착하였다. 여러 종친이 모두 모여서 회포를 풀었으나 집의 소식은 여전히 듣지 못하였다. 충주의 동도(東徒)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노은(老隱)이 크게 걱정이 되었다.

18일[十八日]

맑고 서늘함. 다리가 아프고 발이 부르터서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여러 종친 및 유아(兪雅)와 함께 앞에 있는 주막에서 술을 마셨다. 공주(公州)에서 와서 머물고 있는 종인(宗人)에게 가서 반갑게 만났다.

19일[十九日]

맑고 따뜻함. 길을 출발하는데 종인(宗人) 경칠(景七)이 노자 1냥을 주었다. 감사하였다. 부동(釜洞)의 사돈 심(沈)씨 댁에서 잤다. 비로소 집안 소식을 들었다. 그사이 위급하고 곤란한 경우를 겪었으나 모두 겨우 목숨은 보전하고 있고, 큰집 식구들은 사동(沙洞)으로 돌아왔으며, 옛 집과 여러 친족들도 모두 안전하다고 하였다. 큰 다행이었다. 오늘 저녁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제삿날이다. 그러나 멀리서 제사에 참석할 수 없어 서글펐다. 각처의 동도(東徒)가 점차 사기를 잃어가고 있다고 하여 다행이었다.

20일[二十日]

맑고 따뜻함. (결락) 재종 영교(永敎)의 집에 (결락) 곧 당숙(堂叔)의 대기(大忌)일이다. 영준(永俊), 종경(從景), 영만(永萬)이 모두 왔다. 작년 7월에 재종숙모 윤(尹)씨가 (결락) 지금 처음으로 세 종제를 보니 목이 메었다. 그사이 재종매와 삼종질 응수(應洙)는 모두 상산(尙山) 김▣(金▣)의 집과 성혼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성▣(醒▣) 덕성(德誠)의 후손이다. 다행이었다. 집안 소식을 자세하게 들을 수 있어서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21일[二十一日]

맑고 따뜻함. 사촌 경년(景年)과 함께 그의 새 사돈인 친구 김경옥(金景玉)의 집으로 갔다. 친구 김성보(金成甫)가 동행하였다. 저녁에 재종(再從)의 집으로 왔다.

22일[二十二日]

맑고 따뜻함. (결락) 친구 이병응(李秉應) (결락) 곧장 사동(沙洞)의 집으로 돌아갔다. 형님은 팔송(八松)으로 행차하셨고 태아(泰兒)와 장제(章弟)가 있었다. (결락) 용천 노파는 뒤에 남았고 사촌 경덕(敬德)이 함께 왔다. 후원의 구목(丘木)은 모두 베어져 벌거숭이가 되었다. 장호(長湖)의 백성 놈들이 이가 갈리도록 분하다. 그런데 나무 값 3,000냥을 민경식(閔冏植, 冏은 烱의 오기)에게 찾아왔으나 동학의 접주(接主) 이덕흥(李德興)이란 놈에게 빼앗겼으니 너무나 분통하다. 어찌 원한을 갚을 날이 없겠는가? 하늘을 가리켜 맹서하였다. 질녀의 혼사는 단호(丹湖)의 이 병사(李兵使) 집으로 정해졌다. 이 집은 청강(淸江) 제신(濟臣)의 11대손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23일[二十三日]

맑고 따뜻함. 집에서 성묘를 한 뒤에 최아 숙빈(崔雅叔賓)에게 가서 조문하였다.

24일[二十四日]

맑고 따뜻함. 용천 노파와 장평(長坪)의 동생 집에 갔다. 저녁에 근현(勤峴)에서 하인이 왔다. 가져온 편지를 열어 보니, 종인(宗人) 일현(一鉉)의 편지였다. 마침 아주 좋은 일이 있어서 장제(章弟)가 곧 서울로 올라간다고 하였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하였다.

25일[二十五日]

맑고 따뜻함. 동계(洞禊)가 열려서 가서 살펴보았다. 서울에서 온 하인에게 노자 1냥을 지급하였다.

26일[二十六日]

맑고 따뜻함. 오신(梧申)의 윤경춘(尹景春) 어른을 찾아가서 만나고 여러 친구들을 만났다. 윤씨 어른 집에서 잤다. 동몽계(童蒙禊)의 쌀과 돈을 쪼개서 쓰는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장제(章弟)가 함께 왔다고 하였다.

27일[二十七日]

맑고 따뜻함. 아침식사 후에 장평(長坪)의 동생 집으로 돌아갔다. 형님이 어제 저녁에 돌아오셨다고 하여 즉시 사동(沙洞)으로 가서 울면서 형님을 뵈었다. 뒤에 장제(章弟)도 왔으나 그는 곧장 서울로 길을 떠났다. 난세라서 이번 걸음 또한 크게 염려가 되었다. 도무지 형제가 단란하게 모일 날이 없어 안타까웠다.

28일[二十八日]

맑고 따뜻함. 조카와 사촌동생, 제종동생 경조(景造) 및 친구 김성보(金成甫)와 함께 출발하였다. 경조에게 돈 3전을 빌려 주었다. 팔송(八松)의 본가에 도착하였다. 익아(益兒)와 소실은 무고하였다. 서로 울면서 만났다. 오늘 저녁은 당숙의 대기(大忌)일이다. 달이 작기 때문이다. 옥호(玉湖)의 종조모께서 그사이 돌아가셨는데 종숙의 대기(大忌)가 또 오늘 저녁이었기 때문에 함께 온 여러 사람이 모두 옥호로 갔다.

29일[二十九日]

맑고 따뜻함. 동네 친구들이 모두 와서 만났다. 홍(洪) 사돈 형제와 몇몇 친구들이 왔다가 갔다. 모두 난리를 겪은 일을 위로하였다.

주석
광주(廣州)에서 소요 광주민요; 당시 경기도 일대에서도 잦은 농민봉기가 있었는데 광주에서는 가장 늦게 폐막을 고쳐 달라는 소장을 내고 소요를 일으켰다.
노은(老隱) 충주 내의 지명.
구목(丘木) 무덤 가에 있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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