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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9월 초1일 갑술[九月 初一日 甲戌]

맑고 시원함. 이방에게서 술 1사발을 가져왔다. 주령이 관아로 돌아왔다. 그에게 들으니, 감사가 청군과 왜군의 평양 접전 시에 총탄 속에서 몸을 빼서 도망 나와 이곳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오늘은 만부(灣府)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용천의 내행(內行)이 배로 길을 떠난다고 하였다. 이곳 진(鎭)의 내행도 출발한다고 하여 나도 함께 떠날 계획을 세웠다. 매우 서운하였다. 고 함종이 왔다가 갔다.

초2일[初二日]

맑고 시원함. 나의 삭전(朔錢, 매월 지급하는 돈) 중에 남은 부분 총 400냥을 이방에게 분부하여 즉시 들이라고 하였다. 오교(吳校)에게 술값 2냥을, 김 중군에게 술값 3전을 갚았다. 내일 출발하기 위해 짐을 싸느라 어수선하였다. 아전 김씨에게 맡겨 두었던 50냥, 즉 전 28냥과 은환(銀丸) 1개의 결가(結價) 22냥을 들여왔다. 김제원과 김 오위장이 왔다가 갔다. 황 단천이 왔다가 갔다.

초3일[初三日]

맑고 시원함. 식후에 출발하였다. 백성들이 중도에 모두 모여서 머물러 있기를 희망하여 더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한탄스러웠다. 고 함종이 와서 노자 10냥을 주었고, 김제원이 신발 1켤레를 보내 왔고, 김 오위장이 노자 5냥을 주었다. 모두 감사하였다. 김제원에게 빌려 온 『주서백선(朱書百選)』 3권을 반드시 믿고 전달해 달라는 뜻으로 고 함종에게 보냈다. 저녁에 백성들이 수직(守直)을 한다고 하였다.

초4일[初四日]

맑고 시원함. 하루 종일 심란하였다. 이아 인건(李雅仁建)과 신학수(申學洙)가 와서 잤다. 일전에 왜인(倭人) 6명이 용천에 들어왔다가 무사히 지나갔다고 하였다. 백성들이 밤마다 수직을 하니 한탄스럽다.

초5일[初五日]

맑고 시원함. 김제원이 와서 말하기를, 용천의 내행(內行)이 어제 출발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쳐 안타까울 따름이다. 장리(將吏)들이 백성들과 한통속이 되어 관리의 행차를 방해하니 애통하다. 이방에게서 찾은 돈 346냥 1푼 가운데 용천 노파에 준 돈 42냥 8전을 제하면 실제로 303냥 2전 1푼이 남는다. 그 중에서 돈 150냥과 장도(長刀) 및 안경끈 가격 20냥, 합계 170냥을 내주고 나머지 133냥 2전 1푼을 박소점(朴所店)에 가져다주었다. 안타까웠다.

초6일[初六日]

맑고 시원함. 며칠 안으로 출발하려는데 선주(船主)들이 배를 내어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탄스럽다. 고 함종과 황 단천, 황 참봉이 왔다가 갔다.

초7일[初七日]

맑고 바람이 붐. 김제원과 김 오위장이 배를 주선하였으며, 김 오위장은 그 일 때문에 유숙하였다. 저녁에 왜인 6명이 동헌으로 들어왔으나 별다른 탈은 없었다. 그 가운데 높은 자는 금정의일(今井義一)이고, 그 다음은 자견묘삼(自見卯三)으로 연해의 형세를 살피기 위하여 의주에서 왔다고 하였다. 감사와 병사(兵使)가 모두 새로 부임하였으며 전임 도백(道伯)은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왜군의 무기는 사람을 두렵게 하였다. 잡아두었던 배 3척 중에 1척은 관용(官用)으로 쓸 계획이었다.

초8일[初八日]

맑고 바람이 붐. 왜군들이 아침을 먹고 떠났다. 김제원의 아들이 가지고 온 별은(別銀, 황금) 2돈 2푼쭝의 값은 36냥이고, 은환(銀丸)과 모은(毛銀) 2근 1냥 3돈쭝의 값은 10냥이고, 세목(細木) 1필의 값은 16냥이고, 산주(山紬) 20필의 값은 13냥으로 도합 75냥을 맡겨 두었다. 이방 (결락) 조 133냥 2전 1푼 가운데 120냥은 관아에 납입하고 기록하였으며, 13냥 2전 1푼은 은 1냥중 (결락) 애통하였다. 용천 노파는 4월 초1일부터 나의 소실(小室)이 되었는데, 지금 따라가려고 하였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데리고 갈 작정이다.

초9일[初九日]

맑고 서늘함. 김제원이 아침에 왔다. 오전에 두포(豆浦)로 갔다. 고 함종이 이별주를 권하였고, 김아(金雅)는 시를 지어 주었다. 황 단천과 황 참봉도 모두 와서 작별을 하였고 여러 장리(將吏)들도 모두 하직하였다. 너무나 서운하여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하였다. 용천 노파와 서울 노파가 모두 배에 올랐다. 함께 배 안에서 잤다.

초10일[初十日]

맑고 서늘함. 새벽에 배가 떠났다. 도중에 섬의 좌교(左校) 박효긍(朴孝兢)과 육지의 이방(吏房) 전치락(田致洛) 및 김제원의 아들을 만났다. 오늘은 남풍이 순조롭지 못하고 파도가 세차게 일어 주령이 멀미가 나서 드러누워 걱정이 되었다. 겨우 용천 곽곶포(郭串浦)에 정박하였으며 중류(中流)에서 유숙하였다.

11일[十一日]

맑고 서늘함. 새벽에 배를 출발시켰다. 순풍을 타고 철산(鐵山)의 선사(宣沙) 개하도(介葭島)를 지났고, 또 선천(宣川) 상각산(角山) 아래를 지나가니 산천이 볼 만한 곳이 많았다. 정주(定州) 가산포(嘉山浦)를 지나갔다. 하루 종일 망망대해에서 한 톨의 좁쌀 같은 몸으로 떠가는 것도 하나의 장관이었다. 저물녘에 박천(博川)의 포구에 정박하여 배 안에서 잤다.

12일[十二日]

맑고 서늘함. 새벽에 배를 출발하여 안주(安州), 숙천(肅川), 순안(順安) 등지를 지나 오전에 한천(漢川) 부근의 포구에 정박하였다. 조수가 빠져 중류(中流)에서 머물렀다가 다시 한천포(漢川浦)로 들어갔다. 또 장시(場市)에 일본인들이 들어왔다고 하여 즉시 장시 가로 가서 시장 사람 최 감찰(崔監察)과 육지에 내리는 문제를 상의하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배 안에서 잤다.

13일[十三日]

맑고 서늘함. 배에서 박(朴)가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 오후에 다시 산북(山北) 이기현(李奇玄)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 국선(國善)이 평실(平室)을 친정으로 보냈다.

14일[十四日]

맑고 시원함. 이기현은 평실의 친척집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집에 머물렀다. 바닷가로 가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15일[十五日]

맑고 시원함. 돈 1냥 5전을 가지고 두 노파를 데리고 먼저 출발하였다. 김미력(金彌力)의 어미가 길을 안내하며 함께 갔다. 30리를 가서 전산(錢山)의 김가(金哥) 주막에서 잤다.

16일[十六日]

맑고 시원함. 바로 출발하여 원장시(元場市)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송현(松峴)의 이응상(李應祥) 집에 도착하였다. 주령이 내행(內行)을 데리고 들어왔다.

17일[十七日]

맑고 시원함.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산당(山堂)으로 가서 머물렀다. 또 산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았다.

18일[十八日]

맑고 시원함. 돈 2냥을 갖고 감영으로 출발하였다. 40리를 가서 기성(箕城, 평양)에 도착하였다. 예부터의 제일강산이 모두 폐허로 변하였고, 1만여 호가 모두 텅 비어 처절한 전장이었다고 할 만하였다. 들어가서 오위장(五衛將) 한익상(韓益相)를 만나고 또 중군(中軍) 이희식(李希植)을 만나 주령이 올라온 일을 의논하였다. 저녁에 신임 감사 김만식(金晩植) 대감을 뵈었더니 극진히 환대해 주어 감사하였다.

19일[十九日]

맑고 시원함. 아침에 한령(韓令, 한익상)과 감사를 만나 주령의 일을 거듭 부탁하고 바로 작별하였다. 도교(道橋)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산당(山堂)에 도착하였다.

20일[二十日]

맑고 시원함. 주령이 산당에서 독정(獨亭)의 촌가로 옮겨 거처하였다. 나는 그대로 산당에서 잤다.

21일[二十一日]

맑고 시원함. 주령이 감영으로 들어갔다. 나는 산당에서 송현의 이응상 집으로 가서 잤다. 유아 석흥(劉雅錫興)과 말을 사는 일을 의논하였다.

22일[二十二日]

맑고 시원함. 유아(劉雅)와 함께 종인(宗人) 참봉의 집으로 가서 나귀를 샀다. 값으로 75냥을 치른 후 산당으로 끌고 오니 주령의 편지가 왔는데, 과연 감사가 환대해 주었다고 하였다. 신임 첨사(僉使) 홍봉관(洪鳳觀)이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일본인이 평양-용강(龍崗) 간 전선을 가설하였다.

23일[二十三日]

맑고 시원함. 지난밤에 서리가 내림. 방자(房子) 윤관(允觀)에게 인신(印信)을 맡겨서 보내고 또 편지도 부쳤다. 편자를 사기 위하여 응상 형 도순(道順)과 함께 태평시(太平市)에 갔다가 헛걸음을 하였다. 응상과 도순은 평실(平室)의 외숙이다. 나는 산당에서 잤다.

24일[二十四日]

맑고 시원함. 유아(劉雅)에게 가서 재갈을 구하는 일을 부탁하였다. 저녁을 먹은 뒤에 산당에서 잤다.

25일[二十五日]

맑고 시원함. 주령이 어제 저녁에 돌아왔다. 아침에 가서 만났는데, 교귀(交龜, 업무 인수인계)하는데 24일이었다고 하였다. 서울 소식은, 대전(大殿)께서 이제 황제(皇帝)를 칭하였고, 민씨(閔氏)들은 한 사람도 조정에 있는 자가 없으며, 삼남(三南)에서 동학(東學)이 크게 일어났다고 하였다. 응상이 태평시로 갔으나 편자가 없어서 헛걸음을 하고 돌아왔다.

26일[二十六日]

맑고 시원함. 가서 유아(劉雅)를 만났다. 재갈을 구하지 못하여 안타까웠다. 도순(道順)이 산북(山北)에 가서 돈을 실어 왔다. 방자를 도마시(道麻市)로 보내 편자를 사 와서 바로 달았다. 다행이었다.

27일[二十七日]

맑고 시원함. 내 돈 115냥 가운데 75냥을 나귀 값으로 제하고 40냥이 남았다. 거기에서 20냥은 짐 속에 넣었으며 20냥은 (결락) 할 계획이다. 감영에서 일본인의 물금체[勿禁帖]를 얻어 두었다. 주령이 나더러 먼저 출발하라고 하였다.

28일[二十八日]

맑고 시원함. 두 노파를 데리고 출발하였다. 주령과 함께 천리 길을 와서 2년 동안 변방에서 지내다가 이제 처음으로 작별을 하게 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길을 떠나 험한 나루인 석호정(石湖亭)을 건넜다. 방자가 여기까지 와서 이별을 고하였다. 서운하였다. 돌박점(乭朴店) 황(黃)씨 집에서 잤다. 하루에 30리 길을 갔다. 밥값은 2전 3푼이었다.

29일[二十九日]

맑고 시원함. 아침에 출발하여 낮에 중화촌(中和村) 김씨 민가에서 쉬었다. 일본인들의 폐단이 없다고 하여 대로로 길을 잡아 50리를 가서 중화읍(中和邑)에서 잤다.

30일[三十日]

맑고 시원함. 황주(黃州) 장야(長野)에 도착하여 일본인 대군(大軍)과 마주쳐서 작은 길로 들어 소농동(小農洞)의 김씨 민가에서 잤다. 오늘은 40리를 갔다.

주석
내행(內行) 부녀자가 여행길에 오르는 것을 말함. 혹은 그 부녀자를 말함.
대전(大殿)께서 이제 황제(皇帝) 대전 황제; 이 해 12월 17일 왕실의 존칭을 변경했는데 고종을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라 하였다. 황제라는 호칭은 아직 사용치 않았다.
물금체[勿禁帖] 조선시대 관부에서 일정한 일에 대한 제제를 내리는 명령 문서. 이 물금체를 지닌 사람에 대하여는 관부에서 금지하는 일이나 활동을 금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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