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초 1일 을사 [八月初一日乙巳]
내외의 부병을 점고하니 모두 1,500여 명이었다. 모두 수건으로 머리를 싸고 장유(長襦), 두루마기를 벗어 날렵하게 하도록 하였다. 점고를 마치고 집강과 여러 집사들이 서열에 따라 도열하고 부병들은 그 아래에 집합하였다. 목청이 좋은 자에게 큰 소리로 약조를 읽고 3번 반복하도록 한 뒤에 객관의 벽에 게시하였다.
초 2일 병오 [初二日丙午]
동도들이 사방 경계의 도로를 나누어 점거하여 상인들의 통행을 막아서 시장이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하였다.
초 3일 정미 [初三日丁未]
동도의 기세가 날로 치솟았다. 마침내 군의 창고에서 조총·화약·연환(鉛丸)을 꺼내 부병에게 나누어주고 날마다 훈련을 시켰다.
초 7일 신해 [初七日辛亥]
시장의 모습이 점점 영성해져서 모인 자는 내·외부 10여 리의 인민들에 불과하였다. 동부(東部) 전 감역(前監役) 이태환(李台煥)이 동도를 물리치는 일로 부(部)와 가까운 3개 면(面) ≪외동부면(外東部面)·승도지면(繩刀只面)·외북부면(外北部面)≫과 함께 모의하여 본군에 소장을 올렸다. 제사(題辭)에, “한 지역에 소요가 발생하여 먹고 자는 것이 편안하지 않다. 방금 이 일 때문에 향회(鄕會)를 열어서 명령을 내려 경계한 바 있다. 명령을 내리기 전이라도 만약 이러한 폐단이 발생하면 동(洞)에서 힘을 모아 잡아들여서 엄중하게 처치하라”고 하였다.
초 8일 임자 [初八日壬子]
이 때 적성(赤城) ≪예천군의 북쪽 50리 지점에 있다≫접주 권경함(權景咸)이 금곡(金谷) ≪금당실이라고도 하며 예천군의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에 접소를 설치한 뒤에 권순문(權順文)을 끌어다가 접주로 삼고 한창 무리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리고 본소에 통문을 보냈다. 그 내용, “방금 금곡에 포덕(布德)을 하니 사방의 많은 선비들이 한 목소리로 호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통문을 보내니 고을에 있는 참봉(參奉) 박기양(朴琦陽), 영장(營將) 이유태(李裕泰), 선달(先達) 이삼문(李三文)·윤계선(尹啓善) 등 4명을 모두 압송하여 보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퇴치(退致) ≪예천군의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접주 박현성(朴顯聲)이 통문을 보내 구금되어 있는 유천의 동도 7명을 석방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초 9일 계축 [初九日癸丑]
금곡에서 온 통문에 답장을 하기 위해 박기양 등 4명을 불러 모아 함께 의논하여 거취를 결정하였다. 모두들, “죽어도 차마 동도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박기양은, “집강소를 설치한 것은 도적을 막고 삶을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우선 벼 40석과 돈 1,000냥을 군자(軍資)에 보태겠습니다. 그리고 올 가을에 걷는 도조(賭租)를 모두 본소에 맡기고,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머지 3명도 모두 돈과 곡식을 내어 그와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글을 써서 답하기를, “상도(常道)를 지키고 의리를 유지하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큰 도리이다. 아! 근래에 상도가 사라지고 의기(義氣)가 무너져서 서로 능멸하며 다투고 침범하며 포악하게 행동하는 것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 평소에도 본군(本郡)이 약간의 군대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포악한 침입자를 막아서 함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지금 보내온 편지를 살펴보니, 상도를 지키고 의리를 유지하며 백성들에게 덕을 펼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이 과연 널리 구제하고 널리 베풀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면 매우 훌륭한 일이다. 다만 뒷부분에 기록한 4명은 부내(部內)의 사람들이며 또 모두 재산을 넉넉하게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부(四部) 내외 수 만명 백성들의 목숨이 여기에 의지하여 유지되고 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없다면 당초 포악한 자들을 막아서 어려움을 구제하려던 계책도 결국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또 이들은 관사(官司)에서 관할하는 백성들이므로 마음대로 처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쪽에서 말한 대로 압송하여 보낼 수는 없다. 그렇게 이해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라고 하였다.
남부(南部) 청복정(淸福亭)의 최용학(崔用鶴)·안국진(安國辰) 등 7명이 약조를 배반하고 동도로 들어갔다. 그래서 한결같이 조규에 따라 사람을 보내 그들의 집을 헐고 그들을 잡아가두었다.
○ 유천 접주 조성길(趙成吉)이 사통을 보내어 구금되어 있는 유천의 동도 7명을 석방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는다고 답장을 보냈으며 바로 이러한 내용으로 소야에도 사통을 보냈다.
○ 밤 이경(二更, 오후 9~11시)에 북부(北部) 용산(龍山) 사람이 급하게 보고하기를, “상주(尙州) 갈곡(葛谷)의 동도 6~7명이 갑자기 침입하여 노략질을 합니다”라고 하였다. 사람을 보내 구해 주고 3명을 잡아서 가두었다.
○ 밤 삼경(三更, 오후 11~오전 1시)에 북부 귀산(龜山) 사람이 급하게 보고하기를, “화적 수십 명이 각각 무기를 들고 밤을 틈타 노략질을 하고 몽둥이로 때려서 거의 죽을 지경입니다”라고 하였다. 급히 부병 10명과 광천(廣川)의 민정(民丁) 수십 명을 징발하여 달려가서 구하도록 하였다.
초 10일 갑인 [初十日甲寅]
축시(丑時, 오전 1~3시)에 본군의 병사가 적당(賊黨)을 추격하여 감천(甘泉) ≪안동(安東) 땅에 속하며 예천군에서 동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다≫의 경계에 이르자, 적들이 민가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였다. 부병들이 사방을 포위하였으나 적들이 대도(大刀)와 철추(鐵鎚)로 맞서 싸워서 부병들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에 힘이 센 백재봉(白在鳳)·김태운(金太云)·배태산(裵太山)이 곧장 앞으로 치고 들어가서 칼을 쥔 자의 손목을 잡자, 그는 칼을 땅에 떨어뜨렸다. 이어서 그의 상투를 잡고 문 밖으로 던지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묶었다. 삽시간에 모두 11명을 잡고, 그들의 조총·환도·철추 등을 거두어 돌아왔다. 그리고는 곧장 그들에게 따져서 물었더니 그들은 다만, “일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변명할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동인(東人)이다. 너희들이 우리를 죽인 뒤에 어찌 감히 살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격분하였다. 이때 둘러서서 바라보던 부병들 수백여 명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화적을 섬멸하라는 조정의 명령과 감영의 지시가 이미 내렸는데 이와 같은 화적들을 어찌 잠시라도 살려둘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겹겹이 에워싸서 데리고 가서 모래사장에 묻었다. 이날에 군수는 감영(監營)에 보고하였다.
○ 금곡포덕소(金谷布德所)에서 통문을 보내 지난 밤 잡아간 적 11명을 석방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날에 답장을 써서 말하기를, “집강소를 설치한 것은 화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또 순영문(巡營門), 감영으로부터 화적을 초멸하라고 신칙하는 감결을 받고 항상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귀산동의 주민이 급보를 보내와서 병사를 보내 포위하여 적당 11명과 총·칼·철추 등을 포획하였다. 도적질한 흔적이 이미 드러나서 다시 논의할 것이 없었으며 거주지와 성명을 조사하는 것이 불필요하여 당일에 파묻어 죽였다. 지금 보내온 통문을 보건대 그 가운데서 귀접(貴接), 금곡의 도인(道人)이라고 하고 있으나 이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다. 이른바 도인이란 자가 어떻게 밤을 틈타 타인을 겁략할 수가 있단 말인가? 도(道)와 적(賊)은 원래부터 구별이 있으니 그것을 혼돈하여 의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다.
11일 을묘 [十一日乙卯]
소야 접주가 유천 접주 조성길을 압송하고 그 죄안(罪案)을 기록해 보내면서, 이미 떠들썩하게 할안(割案)을 하였으니 마음대로 조치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 금곡에서 통문이 도착하였다. 그 내용에, “방금 저희 접소의 도인 몇 명이 파묻혀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접소의 인원들을 일일이 점고하였더니 빠진 자가 5인이었습니다. 이에 문초할 때 초기(草記)한 성명을 베껴서 통문으로 보내주시면 비교해 보는 자료로 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일에 답장하기를, “도적질한 흔적이 이미 탄로가 났고 죄상이 모두 드러났다. 그래서 애당초 그 거주지와 성명을 조사하지 않았다. 어떻게 서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이해하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감천 도평(道坪) 이종해(李鍾海)가 동생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와서 고하였다. 즉시 다짐(侤音)을 작성해 올리도록 하였다.
그 내용에, “제 동생 정호(正浩)는 나이가 38세로 농사도 짓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으며 잡기장(雜技場)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지난달 7일에 금곡접소에 입도한다고 하였는데 10일 낮에 길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제 동생이 화당 11놈(漢)과 같이 귀산 등지를 침학하다가 도소(都所)에 체포되어 이미 파묻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동기 사이의 정리(情理)에서 그것을 듣고 매우 놀라서 종제 천석(千石)과 백활(白活)을 도소로 보내 바로 분부를 들었습니다. 그 분부에는, ‘네 형이 이번에 화당들과 함께 마을을 침학하여 무기로 사람을 해쳤다’라고 하였습니다. 제 동생을 법대로 정죄(定罪)하였으니 변명할 말은 없습니다. 이미 죽은 시신을 제 종제에게 내어주셨으니 매장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전 영장 이유태가 황소 1마리를 내어 군사들을 위로했으며, 전 참봉 박기양이 벼 40석을 군량미에 보태었다.
12일 병진 [十二日丙辰]
동도들은 화적 11인이 파묻혀 죽은 뒤로 더욱 관청과 대치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리들을 나눠 사방 경계의 시로(市路)를 막아 물샐 틈 없이 지켰으며, 양곡과 땔감을 실은 수레를 보면 곧장 빼앗아 불을 질렀으니, 부중(部中)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 조성길(趙成吉)을 엄하게 곤장을 치게 하고, 북을 치며 시장에서 조리를 돌렸다.
○ 군수가 글을 써서 동도의 무리들에게 포유(布諭)하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마치 그물에 벼리가 있어야 조리(條理)가 있어서 문란하지 않음과 같으며, 농부가 농토에 일하여 농사에 힘써야 가을에 수확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벼리는 사람의 윤상(倫常)이고 농사는 백성들의 대본(大本)이다. 만약 그물에 벼리가 없다면 어떻게 문란하지 않을 수 있으며, 만약 농부가 힘써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어떻게 가을에 수확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풍속을 바로잡아 그 윤상을 밝히고, 농사를 부지런히 하여 그 대본을 중요시한다면 도(道)는 쉽게 밝혀질 것이고 정교(政敎)는 쉽게 행하여질 것이다. 한자(韓子), 한유는, ‘그것으로써 자신을 다스리면 순조롭고 잘되며, 그것으로써 남을 다스리면 사랑하고 공정하게 되며, 그것으로써 마음을 다스리면 평화롭고 공평하게 되며, 그것으로써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면 어떤 경우에도 합당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다.
도가 밝혀지고 정교가 행해지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사랑하고 가족 간에 화목하고 집안이 다스려지고 나라가 태평해지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대령(大嶺), 조령 이남은 본래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전통 있는 선비 집안은 매일 시례(詩禮)의 문장을 송독하며, 초가에 사는 백성들은 매일 농상(農桑)에 종사한다. 의관은 정결하고 문화는 찬란하다. 옛 것을 숭상하고 검소함을 익혀서, 비록 어리석은 백성들이라도 윤상이 중요하고 농공(農工)이 근본이 됨을 대략 이해하고 있다. 그리하여 공자와 맹자의 유풍을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슬프게도 저 어리석은 백성들은 본받아야할 기강의 중요함을 알지 못하고 생산에 힘쓸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농업을 게을리 하고 속임을 일삼으며, 부랑한 행동을 서슴없이 하여 스스로 천 길 구덩이 속으로 빠지니 어찌 애통하고 한심하지 않겠는가?
나는 변변치 못한 재주로 분에 넘치게 수령이 되어 아직 혜택이 100리에 두루 미치지 못하였으니 지방관의 선정(善政)을 어찌 논할 수 있으며, 정교가 한 지역을 교화시키지 못하여 민심이 이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스로 자책하며 밤새도록 자지 못하고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다. 그런데 천만 뜻 밖에 부랑한 난류(亂類)들이 무리를 짓고 작당하여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패악한 행동을 일삼으며 남의 재산을 빼앗으니 원망하는 마음이 길에 가득 차고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 닿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이 흐르고 두려워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지금 저 동인(東人)들의 도는 유(儒)·불(佛)·선(仙)에서 나왔으며, 성(誠)·경(敬)·신(信)을 주장한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나름대로 도를 닦고 의(義)를 행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부랑한 패거리와 행패를 부리는 무리들은 도를 닦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입도(入道)를 가탁하여 제멋대로 행동을 하니 어찌 도를 닦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들 때문에 마을이 텅 비게 되었고 이들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러고서도 나라에 법이 있고 고을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본래 순영문에서 관문(關文)으로 거듭 엄중하게 신칙하여 일일이 잡아들이라고 하였으나 형벌을 시행하여 안정시키는 것은 생명을 존중하며 자연스럽게 교화시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래서 다만 앞으로 습속 고치는 것을 살펴보고, 지금은 잠시 그대로 내버려두며 법령을 밝히려는 뜻에서 이치를 따져서 체문을 내리니, 즉시 접소를 해산하고 각자의 본업으로 돌아가서 더 이상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물에 벼리가 있게 하고 농사가 제대로 되도록 하여 온 경내가 안정되도록 하라”고 하였다.
13일 정사 [十三日丁巳]
조성길과 유천의 동도 7명을 석방하였다.
14일 무오 [十四日戊午]
순영문의 회제(回題)가 도착하였다. 10일에 화적 11명을 파묻어 죽인 일에 관한 것이다.
그 내용에, “도부(到付)하였거니와, 이들 무리가 분명히 화적이라면 각 동(洞)이 힘을 모아 초멸하여도 아까울 것이 없는 통쾌한 일이다. 그러나 부랑한 무리들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비록 그들의 목숨을 빼앗기는 하였으나 또한 애처로운 일이다. 또 방금 별도의 감결이 있었으니 이후로 방수(防守)하는 일을 더욱 철저히 하여 털끝만큼의 잘못도 저지르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소야 접주가 본소에 통문을 보내왔다. 그 내용에, “구금되어 있는 청복정 도인들을 즉시 석방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큰 일이 생길 것이므로 헤아려서 처리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15일 기미 [十五日己未]
내외의 부병을 점고하였다.
○ 소야 접주의 통문이 또 도착하였다.
그 내용에, “도서(道書), 동학의 글와 유서(儒書)는 거의 비슷하지만 당(黨)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가 납니다. 사해(四海)의 안에서 오늘 입도하면 내일은 형제가 되어 포덕하고 수행하며 백성들을 널리 구제하는 것이 본뜻입니다. 그런데 불쌍한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관청의 가렴주구와 이교(吏校)의 토색(討索)과 양반의 토호(土豪)질을 견디기가 힘들어 아침에 저녁을 보전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 개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을 잘 아는 접소의 사람을 선발하여 각 읍을 돌아다니며 기강을 바로 잡고 포악한 행동들을 금지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전무후무하며 또한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들으니 새로 가입한 무뢰배들이 도인을 자칭하며 불의한 짓을 저질러, 귀 읍에서 파묻어 죽였다고 하니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가 있고 없음을 헤아리지 않고 쉽게 사람을 죽였으니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죽이자고 처음 주창한 사람은 사형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또 들으니 귀 읍에서 무리를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선동한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백성을 위하는 본뜻입니까? 가을걷이가 멀지 않은 이때에 어찌 농사를 망칠 근심이 없겠습니까? 도착하는 즉시 읍촌(邑村)에 포유(布諭)하여 예전처럼 편히 지내도록 하고 소요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당일에 답장하여 말하기를, “보내준 통문에서 기강을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말은 옳은 것 같지만 아마도 분수를 넘은 듯하다. 그리고 그 행실을 살펴보면 전혀 말과 부합하지 않으니 매우 한탄스럽다. 몰래 작당을 하여 돈과 재산을 강제로 빼앗고 사사로이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평민들을 모함하고 형벌을 자행하니 이것이 어찌 도를 닦는 일이겠는가? 11명이 죽은 일에 관해서는 이미 지난 번 통문에서 모두 말하였다. 화적무리가 남의 물건을 훔쳤으니 죽이는 것이 당연하다. 더 이상 무엇을 논하겠는가? 저들은 이미 화적의 무리이니 또한 귀 접소의 죄인이 아니겠는가? ‘죄가 있고 없음을 헤아리지 않고 쉽게 사람을 죽였다’라고 한 말은 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화적의 무리를 섬멸하는 것은 국법이 허락한 바이며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죽인 것이니 어떻게 처음으로 주창한 사람을 논할 수 있겠는가? 무리를 불러 모으는 것은 귀 접소에서 한 일이다. 근래에 들으니, 상주(尙州)·함창(咸昌)·용궁(龍宮) 3개 고을과 충주(忠州)의 병사 5,000여 명이 무슨 일 때문인지 산양(山陽) 등지에 모여서 크게 위세를 떨치며 본 읍을 도륙하려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 부(部)의 주민들이 함께 모여서 머리를 싸매고 팔을 걷어붙이고 분격하여 진심으로 지키려고 하였을 따름이지 부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으니 어찌 사람들을 선동한 일이 있었겠는가? 여러 사람이 경비를 서는 것은 바로 만반의 대비를 하기 위한 것이므로 폐지할 수 없다. 이렇게 알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상동(商東) [상주 동접(東接)] 접주의 통문이 도착하였다.
그 내용에, “귀 읍의 청복정 도인 18명은 바로 상공(尙功) ≪상주 공성접(功城接)≫접소에서 수도(受道)한 사람들인데 그 가운데 7명이 귀소에서 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도인인지 몰라서 그렇게 한 것입니까? 더 이상 침해하지 말고 안돈(安頓)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다 보고나서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청복정에서 잡힌 7명은 모두 이미 죄를 자복하여 처벌을 받았으며 또 우리 부중(部中)의 사람들이므로 각박하게 하여 외부 사람들과 불화를 조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즉시 데려 오게 하여 엄격하게 훈계하고 너그럽게 타일러서 차례대로 석방하였다.
그날에 답장하여 말하기를, “청복정의 18명은 귀 접소의 사람들이라고 하나 이미 징치(懲治)하여 귀화하였다. 어찌 책임을 추궁할 리가 있겠는가? 귀 통문에서 말한 대로 안돈시킬 것이다. 이 사람들은 비소(鄙所), 예천의 관할 내에 있으며, 수직(守直)하고 점고를 받는 것을 한결같이 이전의 약조에 따라 시행할 것이며, 귀소의 간섭을 받을 일은 없다. 이렇게 알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16일 경신 [十六日 庚申]
선무사(宣撫使)의 감결(甘結)이 도착하였는데, 윤음(綸音) 1부와 분부(分付) 1부를 내렸다. 즉시 정서(正書)로 베껴서 경내의 가점(街店)에 게시하게 하였다.
그 내용에, “왕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교남(嶠南), 경상도의 많은 선비들과 서민들은 귀담아 들으라. 내가 덕이 부족하여 다스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위에서는 정사가 문란하고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시달리고 있으며, 이웃 나라가 군대를 동원하고 사방 교외에 보루(堡壘)가 허다하게 쌓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불쌍한 나의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으며 무슨 허물이 있는가? 농사짓는 사람들이 생업을 잃고 굶주림에 허덕이는데도 구제하지 못하여 어린이를 안고 늙은이를 부축하며 길에서 연이어 뒹구는구나! 참혹한 모습이 눈앞에 선하여 한밤중에도 자주 일어나니 잠자리가 편치 못하다.
생각건대, 너희들 한 도(道)의 선비와 백성들은 혹은 선현의 후손이며 혹은 전통 있는 가문으로 시례(詩禮)의 교육을 받고 대대로 훌륭한 풍속과 교화를 수립하여 왔다.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천성에 뿌리박고 있으니, 의리를 분명히 밝히고 시국을 잘 살펴서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안정시킬 생각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래에는 듣기에 놀랍게도 한 사람이 나서서 소리치면 백 사람이 따라다니면서 곳곳에서 무리를 모아 스스로 규율을 위반하는 죄과를 범하여 임금에게 근심을 끼치는가?
아! 너희들은 그 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아들과 자손으로 어찌 차마 가학(家學)을 버리고 동도(東徒)에 들어가겠는가? 아! 너희들은 그 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아들과 자손으로 어찌 차마 나라를 배반하고 백성들을 해치겠는가? 나는 물론 너희들이 결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자들이 나라가 어려운 것을 걱정하여 어리석은 충정으로 서로 격분하여 마음이 북받치는 것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는데, 이때에 현명한 수령이나 훌륭한 사대부가 없어서 의리와 시국 형편을 너희들에게 자세하게 깨우쳐 주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서로 이끌고 소란을 피우면서 스스로 잘못에 빠지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아! 너희들은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지금 너희들이 하루 동안 소란을 피우면 나라는 하루의 피해를 받으며 임금에게는 하루의 위험이 생기는데, 너희들은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하는가? 비유하면 자식된 자가 부모에게 급한 병이 있으면 응당 증상에 맞는 약을 쓰고 기운에 맞게 고쳐야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차마 서툰 의원의 독한 약을 써서 도리어 부모의 병을 더하게 하겠는가?
아! 너희들은 임금의 백성이 아닌가? 지금 임금이 간곡하게 효유(曉諭)하는데도 끝내 교화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비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나는 설사 어리석은 자식을 사랑하여 두둔하더라도, 나라에는 사법(司法)이 있으므로 반드시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을 좀먹는 짓을 하는 탐욕스러운 수령이나 교활한 아전들과, 너희들에게 고질적인 폐단이 되는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자들에게는 이미 도신(道臣)과 안핵사(按覈使)에게 명령하여 제거해 버리고 폐지하도록 하였으니, 더 이상 너희들의 근심이 되지 않을 것이다. 각기 생업에 안착하여 밤낮으로 불안해하는 나의 근심을 풀어 주도록 하라. 그러므로 이렇게 교시(敎示)하니 잘 알았으리라 생각하겠다”라고 하였다.
대원위(大院位)께서 분부(分付)하신 내용에, “근래에 우리나라가 나약하여 이웃나라가 군대를 동원하기에 이르렀으나 이는 곧 우리에게 스스로 강해질 것을 권할 따름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20년 동안 병으로 요양하다가 종묘사직과 백성들을 위하여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서 임금을 보호하고 힘써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며 지난날 나라와 백성을 병들게 한 것들을 모두 제거하여 대대적으로 새로운 정치를 펴고자 한다. 이러한 때에 우리 백성들이 시국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한다면 이는 임금의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재촉하는 것이다. 우리 영표(嶺表), 영남의 선비와 백성들은 이를 잘 헤아릴 것으로 생각하여 성심으로 포유(布諭)하니 각자 안정을 찾고 경거망동하지 말면서 우리 조정이 백성들을 어떻게 안정시키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만약 무리를 모아 소요를 일으킨다면 국가의 형벌을 받을 것이니 후회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17일 신유 [十七日辛酉]
글을 지어 청복동(淸福洞) 주민들을 효유(曉諭)하여 말하기를, “동洞 주민 가운데 18명은 약조를 위반하였기 때문에 이미 그들의 집을 부수었다. 귀 동도 뒷날을 경계시키는 취지에서 한 사람 한 사람 효유한다. 그러니 만약 혹 나중에 약조를 어기는 폐단이 있다면 귀 동은 무거운 처벌을 받을 것이니 조심스럽게 행동하여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19일 계해 [十九日癸亥]
금곡(金谷)에서 통문이 도착하였다.
그 내용에,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도(道)의 큰 근원은 하늘(天)에서 나온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도를 닦으며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우선적으로 힘써 수련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방의 백성들을 살펴보면 모두들 연이어 도탄과 불구덩이 속으로 빠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선왕의 백성이 아니며 조종(祖宗)의 신민(臣民)이 아닌 자가 있겠습니까? 어찌하여 말세 이래로 봄이면 악곡에 맞추어 시를 노래하고 여름이면 악곡 없이 시를 낭송하던 곳에서 연맥(燕麥), 귀리으로 굶주림을 면하는 탄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황천(皇天)이 몰래 도우시어 국가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훌륭한 법규를 내리시어 나라를 반석과 같이 안정시켜 오래도록 보전하고 왕업을 영원히 안정시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니 도는 그 자체로 도인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향기가 나는 풀과 악취가 나는 풀을 구별하며, 진(秦)나라와 월(越)나라처럼 봅니까? 마음도 통하지 않고 읍(邑)의 논의되는 상황도 알지 못하면서, 심령(心靈)을 흡족하게 여기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합니까, 불행으로 여겨야합니까? 만약 부랑한 무리들이 도적질을 하였다면 형벌을 가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맹자가 이른바 국인(國人)들이 모두 죽여도 좋다고 말한 뒤에야 죽이라는 성현의 교훈을 따랐다면 애당초 무고하게 뜻밖의 재앙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전(刀筆吏) 가운데 법규를 잘 아는 사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간절히 하늘을 바라보고 크게 탄식하며 삼가 공법(公法)이 흔쾌하게 결단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이러한 어려운 때에 창고가 텅 비어서 공사(公私)가 모두 곤궁합니다. 그런데 가을걷이로 한창 바쁜 때에 간평(看坪)하는 부리(簿吏)들이 아직 오지 않고 면임(面任)의 문첩(文帖)도 아직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허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도 인자하고 현명하게 고을을 다스려야함을 체득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전을 보내어 간평하고 감결에 따라 시행하시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서 봉사하시면 공사(公私)가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일에 답장에 하여 말하기를, “생각건대 금곡은 본읍 중에서도 인물이 많이 나는 지역으로 선현과 석학들이 대대로 이어졌다. 몸을 닦고 집안과 국가를 다스리는 도리와 인의효제(仁義孝悌)의 행실이 계속 이어져 내려왔으며 지금 그 유풍과 여운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니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의거가 다른 곳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지금은 이것이 완전히 뒤바뀌어 사학(邪學)의 근거지가 되었으니 너희들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는 유도(儒道) 속에 완전히 갖추어져 있는데 어떤 도(道)가 유도보다 낫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뜻밖에도 최근에 재물을 빼앗고 백성들을 구타하며,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무기를 훔치며, 왕법(王法)을 벗어나서 분수에 지나치는 행동을 하는 자들이 모두 도인이라고 칭하니 어쩔 수 없이 향기가 나는 풀과 악취가 나는 풀을 구별하고, 진나라와 월나라처럼 견주어 보는 것이다. 부랑한 무리들이 도적질을 하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면 지금의 이른바 화적들은 법에 있어서도 처벌해야 하며 도에 있어서도 처벌해야 한다. 더구나 이들은 밤을 틈타 사람들을 겁략하고 각자 무기를 들고 쉽게 사람을 때려죽이니 적(賊) 중에서도 특히 나쁜 자들이다.
이미 토벌하라는 조정의 명령과 조사하여 체포하라는 순영의 관문이 있었으며, 그 도적들을 잡고 나니 모두들 죽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는 비단 읍인(邑人)들이 죽여도 된다고 한 것일 뿐만 아니라 국인(國人)들이 죽여도 된다고 한 것이다. 어찌 무고하게 뜻밖의 재앙을 당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동학에서도 반드시 이들을 사형에 처하였을 것이니 단지 아전 중에서만 법규를 아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간평과 문첩의 일은 동학의 접소가 각처에 버티고 있어서 여러 달 동안 시끄러웠기 때문에 읍리들은 겁을 먹고 나다니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위에 납부할 뜻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또 상부의 처분이 있으니 차후에 계속하여 시행할 것이다. 근래에는 시로(市路)를 막아 상인들이 통행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사람을 때리고 물건을 불사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행동들은 국가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훌륭한 규율(保安良規) 속에는 틀림없이 들어있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을 반드시 일체 금지하여 온 경내가 평안하게 되도록 하라”고 하였다.
20일 갑자 [二十日甲子]
이때 적의 세력이 나날이 성해지자 예천·안동·의성(義城)에서 동도를 공격하였다. 그 때문에 충청도·강원도·경상도의 각 접소에 통문을 돌려 상주·이정(梨亭)·소야 등지에서 큰 회합을 갖고 장차 읍을 치려고 도모하였다. 그리고 여항(閭巷)의 소접(小接)들은 각자 졸개들을 풀어서 서로 다투어 침학을 일삼았다. 그래서 백성들은 견딜 수가 없어 원통함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하였다. 사송(詞訟)은 모두 소야의 접소로 몰렸으며 관부는 적막하였다. 또 동도의 검찰관(檢察官) 장극원(張克元)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각 읍을 돌아다니며 포악한 자들을 금지한다고 떠들면서 도리어 탐욕스런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그 행장(行裝)과 수행원의 규모가 도백(道伯), 관찰사에 비견되었다. 그가 이르는 곳에서는 그 위세가 호랑이와 같았으며 송사를 처결해 달라고 온 자들이 시장처럼 몰려들었다.
군수가 동도를 막을 일로 향회(鄕會)를 개설하려고 지시하여 일을 잘 아는 향인(鄕人)을 불러 모아 함께 논의를 하였다. 그러나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동도에게 겁을 먹고 또 그들에게 억류되어 아무도 온 자가 없었다. 단지 김신근(金藎根)·박승덕(朴勝德)·반재원(潘在元) 3명만 참석하였다.
21일 을축 [二十一日乙丑]
안동부도총소(安東府都摠所)에 통문을 보내 말하기를, “하늘이 백성들을 태어나게 하고 이충(彝衷), 양심과 충효(忠孝)의 모든 덕목을 내리셨으니 이것을 사도(斯道), 유학라고 합니다. 인류가 멸망하기 이전에는 잠시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것인지 근래에 이른바 동학이라는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 학(學)이 비록 무슨 학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학이라고 말하였다면 전심전력으로 공부를 하고 백성들을 해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 그런데 지금 포악한 행동을 자행하고, 무리를 불러 모으고, 국법을 경멸하고, 양민들을 침학하는 등 갖은 폐단을 자행하고 있으니 언제 안정이 될지 모르겠습니다.이것을 어찌 도를 닦는다(修道)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우리 영남은 동국(東國)의 추로(鄒魯)이며, 또 영저(嶺底), 죽령 아래의 몇몇 고을은 추로 중에서도 문사(汶泗)입니다. 집집마다 시례(詩禮)를 전수하고 사람마다 효우(孝友)를 실천하며 500년 동안 화육(化育)하는 가운데 세상 사람들이 인물의 보고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런데 더러운 기운이 한번 일어나자 이러한 상황을 싹 쓸어버렸으니 매우 개탄스럽습니다. 비읍(鄙邑), 예천이 보유한 약간의 방어설비는 본래 나라가 어지러울 때를 대비하여 미리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인원이 적고 역량이 부족하여 건물을 떠받치는 외나무 기둥이나 수레를 막으려는 사마귀의 앞다리 하나에 불과하니 어떻게 큰 강의 미친 듯한 물결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굳은 의지로 칼날을 밟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우리의 사도(斯道)를 위하여 죽어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생각건대 귀부(貴府), 안동부는 영저에서 으뜸가는 고을입니다. 주민들이 갖추고 있는 인(仁)·용(勇)·충(忠)·의(義)의 덕목은 지난 천년 동안 배양해온 것이며 온 경내가 익혀서 습속으로 자리를 잡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포악한 적을 막고 분개해야 하는 이때에 정연한 기치와 당당한 군대는 틀림없이 여러 고을 중에서 으뜸입니다. 원컨대 수레바퀴와 덧방나무, 입술과 이처럼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는 것에 의지하여 힘을 합치고 뜻을 모아 정도(正道)를 떠받치고 사도(邪道)를 배척하고자 하는데 지금 이 시기를 버려두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이에 모든 절도(節度)와 규약(規約) 및 전략계획을 일일이 알려드리니 이를 모방하여 착오가 없도록 하십시오. 만약 갑자기 위급한 경우가 닥치면 서로 구원함으로써 이곳 영저의 몇몇 읍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각처의 동도들이 상주 산양(山陽)과 본군의 금곡 및 화지(花枝)에서 대회를 열었다. 각각 만여 명이 참가하였는데 장차 고을을 도륙하겠다고 떠들어서 고을 사람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사람을 보내 정탐하게 하였더니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적의 세력이 굉장하며 사방에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습니다. 조총과 창검이 숲처럼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호령소리와 총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질 않았습니다. 촌가의 양식을 겁탈하여 원근이 소란스러우며 피난민들은 온 들판을 메우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관동대접(關東大接)과 상북(商北)·용궁·충경(忠慶)·예천·안동·풍기(豊基)·영천(榮川)·상주·함창·문경(聞慶)·단양(丹陽)·청풍(淸風) 등 13명의 접주가 모두 모여 본소에 통문을 보내왔는데 그 기세가 가공할 만하였다.
그 내용에, “하늘을 공경하고 도를 닦는 것은 학의 종지(宗旨)이고,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입니다. 지금 파묻혀 죽은 10여 명은 이미 우리 도(道)에 들어왔으니 당연히 하늘을 공경하고 덕을 닦는 데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지런히 힘써야 하는데, 마을에서 행패를 부려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천명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도적과 가짜 도적은 그 구분이 명확하며, 제멋대로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니므로 도적질을 하였다고 하는 자들을 실제로 호종적형(怙終賊刑)으로 논죄할 수 없으며 또한 살월인우화(殺越人于貨)로 다스려서도 안됩니다.
아! 저 파묻혀 죽은 사람들의 부모처자의 애통한 울부짖음이 도로에 가득하며 원성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하늘이 어찌 무심할 것이며, 사람이면 누가 불쌍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죽인 자가 사형에 처해지는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법이며 국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일만 늦추면서 예사로 보아 넘겨서 결국 원통함을 풀 날이 없게 된다면 어찌 절박하지 않으며,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반드시 그 거괴 몇 명을 찾아내어 압송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비접(鄙接)에서 알아서 조처를 내리겠습니다.
만약 줄곧 무시하고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긴 것을 다투고 짧은 것을 견주어서 큰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모든 일은 큰 것을 통하여 작은 것을 이루면 순리에 맞고, 작은 것을 통하여 큰 것을 이루면 순리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큰 것을 통하여 작은 것을 이루는 것이 사세가 온당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통문을 보내니 이를 알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당일로 답장을 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만민을 내리실 때는 본래 구별이 없었으니, 도를 닦으면 도인이 되고 도적질을 하면 도적이 된다. 도적 가운데서 어떻게 진짜와 가짜를 억지로 구별한단 말인가? 밤을 틈타 남을 위협하여 돈과 재물을 빼앗거나 손에 무기를 들고 거리낌 없이 사람을 때리는 자들이 진짜 도적인가 가짜도적인가? 지금 조정의 명령과 감영의 관문으로 비류(匪類)들을 초멸하라고 엄히 신칙하였다. 또 이 일은 이미 보고하였으며, 그 제사(題辭)의 지시사항 속에, ‘이 무리들은 확실히 화적이다. 힘을 합하여 토벌한 것은 통쾌한 일이다. 더욱 조심하고 삼가서 털끝만큼의 실수도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니 죽은 자의 부모처자가 어디에 원한을 풀겠는가? 법에 따라 당연히 죽어야 하는데 어찌 원통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한 고을 사람들이 함께 죽였는데 어찌 거괴가 있겠는가? 도(道)와 도(盜)는 본래 구별이 된다. 도(道)는 존경할만하고 도(盜)는 죽여도 된다. 어찌 길고 짧은 것을 비교하는 이치가 있겠는가? 도적질을 하고서 기필코 원통함을 풀려고 한다면 왕장(王章)과 감영의 지시대로 다스릴 것이다. 우리들은 삼가 국법을 지키다가 죽더라도 후회를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달 12일에 보내온 통문에 이미 죽은 사람들은 거론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지금 갑자기 통문을 띄우는 것은 상호신뢰의 취지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생각해보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23일 정묘 [二十三日丁卯]
군수가 동도들이 무리를 모아 읍을 도륙하려 하는데 그 상황이 매우 위급하다는 일을 순영에 보고하였다.
○ 정탐꾼이 와서 보고하기를, “의성·안동에서 패해 도망쳐온 동도들이 화지에서 함께 회합을 갖고 서로 모의하기를, ‘지금 예천고을을 공격하는 데는 다른 방법이 없다. 단지 나누어서 요충을 막아 시로(市路)를 끊어 땔감과 양식이 반입되지 못하도록 하면 한 달이 되지 않아 저들이 굶어죽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충분히 휴식을 취한 우리들이 피곤에 지친 저들을 공격하면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동도는 사방을 에워싸고 시로(市路)를 차단하였다. 북쪽으로는 금곡·은풍(殷豊)·송정(松亭)을 막고, 동쪽으로는 도평(島坪)·감천(甘泉)·석관(石串)을 차단하고, 남쪽으로는 직곡(稷谷), 피실을 차지하고, 서쪽으로는 화지에 주둔하여 본부를 포위하였다. 민심이 흉흉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날마다 머리를 맞대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집강과 여러 집사들이 서로 모의하기를, “지금 헛되이 세월만 보내어 굶주림이 갈수록 심해지면 민심이 이반되어 다시 수습할 수가 없다. 진작 한바탕 전투를 하여 생사를 결판내는 것이 낫다. 우리들이 만약 먼저 겁약함을 보여 저들이 들어와서 공격하도록 한 뒤에 죽기를 각오로 적을 맞이하여 싸운다면 적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이 비록 숫자가 많다고 하지만 모두 오합지졸이니 누가 감히 죽기로 싸우겠는가”라고 하니, 모두들 이 계책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마침내 부병 300여 명을 데리고 화지에서 1리 떨어진 지점으로 나아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적들은 산을 의지하여 요새를 만들었으며 산꼭대기와 평지에 가득 진을 치고 있었는데 몇 천명인지 알 수 없었다. 부병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모두들 무기를 들고 우리를 응대하며 우리에게 말을 걸고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병사들에게 손짓을 하여 조금 앞으로 나아가서 마치 적을 공격하려는 듯하다가 다시 뒤로 물러나며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났다. 그리고 군교(軍校) 2명을 산의 오목한 부분에 남겨두어 적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였다. 그런데 일찌감치 적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적들은 크게 고함을 지르며 이 포로들을 빨리 죽이려고 하였다.
그 가운데 윤치문(尹致文)이란 자가 대도를 뽑아 그를 베는 시늉을 하면 말하기를, “너희들은 부중에서 순찰을 도는 병졸들인데 여기까지 왔다니 매우 가소롭구나. 그러나 지금 잠시 너희들의 목숨을 살려줄 터이니 빨리 돌아가서 너희 군수에게, ‘너희 고을의 무기를 내일 진시(辰時, 오전 7~9시)까지 가져다가 바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이 고을을 도륙할 것이다’라고 전하라”고 하였다.
군교들은 머리를 싸매고 쥐처럼 숨어서 돌아왔다. 이날 외부(外部)의 창수(槍手)를 죄다 모집하여 밤낮으로 지켰다. 군량은 매우 넉넉했으며, 부내의 부유한 사람들이 모두 돈과 곡식을 의연(義捐)하여 군자(軍資)에 보태었다.
24일 무진 [二十四日戊辰]
소야를 정탐하던 사람이 급히 보고하기를, “당일 축시에 화지 회접(會接)에서 소야로 통문을 보내, ‘본일어제 포시(晡時, 오후 3~4시)에 읍인 300여 명이 화지의 접회(接會)를 공격하여 상황이 매우 급박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최맹순은 크게 화를 내며 각 접에 통문을 띄워 기한에 맞추어 모두 모여서 함께 본읍을 공격하라고 하였으니 사태가 매우 위급합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화지의 통문이 또 도착했는데, 그 내용은 매우 거칠고 당돌하게 먼저 공격한 잘못을 거론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임시방편으로 해명을 함으로써 더욱 겁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내용에, “어제 화지동으로부터 급보가 있었는데, 화적의 무리 수백 명이 본동화지에 모여 읍을 도륙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듣고 매우 두렵고 불안하여 본소에서 몇 명을 보내어 정탐하게 하였더니 그들이 보고하기를, ‘안동에서 온 도인들과 본접의 도인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즉시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우리 집강소에서 보낸 2명을 붙잡아서, ‘돌아가서 너희 군수와 공형公兄에게 내일 진시 안으로 너희 고을의 군기를 가져다 바치면 죽음을 면하게 해주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고을을 도륙하고야 말 것이다’라고 크게 꾸짖었다.
이것이 과연 도인의 말인가? 도인이라면 틀림없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매우 괴이하고 의심스럽다. 이에 통문을 보내니 도인인지 화적무리인지를 명백하게 구별하여 회답하여 달라”고 하였다.
군의 주산(主山)인 장군암(將軍巖)과 의충사(毅忠祀) ≪고려 원종(元宗) 때 임지한(林支漢)이 군리(郡吏)의 신분으로 원종을 따라 동도(東都)의 적 최종(崔宗)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벽상삼중대광(壁上三重大匡)의 녹훈(錄勳)을 받았다. 본조(本朝) 선조(宣祖) 때에 군리 황사성(黃士誠)이 난리를 만나 적의 동태를 살피다가 적에게 붙들렸으나 굴복하지 않고 기회를 틈타 도망쳐 와서 나중에 적을 공격하는데 공을 세웠다. 부사(府使)를 역임하였으며 청렴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군민들이 사당을 세워 2공(公)을 함께 제사지내고 있다≫에 제사를 지냈다.
산신에 제사지낸 축문에, “삼가 생각건대, 도솔(兜率)의 남쪽 줄기와 한수(漢水) ≪부(部) 앞의 하천 이름이다≫의 북쪽은 뻗어나간 산세와 펼쳐진 형국이 봉이 춤추고 용이 비상하는 형세입니다. 천년을 내려온 한 지역의 웅진(雄鎭)으로, 관사들은 하늘로 치솟고 민가는 빼곡합니다. 태평한 시대에 백성들이 길러져서, 기풍은 순박하고 습속은 아름답습니다. 으르렁거리는 저 동도들이 때를 타서 제멋대로 날뛰며, 하늘을 업신여기고 신을 모독하며, 분수를 위반하고 법강(法綱)을 무너뜨리며, 군읍(郡邑)을 해치려고 도모하여 위험이 눈앞에 닥쳤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존령(尊靈)께서 날마다 굽어 살피시어, 본체와 작용(体用)이나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을 막론하고, 우리들의 작전을 도와주시고 우리들의 방어를 도와주십시오. 군대를 호령하시고 바람과 구름을 말았다 폈다 하시어, 추악한 무리들을 섬멸하시고 요사한 기운을 확 쓸어버리시어, 옛 터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보호하여 주시면, 향화(香火)가 백년, 천년 동안 이어질 것입니다. 삼가 맑은 술과 포 및 과일을 공경히 신에게 바치니 흠향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사당에 제사지낸 축문에, “삼가 생각건대, 용기와 지략은 세상에서 뛰어나고 충의(忠義)는 높이 하늘에 닿아, 죽백(竹帛)에 이름을 남기고 이정(彝鼎)에 녹훈을 새겼습니다. 영령(英靈) 잠들지 않고 천년토록 모범이 되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지금 동도들의 기세가 아주 성하여, 하늘을 거스르고 신을 업신여기며 포학하고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자행하며, 임금을 책망하고 백성들을 학대하며 무리를 모으고 무기를 탈취하여, 군읍(郡邑)을 해치려고 도모하며 흉악하고 사나운 행동을 자행하니, 조그마한 이 고을에 위험이 눈앞에 닥쳤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존령께서 성대히 하늘을 오르내리시어, 군대를 호령하시고 바람과 구름을 일으키시며, 신검(神劍)을 휘두르시어 요사한 기운을 상쾌하게 쓸어버리시고, 생령들을 보호하시고 군부(郡部)를 안정시키신다면, 향화가 천만년 동안 이어질 것입니다. 삼가 맑은 술과 포, 과일로써 몸을 굽혀 경건하게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안동도총소에 통문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 내용에, “지금 귀읍안동에서 쫓겨 온 동도 수백 명이 한 곳에 모여서 충경(忠慶) 등 각 접과 합세하니 몇 만 명이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먼저 비읍예천의 무기를 빼앗아 격파한 뒤에 장차 귀 읍으로 향할 것이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이 작고 힘없는 읍으로는 적을 상대할 수가 없으며, 본 읍의 위기가 조석(朝夕) 간에 닥쳤습니다. 만약 비읍이 먼저 패한다면 귀부안동도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이에 급히 통문을 보내니, 바라건대 귀읍의 군대를 징발해 즉시 구원하러 보내시어 외로운 성이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25일 기사 [二十五日己巳]
8월 21일에 소야로 보낸 사자(使者)가 돌아오지 않았다. 소문을 들으니 일찍이 구금되어 생사여부를 알 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처자식들의 울부짖음이 가련하였다. 마침내 인편으로 통문을 작성해 보냈다.
그 내용에, “8월 21일에 통문을 작성하고 특별히 사람을 선발하여 보냈는데 아직 보고를 받지 못하였으니 무슨 곡절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지금 들으니, 각 접들이 화지에서 대회를 갖는다고 하니 매우 두렵고 불안하다. 대개 소문이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비소예천 집강소의 사자를 무슨 이유로 보내주지 않는가? 비소와 귀접소야접은 이제까지 믿음을 지켜서 서로 어그러지지 않았다. 그른 말을 잘못 듣고 불화가 생겼으니 매우 한탄스럽다. 사자는 죄가 없으니 즉시 풀어주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안동도총소의 답통(答通)이 도착하였다. 그 내용에, “통문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무뢰하고 법을 지키지 않는 무리들이 동학을 가칭하며 사방에서 출몰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묶어서 때리고 집에 들어가서는 위협하고 빼앗으며 심지어는 남의 무덤을 파헤치니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또한 도로를 가로막으니 백성들이 사는 고을을 보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한 고을 사람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통(統)을 만들고 방어시설을 갖추며 대략 조약를 정하여 불우의 재난을 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고을에 들어와서 못된 짓을 하는 난류(亂類) 몇 명을 이미 잡아다가 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들 무리들이 일직면(一直面)을 침략하였기에, 진영(鎭營)에서 장교와 병졸을 파견하였더니 이미 모두 도주해버려서 한놈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전후의 사실은 이와 같을 뿐입니다. 촌읍(村邑)에서 조약을 정하여 한 지역을 스스로 보전하는데 불과합니다. 어찌 정연한 기치와 당당한 군대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듣건대 귀읍예천의 방어시설은 이미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하니, 난류들을 방어하기가 용이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만약 위급한 일이 생기면 서로 울타리가 되어주었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군수가 위급한 상황 때문에 구원을 요청하는 일로 순영에 보고하였다. 그 내용에, “동도가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대개 지난번의 보고에서 전부 말씀드렸습니다. 본군예천·소야 및 각처의 오합지졸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날로 수천 명씩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격훈련을 하고 화약을 만들고 말 타기와 창술을 훈련하며 사방을 포위하고 있는데 그것이 마치 진양(晉陽)의 물이 불어서 고립된 성이 수몰되려는 것과 같습니다. 본군의 위급함이 조석에 박두하였습니다. 윤음과 감결을 진서(眞書)와 언문(諺文)으로 베껴서 4~5차례 효유하였으나 끝내 잘못을 고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잔약한 고을의 형세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사실대로 첩보(牒報)하오니 빨리 처분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날 화지에서 통문이 두 차례 왔으나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26일 경오 [二十六日庚午]
당시 거의 한달 동안 밤에도 쉬지 않고 읍을 수비하여 사람들이 잠을 자지 못하였다. 시로(市路)가 막힌 지도 근 한 달이나 되어 땔감과 식량이 끊어져서 부민들이 굶주려 서로 바라보며 울부짖는 소리가 진동하였다. 관가에서 쌀을 제공하였으나 역시 역부족이어서 흰죽을 쑤어 공급하기를 10여 일 동안 하자 상하가 모두 흉흉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 안동도총소의 답통이 도착하였다.
그 내용에, “통문의 뜻은 삼가 잘 알았습니다. 난류들은 더욱 창궐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두 고을을 공격할 것이라고 떠들어대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통문의 내용에 따라 비읍안동의 군인과 장정을 징발하여 구원할 계획이므로 그렇게 아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용궁 공형의 문보(文報)가 도착하였는데, 어제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동인(東人) 수천 명이 각각 무기를 지니고 갑자기 고을로 침입하여 창고의 문을 부수고 무기를 탈취하여 갔다고 하였다.
○ 군수가 안동 진영(鎭營)에 구원하러 와달라고 보고하였으며 본소도 편지를 작성하여 밤을 새워가며 도총소(都摠所)에 전달하였다.
27일 신미 [二十七日辛未]
적세(賊勢)가 날로 위급하여 거짓말로 선동하니 인심이 불안해하였으며 하루에 4~5차례나 놀랐다. 몰래 재물을 운반하여 성 밖의 마을로 도피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이들은 남녀노소가 서로 데리고 의지하며 성을 벗어났으며 곡성이 하늘을 울렸다. 집강은 직접 유사들를 데리고 한편으로는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단속하며, 이들과 한마음이 되어 죽기를 각오로 성을 방어하여 함락되지 않도록 하자고 하였다.
○ 음양가(陰陽家)의 설을 알아보았더니, “지금은 왕성한 기운이 서쪽에 있으며 적이 서방에 있다. 이들이 갑자기 쳐들어온다면 적은 왕성한 기운을 타고 있으므로 맞이하여 싸울 수가 없다. 반드시 군사를 매복하여 배후를 끊은 다음 서쪽에서 동쪽으로 공격하여야 승리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날 밤에 총수(銃手) 100여 명을 징발하여 현산(峴山) 옆의 골짜기에 잠복시키고 밤이 새도록 지키면서 살피도록 하였다.
28일 임신 [二十八日壬申]
진시에 희생(犧牲), 제사용 소과 곡식을 풍성하게 차려놓고 다시 장군암과 의충사에 제사를 지냈다.
산신에 제사지낸 축문에, “삼가 생각건대, 우뚝한 산은 사람들이 숭상하는 바입니다. 교활한 저 동도들이 날마다 제멋대로 날뛰면서 해를 욕하고 하늘을 책망하며, 기강을 어지럽히고 법도를 업신여기며, 고립된 성을 포위하여 함락이 목전에 닥쳤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존귀하신 신께서 크게 신병(神兵)을 풀어서, 참창(攙槍), 날카로운 창으로 막으시고 철영(鐵營), 철통같은 병영으로 지키시어, 저 흉괴(兇魁)들을 죽이시고 우리 생령들을 안정시켜 주신다면 향화가 천년 동안 계속되어 영원히 그 은혜에 보답할 것입니다. 삼가 희생과 곡식과 술 등의 여러 음식으로 공경히 제사를 드리오니 흠향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사당에 제사지낸 축문에, “삼가 생각건대, 동도들이 더욱 사나워져서 제멋대로 못된 짓을 하며 기강을 어지럽히고 법도를 업신여기며 하늘을 욕하고 해를 책망하며, 두 지역에 나누어 주둔하며 성읍(城邑)을 함락하려 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영령(英靈)께서 이곳에 내려오셔서 빨리 신령한 힘을 베푸시고 성대하게 신병(神兵)을 풀어서 저 요사한 무리들을 섬멸하시고 다시 백성들을 안정시켜 주신다면 향화가 백년, 천년 이어질 것입니다. 삼가 희생과 술과 곡식 등의 여러 음식으로 공경히 제사를 드리오니 흠향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제사가 끝난 뒤에 부병에게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서북쪽을 향하여 총을 쏘게 하였다. 한참 뒤에 돌아왔다. 퇴치 접주 박현성이 관부에 품목(稟目)하여, “11명을 파묻어 죽인 일의 원통함을 오늘 풀고자 한다. 앞장서서 죽이자고 한 사람 2인을 우선 압송하면 고을과 마을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화지의 도회(都會)에서 통문이 이어서 도착하였다.
그 내용에,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을 해치는 것은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상정이 아닙니다. 500년 동안 왕도(王道)정치가 펼쳐지던 나라에 왜인(倭人)들이 득세를 하여 억조창생이 덕화(德化)를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리의 방기(邦畿)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어떻게 편안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 도중(道中), 동학의 본뜻은 왜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예천 고을의 일은, 읍인들은 도인들이 모이는 것을 의심하고 도인들은 읍인들이 군대를 편성하는 것을 의심한 데서 비롯되었으나, 실제로 죄를 지은 사람은 2사람입니다. 오늘 본읍예천에서 도회를 열고 죄인들을 잡아들인 뒤에 한마음으로 왜를 물리칠 계획입니다. 같은 동토(東土)의 백성들인데도 만약 왜를 물리치려는 뜻이 없다면 하늘 아래에서 당신들이 옳은 것입니까? 도인들의 의(義)가 옳은 것입니까? 도인들은 의병(義兵)입니다. 그렇게 아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날 답장 하여 말하기를,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을 해칠 리는 절대로 없다. 그러나 만약 먼저 피해를 입는다면 어찌 앉아서 피해를 입고만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무기를 빼앗고 무리들을 많이 모아 누구를 해치려고 하는가? 죄를 지은 2명이 누구인지는 어째서 밝히지 않는가? 그들의 이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여 관부에서 조처하도록 하면 된다. 어째서 번거롭게 너희들이 잡아들이려고 하는가? 고을 안에서 도회를 열겠다는 이야기는 한번 시험 삼아 해본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하겠다는 것인가? 왜를 물리치는 일이라면 조정에서 할 일이니 감히 개인적으로 함부로 떠들 수는 없다. 너희들은 어찌 이다지도 무례한가? 끝까지 따져보면 잘못이 누구에게 있겠는가? 이렇게 알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에 퇴치 접주 박현성, 화지 접사(接司) 김노연(金魯淵) 및 그 무리 3명이 본소로 들어와서 말하기를, “오늘 읍에서 도회를 여는 것은 별다른 일이 아니라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것이므로 놀라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집강과 여러 집사들이 큰 소리로 꾸짖으며, “야 이 교활한 놈들아, 어떻게 나를 속이려고 하느냐? 너희들은 몰래 습격하려고 하면서 지금 달콤한 말로 꾸미느냐. 조금 뒤에 너희들의 대군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를 보고나서 너희들을 죽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이들을 가두었다.
얼마 후에 현산≪부의 서쪽 1리 지점에 있다≫의 정찰병이 깃발을 휘두르고 총을 쏘면서 황급하게 보고하기를, “적병 1만여 명이 가득히 몰려오는데 10여 리에 이어져 있으며 고함소리가 땅을 진동합니다”라고 하였다.
상황이 매우 급박하였다. 한편으로는 포병(砲兵)을 징발하고 한편으로는 높은 곳에 올라 상황을 살피려고 포병을 따라 앞 둑으로 달려가니 적은 이미 유정(柳汀) ≪부의 남쪽 1리 지점에 임수(林藪)가 있다≫으로 들어 와서 가득 차 있었으며 부병과는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다. 집강과 여러 집사들은 박현성과 김노연을 좌중에서 칼로 베려고 하였다. 현성이 간청하며 말하기를, “오늘 병사들이 출동한 것은 나의 본뜻이 아닙니다. 잠시 김노연을 인질로 잡아놓고 나를 풀어준다면 먼저 진영으로 돌아가서 아무 일 없이 군사들을 물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만약 믿지 못한다면 유사와 같이 보내어서 내가 결말을 짓는 것을 보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속박을 풀어주고 1~2명의 영리한 유사로 하여금 사자(使者)로 분장하여 무기를 지니고 함께 가서 살펴보도록 하였다. 적진에 도착하자 현성은 급히 몸을 피하여서 보이지 않았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여러 적들은 모두 몰래 총과 창을 지니고, “여기에 온 저 사람들은 누구냐? 우리가 먼저 손을 써서 해치우자”라고 은밀히 말하였다.
유사가 귀가 밝아서 이 이야기를 듣고 급히 달아나서 본진(本陣)으로 돌아왔다. 등 뒤의 적진에서 ‘탕’하고 총성이 크게 들리고 탄환이 번개처럼 귓가를 스쳐 지나가서 하마터면 총에 맞을 뻔하였다. 땅에 바짝 붙어서 기어가니 제방 위에 있던 부병들이 급히 이들을 구하여 돌려보냈다. 그리고 일제히 총을 쏘니 총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삽시간에 부병들이 서정(西亭)의 긴 제방을 에워싸고 양면에서 협공을 하였다. 캄캄한 가운데 단지 유성(流星)같은 불빛만 보이고 우레 같은 소리만 들렸다. 총탄이 떨어지는 숲속에서는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어지럽게 땅으로 떨어졌으며 검은 연기가 하늘에 가득 차서 적과 아군이 구분이 되지 않아 마구 죽였다. 그런데 이전에 미리 사람을 보내어 은밀히 청복동 주민에게 산 위에 횃불을 많이 설치하여 군대가 있는 것으로 위장하고 본진에서 총성이 울리거든 일제히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며 여차여차하여 적병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고 시켰다.
이때가 되자 산 위에서 불빛을 밝히면서 일제히 일어나서 큰소리로, “안동의 구원병 3,000여 명이 올 것이다. 너희 적도들이 어디로 달아나겠는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적병들은 이 소리를 듣고 혼비백산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모두 동남쪽 들판의 논과 못으로 달아났는데 상당수는 못에 빠져 죽었고 나머지는 모두 옷을 버리고 맨몸으로 달아났다. 부병들은 이들을 추격하여 논에서 많이 때려 죽였다. 얼마 후 숲속은 텅 비어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저들의 의관과 총·창·양곡·솥·마필 등을 거둔 것이 이루 셀 수 없었다. 부병들은 고을로 돌아와 관정(官庭)에 들어가 뛰면서 춤을 추었다. 부중의 남녀노소도 모두 눈물을 닦고 웃음을 지으며 서로 축하하였다. 한창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부의 북쪽 부모산(父母山)에서 망을 보던 병사가 총을 쏘고 고함을 지르며, “금곡의 적병 수만 인이 간명현(鳱鳴峴) ≪군의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에서 달려와서 이미 광천사장(廣川沙場) ≪부의 동쪽 2리 지점에 있다≫에 도착하였습니다. 북소리와 호각소리가 하늘을 진동하며 함성이 땅을 울립니다”라고 하였다.
부병들은 급히 춤추던 것을 멈추고 맹렬한 기세로 일어나서 일제히 양천(瀼川) ≪부의 동쪽 1리 지점에 있다≫의 물가로 달려갔다. 이들은 횃불을 전부 끄고 숨소리를 죽이고 서쪽 언덕에서 잠복하였으며, 병사를 나누어 일부는 하류에서 몰래 물을 건너 밭 사이의 풀 속에 잠복하였다. 그러고서 살펴보니 적병들이 모래사장에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북을 치고 호각을 불며 부르고 대답하는 소리가 원근에 진동하였다. 장차 물을 건너 고을을 침범하려고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양쪽에서 총성이 울리며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자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많은 숫자가 죽었다. 한순간에 무너져 흩어져서 우계(愚溪)와 광천의 들판과 산골짜기로 달아났다. 동서를 구분하지 못하고 엎어지고 자빠지며 서로 밟혀서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부병들은 귀산현(龜山峴) ≪부의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까지 추격하여 수십 인을 붙잡아 죽이고 조총·창·칼·금고(金鼓)·나팔·마필 등을 매우 많이 획득하였다. 부병들이 부로 돌아와서 대오를 정비하니 밤은 이미 새벽으로 향하고 있었다.
방곡(坊曲)에 호령을 전하여 각자 안정을 되찾도록 하였다. 부내(部內)로 도망쳐온 자들은 여자들에게 많이 잡혀 죽었다. 이들은 혹은 돌로 치기도 하고 혹은 불로 태우기도 하였다. 김노연은 관사(館舍)에 묶어두었는데 당시 사태가 급박하여 아무도 그를 지키지 않아서 구금을 풀고 달아나버려서 사람들이 모두 분하게 여겼다.
29일 계유 [二十九日癸酉]
부병들이 사방 산의 요해처를 순찰하다가 적들이 설치해 둔 반색(絆索), 올가미와 새끼줄을 많이 찾아내었다. 새벽에 집강과 여러 집사들이 관부에 들어가서 군수를 만나 적을 격파한 일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군수는 크게 기뻐하며 관부의 주방에 명령하여 술을 내려서 마시도록 하였다.
○ 사시에 안동의 구원병 3,031명이 도착하였다. 소를 잡아서 이들을 위로하고 대접하였다.
○ 순영문의 감결이 도착하였다.
그 내용에, “지금 부항감리서(釜港監理署)의 전보를 보니, 함창·태봉(胎峰) 등지의 동도들이 일본군 사관을 해쳤다고 한다. 매우 놀라운 일이다. 즉시 영리한 교졸(校卒)을 보내 소란을 피운 우두머리와 그 추종자들을 체포하고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해산시켜라. 만약 늦어진다면 책임이 돌아갈 것이니 아주 조심히 거행하라. 그리고 인근의 각 읍과 서로 은밀히 연락하여 기회를 포착하는 즉시 잡아들일 것이며 소홀히 하여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일본군 53명과 통역·화병(火兵) 10명이 도착하였다. 이들을 장청(將廳)에 머물러 쉬도록 하면서 읍에서 물품을 제공하였다. 일본인이 말하기를, “이달 26일에 동도가 산양(山陽)에 모여서 일본육군 1명을 살해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토벌하고자 하였는데 뜻밖에도 동도들이 귀군민보군에게 패배를 당하였으니 매우 다행이다. 동도를 공격하고자 한다면 우리들이 선봉에 서서 무찌를 것이니 귀군은 단지 뒤를 따르기만 하라”라고 하였다. 여러 집사들이 말하기를, “동도들은 이미 모두 격파되어 흩어졌으니 공(公)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다”라고 하고는 편히 쉬게 하였다. 잠시 뒤에 부병이 들판에서 적의 잔당과 화약을 짊어지고 가던 자 2명을 잡아서 돌아오자 일본인들은 즉시 그들을 죽이라고 하였다.
○ 오후에 안동의 후군(後軍)과 정원 외에 따라온 500여 명이 또 도착하였다. 당시 본군의 내·외병이 1,500여 명이었고 안동의 병사가 3,500여 명이어서 군량을 공급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관부와 민간의 저축분은 모두 고갈되었다. 그래서 부중의 민가에서 나누어 담당하도록 하여 시정(市井)의 술과 음식이 모두 고갈되기에 이르렀다. 부민들에게 명령을 내려 비축해 둔 보리를 모두 꺼내 군량에 보태도록 하였다.
○ 패하여 흩어진 동도 수천 명이 금곡에서 도회를 갖고 장차 다시 침범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부중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래서 부병과 안동의 병사를 보내어 그들을 공격하였으나 저들은 이미 흩어진 뒤였다. 병사들은 저들이 설치한 접소와 접주의 거처를 불태우고 돌아왔다.
○ 선무사의 행차가 본군에 당도하여 효유문(曉諭文)을 선시(宣示)하였다.
그 내용에, “너희들은 모두 성상(聖上)의 백성들로서 이미 간곡하게 효유하는 윤음(綸音)을 받았으니 비록 돼지·물고기·목석이라도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임금의 명령에 부응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다시 무리들을 불러 모으고 군읍의 무기를 탈취하였으니 장차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국가는 애써 백성들을 살리고자 하여 정성을 다하여 타이르는데 너희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조정의 명령에 대항을 하니 이것이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는가? 황천이 비록 하루 종일 인자함으로 덮고 있으나 때로는 우레와 같은 위엄을 발하기도 하는데, 너희들은 어찌 국가의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그간에 여러 읍에서 화적을 잡아 죽인 것은 바로 그 화적질한 자들을 죽인 것이다.
비록 너희들이 그 위치에 있었더라도 어찌 화적질 한 자들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너희들이 만약 줄곧 관읍(官邑)과 대치한다면 대의(大義)로써 논하여 보면 결코 신하의 도리는 아니다. 너희들 역시 이성(彝性)을 갖추고 있으니 틀림없이 의리가 무엇인지를 알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먼저 명령을 전하니, 가지고 있는 무기를 낱낱이 반환하고 즉시 해산하여 돌아가서 조용히 생업에 종사하여 우리 성상께서 윤교(綸敎)를 내리신 극진한 뜻에 부응하라”고 하였다.
군수가 적을 격파한 사정을 순영에 보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