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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2월초1일 무신[二月 初一日 戊申]

맑고 따뜻함. 김제원이 주령의 비위를 거슬렀는지라 와서 사과하고 갔다. 남의 무덤을 파헤친 죄인 매장(梅長) 김(金)가 두 사람을 잡아 가두었다가 중방(中房)이 술에 취해 놓치는 실수를 하여 책망을 당하였다고 한다.

초2일[初二日]

맑고 따뜻함. 섬의 수임(首任)들이 모두 들어갔다고 한다. 신 첨지가 왔다가 갔다. 『상서(尙書)』(『서경』의 별칭) 10권을 모두 읽었다. 아전 원(元)씨에게서 『수호지(水滸志)』 20권을 가져왔다. 감영으로 갔던 하인 흥보(興甫)와 재신(才信)이 돌아왔다. 감사와 막중의 편지를 보니, 복정한 명주 가격 600냥과 새로 정한 절목(節目)의 상납전을 잘 납부하라고 하였으며, 황주(黃州)와 중화(中和)의 민요가 매우 심하다고 하였다. 김아(金雅)가 필공(筆工)의 밥값 4전을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신 첨지에게 내어주었다.

초3일[初三日]

맑고 따뜻함. 김가가 홍(洪)가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은닉하였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다. 황 단천과 김 중군이 왔다가 갔다. 아전 박도겸(朴道兼)이 와서 아뢰기를, 시신을 은닉한 사건은 모두들 홍가를 의심한다고 하였다. 아래에서부터 은밀하게 염탐하였다고 한다.

초4일[初四日]

맑고 따뜻함. 오위장 김경달이 왔다 가면서 세금을 감면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밤이 깊은 뒤에 박도겸이 시신을 은닉한 사건은 김가의 농간이라고 은밀히 아뢰었다. 『수호지』를 읽기 시작하였다.

초5일[初五日]

맑고 따뜻함. 박도겸으로 하여금 수감된 죄인 김가를 데리고 가서 시신을 찾도록 하였다. 김가와 홍가 양측이 사적으로 화해하였다고 하였다.

초6일[初六日]

맑고 따뜻함. 김가와 홍가 두 사람이 사적으로 화해하고 순조롭게 끝내었다고 하였다. 황 단천이 왔다가 갔다.

초7일[初七日]

맑고 따뜻함. 경주인 김명석이 왔다가 갔다. 황 참봉이 왔다가 갔다. 오위장 김경달이 왔다 갔는데, 마음을 표시하기 위하여 달포 전에 전(錢) 10냥을 이방에게 보냈다고 하였다. 통인(通引) 석석(石錫)이 죄를 지어 경외(境外)로 추방되었다고 하였다. 섬의 장리(將吏)가 왔는데, 중군(中軍)의 고목(告目)을 가지고 왔다.

초8일[初八日]

흐리고 따뜻함. 섬의 김장원(金長元)과 김옥련(金玉連)을 심문하였다. 옥련은 곤장을 맞고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다. 일전에 남의 무덤을 파헤쳤던 김이용(金理用)이 와서 문안하고자 하였으나 밖에서 꾸짖어 돌려보냈다고 하였다.

초9일[初九日]

아침에 눈이 내리고 낮에는 흐림. 김 중군의 딸이 그 남편과 다투고는 약을 먹고 죽었다. 달려가서 곡을 하고 관아에 발고(發告)하였으며, 그를 달래어 마음을 진정하도록 권하였다. 쫓겨난 통인 송석석이 새로 속량(贖良)된 계집종 월선(月仙)을 꼬드겨서 저녁에 도주하였는데 어디로 갔는지를 몰라 애통하였다.

초10일[初十日]

맑고 따뜻함. 신 첨지가 왔다가 갔다. 고 중군이 왔다가 갔다. 김 중군의 처가 딸이 비명횡사한 것 때문에 행패를 부리자 그 사위가 관아로 달려 들어와서 소란스러웠다. 황경록(黃景祿)을 새로 통인으로 임명하였다.

11일[十一日]

맑고 바람이 붐. 주령이 『맹자(孟子)』를 읽기 시작했다. (그가) 막중에게 편지를 부쳤다고 하였다. 정언(正言) 이석영(李錫泳)이 와서 만났다. 그는 원래 강생(講生)이었으므로 반나절 동안 경전의 의미를 토론하고 갔다. 새 옷을 입었다. 이군이 왔다.

12일[十二日]

맑고 따뜻함. 집사(執事)의 자리가 비어서 그 대임(代任)을 물색한다고 하였다.

13일[十三日]

맑고 따뜻함. 신 첨지의 편지가 왔는데, 새로 임명된 통인 황경록의 임무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 황 단천이 왔다가 갔다. 야견사(野繭絲) 1통 1만 3,250개를 호인(胡人)이 사갔는데, 가격은 29냥이라고 하였다. 서울에 사는 바느질 노파와 용천의 바느질 노파가 와서 머물렀다. 이방을 의주로 보냈다고 한다.

14일[十四日]

맑고 바람이 붐. 박도겸이 김가와 홍가의 송사에서 이간하는 말로 속인 죄가 있었기 때문에 이치를 들어서 책망하였다. 강교(康校, 구실아치)에게 고기를 사오라고 분부하였다. 오늘은 춘분(春分)이다.

15일[十五日]

맑고 바람이 붐. 용천 기녀(妓女) 옥진(玉眞)의 편지가 와서 답장을 보냈다. 이군이 왔다가 갔다.

16일[十六日]

맑고 따뜻함. 집사에 김도린(金島獜)을, 주사별장(舟師別將)에는 김명현(金明玄)을 임명하였다고 하였다. 이군이 주령의 명으로 덕계(德溪)의 김씨 문중에 가서 『맹자』 1권을 빌려 왔다. 황경록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읽게 하였다. 박도겸이 김가와 홍가의 송사에서 관아를 속인 죄가 있었기 때문에 곤장을 맞았다고 하였다. 4개 마을의 존통(尊統)들이 모두 들어와서 새로 정한 절목의 영납전(營納錢, 감영에 납부한 돈)을 백성들에게 거두는 일을 품의하였다고 한다.

17일[十七日]

종일 비가 내림. 적막하고 무료하여 『수호지』만 보았으며, 주령과 『맹자』를 읽기도 하였다.

18일[十八日]

종일 흐림. 호인(胡人)이 국경 안으로 들어왔는데, 이는 법으로 금지된 것이어서 잡아 가두었다고 한다.

19일[十九日]

아침에 비가 오고 오후에 맑음. 매장(梅長) 김가가 홍가의 장례비를 지급하지 않은 죄 때문에 그를 잡아 가두었다고 하였다. 이방이 의주에서 돌아왔다. 동헌(東軒)의 중수에 쓸 종이류를 사가지고 왔다고 한다. 대매관자(瑇瑁貫子, 대모나 망건 줄을 매는 고리)의 가격은 2냥이며, 흑전(黑氈, 검은 방석) 1개의 가격은 9전, 주머니 끈 1건의 가격은 3전으로, 도합 2냥 9전이라고 하였다.

20일[二十日]

맑고 따뜻함. 황 단천과 이한종(李漢宗)이 왔다가 갔다. 주령의 둘째 형 종인(宗人) 경칠(景七)이 내려왔다. 격조하였던 터에 반갑게 맞이하였다. 삼가 2월 초7일에 형님이 서울에서 쓴 편지를 보니, 형제들의 집안은 별다른 큰 탈이 없으며, 익아(益兒, 익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 호칭)의 공부도 이제 『통감(通鑑)』3권을 읽어서 조금은 어른스러운 모습을 갖추었으니 익수(益洙)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머슴 이(李)가가 10월 그믐에 경주(慶州)로 갔으며, 머슴 김(金)가는 그대로 두었는데, 사람됨이 순박하여 다행이라고 하였다. 추수한 곡식은 20석이 되지 않아 종자와 조세를 제외하면 남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호(戶)는 친구 홍경림(洪景臨)의 호(戶)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용오(用五)가 7월에 100냥을 납부하고 섣달에 50냥을 납부하였다고 하였다. 정월 18일에 길을 떠나 2월 초하루에 성(城)에 들어갔으며, 형제들은 강령(康翎) 어른의 집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집안일과 아이의 공부는 걱정하지 말고 몸을 잘 보전하라고 하였으며, 죽암(竹岩)의 사돈 신(申)씨와 친구 홍씨가 봉납(捧納)하는 것은 영원히 탕감하였다고 하였다. 11월 25일자 편지와 12월 5일자 편지 및 정월 17일자 편지를 모두 읽어보았다고 하였다. 익아(益兒)와 용손(容孫)이 짝이 되어 어울리니, 이것이 세상 사는 재미라고 하였다. 대상(臺上)의 홍(洪) 서방 내외는 잘 지내고 있으며, 죽암(竹岩)의 이(李) 서방은 함께 상경하였다고 하였다.
또 장제(章弟, 장의 이름을 가진 동생의 호칭)의 편지를 보니, 팔송(八松)에서 모임을 갖기로 약속하였으나 별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어 잠시 중지하였다고 하였다. 과거(科擧)의 일에 대해서는 강령(康翎) 어른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하였다. 산소의 나무에 대하여는, 지금은 와서 침탈하는 사람이 없으며 저 민씨(閔氏)도 후회하고 있으므로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종제(從弟) 치일(致一)도 무탈하다고 하였다. 망건(網巾) 1개를 사서 보낸다고 하였다. 또 익아(益兒)가 직접 쓴 편지를 보니, 자획이 글자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참으로 기특하였다. 오늘 집에서 부친 편지를 보고 천리 먼 곳에 있는 나그네의 회포를 조금은 달래 주었으나 고향집을 생각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또 강령 어른의 편지를 보니, 단비 가죽은 가격이 비싸서 그만두었으며, 율종(栗宗)의 집터를 기필코 주선해 주겠노라고 하였다. 또 늑현(勒峴)의 일에 대하여 들었는데, 종인(宗人) 성함(聖咸)이 공주(公州)로 이사를 갔다고 하여 안타까웠다.

21일[二十一日]

맑고 따뜻함. 서울에 사는 바느질 노파가 떠난다고 하였다. 주령은 환곡(還穀)을 나누어 주는 일 때문에 창고로 나갔다. 매장(梅長) 김가는 홍가에게 줄 돈을 내준 뒤에 즉시 석방되었다고 한다. 김 중군을 불러서 주령이 돈을 빌리는 일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22일[二十二日]

맑고 따뜻함. 매장(梅長) 김영겸(金永兼)이 잡혀 와서 곤장을 맞고 석방되었다. 신 첨지가 왔다가 갔다. 경주인 김명석이 와서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 우교(右校)에게 돼지를 잡으라고 분부하였다.

23일[二十三日]

맑고 따뜻함. 황 단천과 황 참봉이 왔다가 갔다. 점심에 냉면을 먹었다.

24일[二十四日]

맑고 따뜻함. 오교(吳校)가 벌목을 하기 위하여 섬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25일[二十五日]

맑고 따뜻함. 통인 태옥(泰玉)이 지난 20일에 섬에 들어갔다가 오늘 나왔다.

26일[二十六日]

맑고 따뜻함. 만윤(灣尹, 의주부윤) 조만승(曺萬承)이 ‘감영의 장계(狀啓)로 파직’되었으며, 시골 장리(將吏) 10여 명은 용천으로 옮겨서 수감되었다고 하였다. 이군이 부모의 병환에 시탕(侍湯)한다고 겨를이 없어서 오늘에야 비로소 와서 뵈었다. 이인건(李仁鍵)이 왔다가 갔다.

27일[二十七日]

맑고 따뜻함. 국경을 넘어오는 배를 검사하기 위하여 김명인(金明仁)을 바다에 정박하고 있는 관선(官船)에 보내어 날마다 수직(守直)하게 하였다고 한다. 정언(正言) 이석영(李奭泳)이 왔다가 갔다. 오늘 저녁은 아내의 기일이어서 나그네의 마음이 쓰라렸다.

28일[二十八日]

흐리고 바람이 붐. 의주를 지나가는 선박 한 척을 붙들어 왔으며, 적재한 화물은 관아에 소속시켰다고 하였다. 황 단천과 김제원이 왔다가 갔다. 오교(吳校)와 좌교(左校)가 나왔다. 서울 노파가 다시 왔다.

29일[二十九日]

종일 비가 내림. 황경복(黃景福)의 집에서 떡을 보내 왔다.

30일[三十日]

오늘은 청명(淸明)이자 한식(寒食)이다. 맑음. 오늘 명절을 맞으니 집안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정언 이석영에게 편지를 보내어 『맹자』를 빌리고자 하였으나 마침 출타 중이어서 빈손으로 돌아왔다. 뒷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니 호인(胡人)의 선박이 강을 오가고 있었다.

주석
중방(中房) 고을 원의 시중을 들던 사람.
황주(黃州)와 중화(中和)의 민요 1893년(계사년) 가을에서 겨울까지 각지에서 민요가 일어났다. 북쪽의 종성과 성천에 이어, 황주 · 중화 · 청풍 · 개성 · 재령 등지에서 백성들이 관속의 집을 파괴하거나 폐막을 시정해 달라고 관정에 돌입했다(『고종실록』 계사년 11월, 12월조).
경주인 지방관청과 중앙관청의 연락사무를 보기 위해 지방에서 파견된 구실아치. 공물 따위 일을 대행함.
속량(贖良) 공사의 노비가 속량전이라는 대가를 내고 노비신분을 면제받는 것. 제도로 보장되었다.
주사별장(舟師別將) 주사는 수군, 별장은 하사급 군직의 하나로 수군의 중간직 장교를 말한다.
호(戶) 1894년 여러 민요에 대비키 위해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실시했는데 다섯 호를 하나로 묶고 그 호수를 지정했다. 여기의 홍경림은 호수임.
우교(右校) 진보(鎭堡)에서는 군교를 좌교와 우교로 나누어 각기 직무를 맡겼다.
감영의 장계(狀啓)로 파직 지방 수령의 파직은 상급기관인 감사의 보고를 받은 임금이 결재하는 제도가 있음. 수령은 임금이 직접 임명하므로 감사가 임의대로 파직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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