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6일 장청에 보내는 글 [初六日 將廳書]
어제 밤 서동로 형님에게 미친 소리 같은 이야기를 대략 설명하였습니다. 제 생각을 살펴보시고, 혹시라도 서로 얼굴을 마주하여 한번 웃지 않겠습니까? 또 한 마디 제안하자면 외촌의 여러 민인들은 동학이 모일 것을 기약하고서부터 지금 통문(通文)을 보낸 뒤까지 반드시 알고 있는 듯하니, 유인하는 것으로 의심하면서 다시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학에 이름을 의지한 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외방의 다른 촌민들과 장사치들도 횡액을 당할까봐 시장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비록 몇 명의 장꾼(場軍)들이 들어와도, 이때 읍인들이 서로 헐뜯고 시기하고 의심하며 억지로 팔고 다투는 폐단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수령에게 보고하여 시장에 한 번 명령을 내어서 놀라지 말게 하고, 삼청(三廳)이 직접 시장에 가서 관속과 뇌옥 사령들이 시장에 나오는 것을 일체 금하도록 하고, 다만 멀리서 바라보아 탐지하여 생각지 못한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그럴 듯합니다. 만일 읍의 위세를 과장하여 순군들이 오고 가게 되면 민심이 놀라서 움직이게 되니 어찌 할 것인가? 저의 낮은 소견으로는 만일 일의 기미를 강하게 보여야만 한다면 혹 성의 주위를 한번 순찰하는 것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하여 처리하도록 하십시오.
이날 촌민들은 안도하고 시장에 들어와 매매하라는 뜻으로 장시에 명령을 내려 달랬으나, 장시에서 교역한 사람들은 과연 얼마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순영에서 읍의 장부에 기록된 영수(營需), 관수(官需), 상납미가(上納米價), 목가(木價)를 조사하였다. 줄여줄 것을 헤아려보니, 결마다 줄여주는 것이 5냥 7전이었다. 그래서 이날 또한 시장에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날 오전 수령이 교장(敎場)에서 진을 치는 방법을 익히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수교와 서동로가 매우 번거로운 점을 여러 차례 아뢰었다. 오후에는 관속들과 읍내에 사는 민정을 이끌고 대오를 이루어 교장을 순찰하다가 그만두었다고 한다. 읍내에 사는 민정들이 배고파서 관아에 먹을 것을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읍에도 나누어줄 돈이 없었다. 이방들이 부득이하게 간절히 빌어서 민정 1명당 10문씩 내려주었다고 한다.
이날 밤부터 민정들을 풀어서 다만 그들이 사는 동에서 군막을 지키도록 명하였으며, 또 성곽 위에 3~4곳에 군막을 쳐서 멀리 바라보게 하였으며, 관문에서는 다만 각반 관속들이 각 청에서 지키다가 관에서 밤이 깊어진 뒤에 잘못을 적발하였다고 한다. 읍촌을 가리지 않고, 사람마다 놀라고 잘못된 소문(訛言)이 그치지 않았다. 어떤 자는 김천, 어떤 자는 부상 등지에 동도(東徒)들이 수없이 많이 모여 있으며, 읍에 들어가려 한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낭설이다.
함창의 동도들이 왜인 몇 명을 죽였으며, 왜인들은 순영에 구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영문에서는 영장이 병사 200명을 이끌고 함창으로 가서 동학도를 치기 위해 초1일 떠났다고 한다.
초 3일에 교장(校長)인 이진사가 나를 방문하여 이 무렵의 사건들을 논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때에 향교에서는 마땅히 바른 것을 떠받치고 사악한 것을 물리치자(扶正斥邪)는 논의가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으며, 물정에 어두운 선비들은 논의를 주도하여 일을 시작하는 자가 없을 것 같아서 한탄스럽다. 교장 또한 관가에 들어가 여쭈려 하였으므로, 나는 인심을 진정시키고 읍촌이 합세하여 정탐하고 경계하여 지키는 등의 일을 여쭈어서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으로 권하여 보냈다.
같은 날 수교가 형리를 내보내어, ‘통(通)’자의 도장이 찍힌 초본 하나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것을 보았더니 그 글은 즉각 보은에 사는 동학 접장(接長) 최모라는 자에게 통문을 보내라는 것이었으며, 통문의 말은 지금 타살한 것은 화적이지, 도인(道人)은 아니라고 하였다. 도인이라고 한 것은 반드시 도학을 일컫는 것인데, 이들 무리들은 도인이 이름을 빌려서 이와 같이 토색하여 도적질을 하였다. 어찌 도인들로서 더럽고 수치스런 것이 아닌가? 혹시 도인이 죽은 것으로 오해할까, 혹 다른 논의가 있을까 걱정되므로, 이에 이와 같이 통문에 언급된 부류는, 먼저 법소(法所)에서 적발하여 죄를 처벌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 통문은 긴요한 것은 아닌 듯하나, 이미 관의 뜻이라 하였으니, 힘써 막을 수 없어서, 몇 가지 구절을 적어 보낼 뿐이다.
대포(大浦)의 대계공(大溪公)이 전에 방문하러 왔을 때, 공납을 많이 줄여서 민심을 안심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영문에서 바야흐로 조사하여 줄여주라는 명령을 기다렸으나, 또한 이와 같은 일은 밖에 있는 자들은 주변에 거느리고 있는 사람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날 또 공산정(公山亭) 송이경(宋彛卿)에게 보낸 편지에 동학의 소요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또한 요역을 가볍게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영에서 5냥 정도를 사감하자는 뜻으로 언급하였는데, 대계(大溪)의 뜻은 많이 줄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유생들이 관의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상납과 응납하는 수는 경영(京營)에서 정하는 것으로 어찌 관에서 마음대로 감해줄 수 있겠는가? 그 중에 옳지 않은 명목은 모두 줄여야 하지만, 이 또한 어떻게 갑자기 의논하겠는가? 다만 근심스러울 뿐이다.
27일 이후 성내의 모든 사람들이 잘못된 소문(訛言)에 겁을 먹고 집집마다 재산을 옮기고, 사람마다 피신하여 성안과 성밖이 거의 텅 비었다. 심지어 읍과 가까운 동洞은 또한 모두 재산을 숨겼으며, 좋지 않은 상황을 두려워하였다. 홀로 우리 가문의 몇 집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태평스럽게 있으면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니 고을의 사람들이 오히려 괴이하게 여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와서 묻기도 하였다. 우습고 우습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