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초1일 을해[七月 初一日 乙亥]
밤에는 큰 비가 내리고 낮에는 맑고 더웠으며 간혹 비가 내림. 재신(才信)이 돌아오는 편에 주령의 편지와 김제원의 편지가 왔다. 용천부사의 답장과 오 생원의 답장을 보니, 26일에 별사(別使)를 지공(支供)하기 위하여 역참에 나갔는데, 그날 마 통령(馬統領)의 부대가 지나가고 그 이튿날에는 위 통령(衛統領)의 부대가 연이어 도착하여 소와 땔감 등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서울 소식은 막연하여 종묘사직의 안위를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 애통하지 않은 점이 없다. 우리 주객(主客)의 고향집 소식을 아득히 들을 길이 없으니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마음이 저절로 요동쳤다. 오교(吳校)에게서 술 1사발을 가져왔다. 송도(松都, 개성)와 평양에도 왜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가슴이 섬뜩하였다.
초2일[初二日]
맑고 더움. 송병조(宋丙祚) 편에 주령과 주아(主雅, 김제원)에게 편지를 부쳤다. 황 단천의 집에 갔더니 고 함종도 와서 만났다. 오후에 돌아왔다. 주령과 주아(主雅)의 답장이 왔는데, 내일 관아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만부(灣府, 의주)의 전보 내용 중에, 아산(牙山)의 전투에서 왜군이 대패하였다고 하였다. 저녁에 술 몇 잔을 마셨다.
초3일[初三日]
맑고 더움. 오전에 주령이 관아로 돌아와서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회포를 풀 수 있었다. 청군이 계속하여 들어와 8영(營)의 대군이 8만여 명이라고 하였다. 민심이 더욱 동요하고 두려워하였다. 저녁에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히 났다.
초4일[初四日]
맑고 더움. 고 함종과 고 중군, 황 단천, 황 참봉이 왔다가 갔다. 주령이 6월 10일 서울에서 발송한 편지를 보고는, 일본인과 청국인이 바야흐로 접전을 벌이고자 하여 도성에는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었다고 하였다. 나는 집에서 온 편지를 보지 못하여 걱정이 되고 답답하였다.
초5일[初五日]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며 흐리고 더움. 섬의 장리(將吏)들이 어제 나왔다가 오늘 갔다. 무기를 수선하는 일을 분부하였다고 한다.
초6일[初六日]
맑고 더움. 나 훈장(羅訓長)과 이흥복(李興福)이 왔다 갔다. 『서전(書傳)』 10권과 『언해(諺解)』 5권을 돌려보냈다. 오늘 저녁은 증조할머니의 제삿날이다.
초7일[初七日]
맑고 더움. 오늘은 입추(立秋)이다. 김대경(金大景)이 왔다가 갔다. 용천으로 갈 편지를 써두었다. 저녁에 술을 마셨다.
초8일[初八日]
맑고 더움. 김제원의 편지가 왔다. 동헌(東軒)에 용천부사와 오 생원의 답장이 왔는데 모두 말하기를, 왜군이 대궐을 포위하였으며 삼전(三殿)은 파천(播遷)하였다고 하였다. 듣기에 매우 망극하였다.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나라와 집안의 소식을 까마득히 들을 수가 없으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초9일[初九日]
맑고 더움. 정언(正言) 이석영(李奭泳)이 와서 주령이 술 한 사발을 사서 대접하였다. 황 참봉과 고 중군이 왔다가 갔다. 방어사(防禦使)의 관문(關文, 상급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보내는 공문)은 변경을 잘 살피라는 내용이었고, 감영의 관문은 오가작통(五家作統)에 관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저녁에 술을 마셨다.
초10일[初十日]
맑고 더움. 김제원과 황 단천, 고 함종이 왔다가 오후에 갔다. 왜군이 도성을 완전히 포위하였으며, 또 임진강(臨津江)과 송도(松都)를 막고 있다고 하였다. 청군들이 계속하여 올라간다고 하였다. 만부(灣府)에서 관문이 왔는데, 청군을 수로(水路)로 올려 보낼 것이니 선박 20척을 준비하고 기다리라고 하였다. 이 또한 큰일이다. 저녁에 이군이 왔다가 갔다.
11일[十一日]
맑고 더웠으며 낮에 소나기가 내림. 『맹자(孟子)』여섯 책을 이 정언(李正言)에게 전하라고 김대경(金大京)의 집으로 보냈다. 김제원에게 편지를 써서 말과 마부를 빌려 왔다.
12일[十二日]
맑고 시원함. 아침에 의주로 길을 떠났다. 선사(船泗)에 이르러 김제원의 아들을 만나 동행하였다. 고성(古城) 장아(張雅)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출발하였다. 중도에 말과 마부를 장아(張雅)의 집으로 보냈다. 청군들이 말을 보면 빼앗아 간다고 하기에 이렇게 하였다. 걸어서 성으로 들어갔다. 산천과 누대(樓臺), 성곽 등이 관서(關西)에서 가장 웅장한 고을이다. 남문(南門)으로 들어가니 편액에 ‘해동제일관(海東第一關)’이라고 적혀 있었다. 발동(撥洞) 백 공방(白工房)의 집에 여장을 풀고 호방(戶房)인 향소(鄕所) 김약순(金若淳)을 만났다. 저녁에 예방(禮房) 이 학관(李學官)을 만나 서울 소식을 탐문하였다.
13일[十三日]
맑고 시원함. 아침에 들어가서 만윤(灣尹, 의주부윤) 이근명(李根命)을 만나 서울 소식을 들었다. 6월 21일 저녁에 왜군이 궐내로 돌입하여 삼전(三殿)을 에워쌌는데 우리 조정의 여러 신하는 한 사람도 호위하는 자가 없었으며 대원위(大院位, 흥선대원군의 호칭) 역시 포위되었다고 하였다. 듣기에 망극하였다. 23일의 정사(政事, 인사이동)에서는 선혜청당상 어윤중(魚允中), 독판(督辦) 김가진(金嘉鎭), 병조판서 김학진(金鶴鎭), 호조판서 민영달(閔泳達), 전라감사 박제순(朴齊純)이 임명되었으며, 민영준(閔泳駿) · 응식(應植) · 형식(炯植) · 치헌(致獻) 네 사람은 섬으로 유배되고, 흉적(凶賊) 옥균(玉均, 김옥균)에게는 충달공(忠達公)이라는 시호가 내렸다고 한다. 일본인이 정권을 잡고 있어서 국사가 날로 잘못 되어가니 통곡하지 않을 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아침을 먹은 뒤에 김군(金君)과 함께 백일원(百一院)에 가서 청군의 위용을 살펴보고 영루(營壘)를 돌아보니 상국(上國) 군세(軍勢)라고 할 만하였다. 원통령(袁統領)과 필담을 나누었는데, 그는 “지금은 바빠서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다.”고 하였다. 곧장 홀로 통군정(統軍亭)에 올라 월사(月沙) 이 상국(相國, 李廷龜) 공의 운(韻)에 화답하였다.
半倚靑天半倚山 반은 푸른 하늘에 의지하고 반은 산에 의지하여 있는 西城亭子最龍灣 서성(西城)의 정자는 용천(龍川)과 만부(灣府)에서 으뜸이네 願逢天下無雙士 천하에 둘도 없는 선비를 만나 同上海東第一關 함께 해동제일관(海東第一關)에 오르고 싶네. 鴨水三江襟帶裏 압록강 세 줄기는 금대(襟帶) 속에 있고 燕城萬里枕交間 만 리 길 연성(燕城)은 침교(枕交) 사이에 있네. 長安近日無消息 장안은 근래에 소식이 없는데 遊子驚秋尙未還 나그네는 가을에 놀랐지만 아직 돌아가지 못하였네.
저녁에 만윤(灣尹)에게 가서 그의 조카 진사(進士) 이문로(李文魯)를 만났다. (낮에) 지은 시를 만윤에게 고쳐 달라고 하였더니, 크게 칭찬하면서 ‘강(江)’ 자를 ‘조(條)’ 자로 고쳐 주었다. 또 시국에 대하여 많은 논의를 하였다. 또 신도(薪島)에서 준비하도록 한 선박을 20척에서 11척으로 줄여 달라고 부탁하여 작정하였다. 밤이 깊은 후에 나왔다. 이 진사(李進士)는 승지(承旨) 이영석(李永奭)의 생질이다.
14일[十四日]
맑고 시원함. 한국영(韓國永)과 함께 서문(西門)을 나서서 청마령(淸馬嶺)으로 갔다. 이곳은 바로 압록강 변으로 상국(上國, 중국)과 통하는 대로이다. 청군이 강변의 넓은 들에 진을 치고 있었다. 쌀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었으며, 휘두르는 창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청군이 지나가는 연로(沿路) 각 고을의 인부와 소를 모두 동원하여 짊어지게 하자 백성들이 전부 흩어져 떠돌게 되었으니 세상일이 한탄스럽다.
15일[十五日]
종일 비가 내림. 호방(戶房) 김약순(金若淳)이 아침밥을 성대하게 차려 주어 감사하였다. 한국영(韓國永)과 백낙원(白樂元) 등 여러 향인(鄕人)이 모두 모였다. 서울에 사는 상인(喪人) 이 첨정(李僉正)도 함께 머물렀다. 어제저녁과 오늘 아침에 본관(本官)에게 들어가서 만나 회포를 푼 뒤에 작별을 하였다. 한국영이 저녁을 성대하게 차려서 나를 초청하였다. 그곳에서 잤다.
16일[十六日]
맑고 더움. 마부와 말이 어제 이미 고성(古城)에서 들어와 있었다. 당초에 노자로 15냥을 받아 왔는데 남은 3냥으로 흥정하였다. 오전에 출발하여 두 개의 나루를 건너 입암(立岩) 장아(張雅)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17일[十七日]
맑고 더움. 곧장 출발하였다. 중도에 김군과 작별하고 오전에 본 진(鎭)에 도착하였다. 왕복 도합 90리였다. 주령과 서울 소식 및 세상일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말과 마부를 돌려보내고 4냥을 값으로 지급하고, 그 편에 김제원에게 편지를 부쳤다. 저녁에 술 몇 잔을 마셨다.
18일[十八日]
맑고 더움. 주령이 선박을 점검하기 위하여 두포(豆浦)로 나갔다. 고 함종과 황 단천이 와서 함께 선포(船浦)로 갔다. 생선과 술이 있었다. 20척이 와서 정박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쓸 만한 선박 1척을 골라 붙들어 두었다. 오위장 김경달(金景達)도 와서 함께 황 단천의 집으로 갔다. 주물상(晝物床)을 나중에 들여왔다.
19일[十九日]
종일 비가 내림. 청군의 군량선(軍糧船) 10여 척이 두포(豆浦)에 정박하여 폐단을 일으키고 있다고 급히 보고하였으므로, 별견(別遣)과 통사(通事) 김옥련(金玉連)을 보내어 잘 이야기하여 보내라고 명하였다.
20일[二十日]
밤에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으며 낮에는 맑고 시원하고 바람이 붐. 본 진(鎭)의 중군(中軍)으로 고국서(高國瑞)를 임명하였다. 신 첨지가 왔다가 갔다. 전쟁으로 길이 막힌 때에 형제와 처자의 소식이 아득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21일[二十一日]
맑고 시원함. 말을 타고 길을 떠나 용천 고을로 가서 생원 오필선(吳必善)을 만났다. 전란 중의 막혔던 회포를 풀고 술 몇 잔을 마셨다. 김윤탁(金允琢)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즉시 출발하여 용천관(龍川館) 청류당(聽流堂)에 도착하여 용천부사를 만났다. 기쁘게 손을 잡고 마주하여 술을 마시면서 회포를 풀고 세상사를 이야기하였다. 섬으로 유배된 죄인 민영준(閔泳駿)은 임금을 버리고 도주하여 평양의 아전 집에 숨어 있다가 또 자산(慈山) 땅으로 도망갔는데, 지나가는 포수에게 붙들려서 마 통령(馬統領)의 부대로 압송되어 산발을 하고 결박당하여 있으며, 그 죄상은 권세를 잡아 백성들을 학대하고 나라를 그르친 간신이므로 지옥에 갇힐 것이라고 하였다.
기백(箕伯, 평안감사)이 갈리게 되어 김만식(金晩植)이 임명되었는데, 마 대인(馬大人)은 “이러한 때에 도백(道伯)을 체차하는 것은 틀림없이 왜인(倭人)들의 위협 때문이다.”라고 하고는, 신임 도백이 감영에 부임하는 것을 방해하므로 김백(金伯, 김만식)이 정방산성(正方山城)으로 몸을 숨겼다고 하였다. 안곤(安梱, 평안병사) 김동훈(金東勛)이 죽었다고 하였다. 현재는 왜인들이 도성에 쫙 깔려 있으며, 대전(大殿)께서는 대궐에 갇혀 있고, 정사는 모두 왜인들의 손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듣기에 매우 애통하였다. 용천 고을의 장리(將吏)들이 인부와 소를 보내 달라고 청하였므로 일의 형편상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뜻으로 꾸짖고 타일렀다. 6월 27일부터 청군이 매일 끊이지 않고 지나가므로, 연로(沿路)의 각 고을에서는 모두 인부와 소로 저들의 짐을 실어 보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곤궁해지고 재산은 고갈되었으며, 소는 지치고 곡식은 거덜나서 고을마다 모두 텅 비었다고 하였다. 세상일이 한심하였다.
22일[二十二日]
맑고 시원함. 대청마루 앞에 작은 봉우리가 있고 또 기이한 수석(水石)이 있는데 ‘제일계산(第一溪山)’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본 고을의 수령과 함께 올라가서 술 몇 잔을 마시고 내려왔다. 그런데 서울 상인인 청나라 사람들이 왜란(倭亂)을 피하여 도망쳐 와서 말하기를, 왜추(倭酋, 일본 우두머리)가 비단 서울만이 아니라 광주(廣州) · 여주(驪州) · 충주(忠州) · 안성(安城) · 화성(華城) 등의 고을을 포위하고 있어서 진을 치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으니 간담이 내려앉는 듯하였다. 고향 소식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어린 자식이 아비를 부르는 소리와 형제들이 그리워하는 정이 마음에 걸려 가슴이 서늘해지고 간담이 내려앉았다. 오후에 출발하여 곧장 용천 고을에서 20리 지점에 이르렀다.
23일[二十三日]
종일 비가 내림. 오늘은 처서(處暑)이다. 오 생원과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김윤탁(金允琢)의 집에 와서 잤다. 밤이 깊은 뒤에 본 고을 수령은 관아로 돌아갔다.
24일[二十四日]
맑고 시원함. 노자 3냥 가운데 과일 값을 흥정하여 하인에게 주고 요기채(饒氣債)를 제하고 1냥 4전이 남았다. 아침에 본 고을 수령에게 들어가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아침을 먹은 뒤에 작별하고 길을 떠났다. 김제원의 집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는 곧장 본 진(鎭)에 도착하였다. 주령이 의주로 선박을 보내면서 소를 잡고 술을 하사하여 일꾼들을 먹이자 뱃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출발하였다고 한다. 이 또한 선정(善政)이다. 저녁에 객중의 회포가 평온하지 않아 단잠을 이룰 수 없었다.
25일[二十五日]
맑고 시원함. 주령이 술 1사발을 가져오고 고기를 삶아서 안주를 만들어 나를 대접하였다. 천리 밖 먼 변방의 객지에서 2년간 고생한데다 또 병란까지 만나 집안과 나라의 존망의 소식을 아득히 들을 길이 없었다. 형제와 처자들은 필시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터이니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간담이 떨어지고 애가 끊어져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전 원(元)씨가 상을 당한 이후 처음 들어왔다.
26일[二十六日]
흐리고 시원하며 또 바람이 붐. 단천 황 참봉과 덕계 김아(金雅, 김제원) 두 사람이 와서 함께 뒤쪽 제방으로 천렵(川獵)을 나갔다가 바람을 맞으면서 돌아왔다. 용천의 강교(姜校)라는 자가 왔다고 하였다.
27일[二十七日]
맑고 시원하였으며 간혹 비가 내림. 주령이 더위로 인한 설사 때문에 몸이 불편하여 걱정스러웠다. 별당(別堂)에 온돌을 수리하였다.
28일[二十八日]
흐리고 시원함. 안주병영(安州兵營) 우후(虞候) 김신묵(金信默)의 편지가 왔는데, 그사이 병사(兵使)가 갑자기 사망하였다고 하였다. 서울 소식은, 광서(光緖) 연호를 동립(東立) 원년으로 부르고, 지벌(地閥, 지체와 문벌)을 혁파하고, 반상(班常)을 막론하고 인재를 거두어 쓰고, 관제(官制)를 통일하고, 복식을 개정하는 등 갑신년(甲申年)의 예를 따랐다고 한다. 기타 절목(節目)은 기록할 수가 없었다. 왜추(倭酋)가 정권을 잡고 있어서 대전(大殿)께서는 팔짱을 끼고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오백 년 동안 지켜온 예의(禮義)가 전부 사라지게 되었으니 애통하도다.
29일[二十九日]
맑고 시원함. 주령이 술 5사발을 가져다 두었다. 값은 5냥 2전 5푼이라고 하였다. 고 함종과 황 단천이 왔다가 갔다. 백현(栢峴) 김 참봉이 주령에게 고기와 장(醬)을 보냈다고 하였다. 이틀 저녁 술을 마셨다.
30일[三十日]
맑고 시원함. 백현 김 참봉이 김제원의 편지를 갖고 왔다. 즉시 답장을 보냈다. 어제 시장에서 산 당목(唐木) 6자의 가격은 3냥 9전이며, 담배 1묶음의 가격은 9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