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정월 초1일
밤부터 아침까지 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이 불다가 눈이 날리더니 한기가 오싹오싹 들었다. 낮이 되어서는 햇빛이 비쳤다.
정월 초2일
바람이 불고 눈이 날리면서 날씨는 더욱 추워졌다.
정월 초3일
날씨가 역시 추웠다.
정월 초4일
날씨가 좀 덜 추웠다. 성묘 후에 저동(杵洞)으로 가서 김진사(金進士) 댁에 들렀다. 마침 본읍리(本邑里)의 배해길(裵海吉)이 이르러서 말하길, 안동(安東)과 강원(江原)의 병정들이 죽산(竹山)으로 크게 몰려들었다고 하였다. 또한 대구(大邱)에 어떤 여장군(女將軍)이 있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송도사(宋都事)와 다시 정도사(鄭都事) 댁에 들렀더니, 마침 읍내의 배오장(裵五將)이 왔다. 그가 말하길, 대구(大邱)에 관한 소문은 역시 같고, 어젯밤 백성들을 안정시키라는 관문[安民關文]과 수령을 교체한다는 관문, 그리고 오늘 단발을 정지한다는 관문이 내려왔다고 하였다.
정월 초5일
날씨가 점차 따뜻해졌다.
정월 초6일
동풍이 살살 불었다. 혹자가 이르길, 강병(江兵)들이 장안(長安)으로 크게 몰려 들어가고, 임금께서 파천(播遷)하였는데 어디로 향하였는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정월 초7일
날씨가 따뜻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갓을 많이 벗었으니▣, 어느 누가 괴이하다고 탄식하지 않았겠는가?
정월 초8일
종일 바람이 불고 눈발이 날렸다.
정월 초9일
날씨가 비로소 풀렸다. 시장가로 나가 서울 소식을 들어보니, “임금께서 아라사진(俄羅沙陣,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하였다가 초1일에 환궁하여 개화대신(開化大臣) 3명을 그 자리에서 때려죽이고, 나머지는 짐짓 감방에 가두었으며, 구대신(舊大臣) 10여 명이 출사하여 각부대신(各部大臣)에 오르니 흡연(翕然)히 옛 기운[舊風]이 돌았다.”고 하였다.
≪곡식 없이 풍년이 드니 세 번째 모를 일이다≫(衍文)
정월 초10일
갑자기 병정들이 황간(黃澗)에서 와서 본읍(本邑, 영동)에 유숙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소문에 이르길, 지난 섣달 열흘 사이에 단양(丹陽) 경계에 이르러 강원(江原)의 포병(砲兵)과 마주쳤는데, 일본인만이 총을 맞아 상해를 입고 상경(上京)하였다 한다. 그리고 그들 무리는 안동(安東)을 토벌하여 평정하라[討平]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안동으로 평정하러 가는 길에 온 것이라고 하였다. 혹자는 이르길, 전투에 패하여 왔다고 하는데, 맞는 말인지는 알 수 없다.
정월 11일
부내(府內)로 가보니, 병정들이 집집마다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술잔이니 밥상이니 하는 것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마침 배오장(裵五將) 집에 들어가 보니, 한 병정이 총포를 끼고 문밖에 서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그 병정이 말하길, “누구를 보려고 들어가려 하시오?” 하였다. 내가 말하길, “주인을 보려 하오.” 하였다. 그가 말하길, “주인이 없으니 어찌 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 안뜰로 들어가 보니 채웅(彩雄)과 채선(彩先)이 있었다. 오위장(五衛將)에 대해 물어보니, 이미 수석(壽石)으로 떠났다고 하였다. 어쩔 수 없이 상촌(上村)의 여러 친구들과 짝하여 가동(佳洞)의 주점으로 가서 나누어 마시고 돌아왔다. 저녁밥을 먹은 후 큰비가 어지러이 내리더니 밤새도록 멎지를 않았다.
정월 12일
이른 아침 진눈깨비가 어지러이 내리더니, 훈훈한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고 시냇물이 불어났다.
정월 13일
서늘한 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오고 가랑비가 내렸다.
정월 14일
비로소 햇빛이 났다. 이때부터 완연히 봄기운이 돌았다.
정월 15일[上元日]
날씨가 온화해져서 새벽에도 찬 기운이 없었다. 동쪽에 검은 구름이 길게 걸려 있었다.
정월 16일
신시 이후에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더니 이틀 동안 구름이 사방에 짙게 깔렸다. 화동(花洞)에 갔더니, 일본인들이 유구국(琉球國)을 개화시킨 지 2년 만에 그 군주를 폐하고 자사(刺史)를 두었으며, 그 나라 병갑(兵甲)을 많이 채용하였다고 하였다. 또 저동(杵洞)에 갔더니 김천(金泉) 봉계(鳳溪)에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왔다는 말은 헛된 소리라고 하였다. 또 이르길, 상감(上監)이 단발(斷髮)한 것은 사실이고, 곤전(坤殿, 명성황후)이 승하(升遐)한 것도 사실이며, 대가(大駕)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때 김홍집(金弘集)과 정모(鄭某) 등이 맞아 죽어 장안 사람들이 그 살을 다 찢어발겼다고 하였다. 어윤중(魚允中)이 내교(內轎)를 타고 양근(楊根)을 지날 때 양근 백성들이 그를 때려 죽였으며, 충주(忠州)·청풍(淸風) 두 고을의 수령이 맞아 죽고, 단발한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마구 때려 반쯤 죽을 정도였으며, 경기(京畿) 등지의 갓과 망건 값이 크게 올랐다고 하였다.
정월 17일
양가동(陽佳洞)에 가서 문상하고 왔다.
정월 21일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신목곡(新木谷)에 가서 시작할 공사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정월 22일
소나무와 개오동나무를 사는 일로 아주 멀리까지 갔다가 저물어서 돌아오는데, 바람이 몹시 불고 눈이 심하게 내려 아주 힘이 들었다. 그래서 용산(龍山)으로 돌아갔더니, 표형(表兄, 내외종 사촌형)과 족인(族人)들이 찾아왔다. 이날 밤 표형이 통풍(痛風)을 앓기 시작하여 다음날은 통증이 더욱 심해져서 형방패독산(荊防敗毒散) 두 첩과 개소주[狗汁]를 썼더니 좀 나아졌다.
정월 25일
모친의 환갑날이다. 날씨가 좀 풀렸다. 세 누이와 종매(從妹)가 같이 왔다. 조촐하게 상을 차리고 술을 준비하니, 여러 친구들이 많이 모였다. 다음날 차례차례 사방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