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토호들과 탐관오리가 제멋대로 평민을 토색하는 일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초야의 힘없는 백성들은 살아갈 수가 없었다. 비록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서울의 대궐이 높고 멀어서 하소연할 수가 없었으니 팔도의 백성들이 이로 인하여 독기를 품은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팔도의 민심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영남(嶺南)은 땅이 넓고 평소에 예의가 바른 고향으로 일컬어졌으며 사람들은 온순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성품은 반듯하다. 강서(江西, 영서지역)는 땅이 넓고 인구는 희박하며 사람들은 품성이 곧고 명찰(明察)하다. 강동(江東, 영동지역)은 산이 많고 들은 협소하며 사람들은 우매하고 분명하지 못하다. 호서(湖西)는 땅이 매우 비옥하고 곡물과 소금이 풍부하나 사람들은 억세고 모질지만 매우 성실하다. 호중(湖中)은 산천이 수려하며 양반이 많고 상민이 적어서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 하고 정직하지 못하다. 호남(湖南)은 땅은 좁고 인구는 많아 공업과 상업에 힘을 쏟지만 백성들은 교활하고 박절하다. 경기(京畿)는 왕도(王都)와 멀지 않아서 백성들은 사치하고 인심이 박하다. 대개 팔도의 민심은 이처럼 일정하지가 않아서 종종 악을 드러내고 괴이함을 일으키는 변고가 발생한다. 이때 하늘이 돕지 않아 재앙이 거듭 발생하였다.
충청도 보은(報恩) 장안촌(長安村, 장내리)에 어떤 자가 있었는데, 성은 최(崔)이고 이름은 재형(在亨, 時亨의 오기)이며 스스로 도호(道號)를 법헌(法憲, 憲은 軒의 오자)이라고 하였다. 어릴 때부터 잡술(雜述)을 익혔으며 13글자를 써서 스스로 동학(東學)이라 칭하였다. 그는 백성들을 현혹하여 수백 수천의 무리를 모으고 마을의 민가에 있는 총과 창을 모두 거두어서 그들 각자가 지니고 장안평(長安坪, 장내리의 들)에 웅거하게 하는 한편 여러 도(道)의 각 군(郡)에 통문(通文)을 돌려 즉시 무리를 모으도록 하였다. 이때 제천(堤川)에 사는 성두환(成斗煥, 煥은 漢의 오자)이 청풍(淸風)에서 무리를 모으고, 전라도 전주(全州)에 사는 전녹두(全祿斗)가 고부(古阜)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정읍(井邑)에 사는 손화중(孫化中)이 장성(長城)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임실(任實)에 사는 김개남(金開南)이 남원(南原)에서 무리를 모으니, 불과 한 달 안에 그 숫자가 각각 수만 수천이 되었다. 이에 충청도와 전라도의 두 도가 대부분 동학에 물이 들었다. 재앙이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시작되어 그 해독이 영남으로 전해져서 경상좌도(慶尙左道)도 나쁜 물이 들었으니, 예천(醴泉)에 사는 최원백(崔元白)과 고준일(高俊一) 등이 상주(尙州), 함창(咸昌), 용궁(龍宮), 문경(聞慶) 등 여러 고을에서 무리들을 모아 수백 수천씩 무리를 이루고서 역시 각처에 웅거하였다.
그들이 말하기를, “지금 이 거사는, 나라 사람들이 원수로 여기는 인물들이 조선에 두루 가득한데도 조정의 신하들이 이를 까마득히 알지 못하고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국가와 백성에 해를 끼쳐서 백성들이 이 때문에 신음하며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일으킨 것”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왜적(倭賊)을 물리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이른바 경전을 송독할 때 머리에는 종이고깔을 쓰고 목에는 105염주를 걸고 손에는 금광(金光)을 잡으며, 돌아다닐 때는 대오를 이루고 각자 총, 창, 몽둥이, 몽치 등의 물건을 지니고 다녔다. 이들은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평민들을 침학하여 강제로 자기들의 무리에 가입시키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것으로 자신들의 기량을 뽐내었으며, 여러 군(郡)에 돌입하여 성을 함락시키는 한편 거리낌 없이 관리들을 제멋대로 죽였다. 이로 인해 충청과 전라의 두 도가 마침내 황량한 쑥대밭이 되었다. 저들이 적과 싸울 때는 상대편의 이목을 현혹하여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허공에 올라가서 돌을 떨어뜨려 적군을 죽이며, 총구에서 물을 나오게 하고, 수족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는 등의 소문을 세상에 와전시켰으며, 저 무지한 백성들은 어리석게도 이를 사실로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길에서 동도(東徒)를 한 명이라도 만나면 승냥이나 이리보다 겁을 내어 먼저 그 앞에서 절을 하고 예를 갖춘 뒤에야 당장의 위급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때 온 나라가 믿을 바는 오직 삼남(三南)이었는데 삼남이 모두 그릇된 말에 물이 들어 백성들이 놀라 동요하며 안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임금께서는 밤낮으로 걱정하고 탄식하여 삼도(三道)에 순무사(巡撫使)를 파송하여 해산하라는 조칙(詔勅)을 거듭 내렸다. 그러나 저들은 끝내 무기를 거두지 않고 갈수록 더욱 날뛰며 각 고을에 수천 수만 명씩 개미떼처럼 모여 있었으니, 조정이 명령을 시행할 수 없고 관부가 정사를 집행할 수 없었다. 저들은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를 쫓아내고 공금을 유용하고 군수물자를 사용하며 허다하게 괴이한 일을 벌였으니, 패륜적인 행동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전녹두가 6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로 돌입하자 감사(監司)와 수령은 관인(官印)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성내의 백성들은 하늘을 부르며 통곡을 하고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데리고 모두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김개남은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성(南原城)을 함락하고 부사(府使)를 죽였으며, 손화중은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태인(泰仁)과 정읍(井邑) 등 2개 고을로 돌진하여 그 지역을 도륙하였다. 이들은 각자 인(印)을 주조하고, 각 고을의 무기와 세곡(稅穀)을 모두 약탈하여 날마다 군량과 마초(馬草)를 먹이면서 웅장한 위용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전녹두의 아장(亞將) 함일남(咸一男)은 군사 3만을 이끌고 공주(公州)로 가서 그곳을 지켰다. 이때 흥성대원군(興聖大院君, 흥선대원군의 오기)이 동도들은 해산하라는 내용으로 삼남에 칙유(布諭)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 조정은 인후(仁厚)한 덕으로 나라를 세워 예의가 풍속을 이루고 대대로 태평을 누렸다. 500년 동안 백성들은 지금까지 전쟁을 겪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까닭인지 근래에 들어 기강이 해이해지고 풍속이 점차 무너져서 방백(方伯)과 수령들의 탐학(貪虐)과, 토호와 강족(强族)들의 무단(武斷)과, 간악한 아전들과 교활한 서리들의 침탈이 나날이 증가하여 끝이 없다. 이 때문에 우리 조종(祖宗)이 보호하는 백성들이 삶을 영위할 수가 없어도 서울의 대궐이 높고 멀어서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동학에 이름을 의탁하고 무리를 모아서 자신들을 보호하며 하루하루 요행히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으니, 그 사정을 살펴보면 참으로 딱하고 애처롭다.
나는 본래 문을 닫고 조용히 지낸 지가 20여 년이 되었다. 이미 늙고 병이 들어 세상 사정을 듣지 않았으나, 근래 국가에 어려움이 많아 병든 몸을 부축하여 입궐하였다. 밖을 바라보면 사방의 수많은 봉수대에서 연기가 가득하고, 안을 돌아보면 나라가 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이 마치 면류관에 매달린 구슬과 같다. 8도를 둘러보면 믿고 의지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곳은 오직 삼남 뿐이다. 이 의지처인 삼남의 태반이 사설(邪說, 동학)에 물이 들어 있다. 처음에는 원통함을 하소연하면서 일어나더니 점차 기세를 타고 움직이며 도처로 뻗어나가 법도를 어기고 분수를 넘어섰다. 그리하여 관아는 정사를 베풀지 못하고 조정은 명령을 내리지 못하며 백성들은 편안히 생업을 영위할 수가 없게 되었다. 너희들은 생각해 보라. 이것이 과연 의거(義擧)인가 패거(悖擧)인가? 지금 동도를 가리켜 모두 말하기를 “난민들을 때려 부수고 섬멸해야 한다”라고 한다. 내가 어찌 차마 난민이라는 죄목을 너희들에게 씌우겠는가? 너희들은 모두 우리 조종(祖宗)께서 길러주신 백성들이다. 내가 그 본성을 따라주지 못하고 그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여 난리에 이르게 하였는데 또 어떻게 차마 무기를 사용하겠는가? 조정에서 이미 삼도(三道)에 사신(使臣)을 파견하여 후덕한 뜻을 널리 알렸는데도 너희들은 끝내 듣지 않았으니 이는 조정과 맞서겠다는 것이다. 이에 난민이라는 죄목을 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국가의 용서란 항상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함께 물에 빠져 죽을 것이 걱정이 되니 또한 슬프고 안타깝지 않겠는가?
이에 우리 성상(聖上)의 뜻을 본받아 마음속의 생각을 서술하여 널리 포고한다. 너희들이 즉시 깨달아서 무기를 버리고 농토로 돌아가면 조금도 벌을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지금은 가을이라 곡식이 익었으니, 부모처자와 함께 배부르게 먹고 즐기면서 길이 태평성대의 백성이 되도록 하라. 재지(才智)가 있으면서 굴복하여 동도에 들어간 자들은 정부(政府)에서 재주에 따라 거두어서 등용할 것이다. 만약 이 충고를 따르지 않고 범법을 자행하며 무리를 지어 형세를 살피면서 해산하지 않는다면 이는 큰 화를 자초하는 것이니 나 또한 안타까워도 도와줄 수가 없다.
나는 금년에 팔순이 다 되었으니 다른 바람은 없다. 나의 생각은 오직 종묘사직과 백성들에게만 쏠려있을 뿐이다. 하늘의 해를 두고 맹세컨대 절대로 너희들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너희들 중에서 세상일에 밝은 사람 3∼4 인이 나에게 와서 직접 이야기를 듣는다면 반드시 얼음이 녹듯이 의심이 풀리며 너희들의 행동이 그릇됨을 알게 될 것이다.
근래에 조정에서 정치를 개혁한다는 소식을 너희들도 들었는가? 과거 백성들의 병폐가 되었던 나쁜 폐단들을 일일이 바로잡고 이웃나라와의 우의를 다져서 평화의 복을 더욱 돈독히 하려고 있다. 이는 모두 나라와 백성을 위하시는 우리 성상의 고심이니 너희들은 그 지극한 뜻에 우러러 부합하여 거짓을 일삼지 말라. 어찌하여 딱하게도 평온하고 즐거운 곳을 버리고 스스로 위험한 곳으로 나아가는가? 아! 오늘은 바로 너희들의 화(禍)와 복(福)이 갈리는 시점이고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시기이다. 나의 말은 여기에서 마친다. 각자 잘 생각하여 후회하지 않도록 특별히 효유하노라.
칙유의 내용이 이렇게 간절하고 지성스러운데 불쌍한 저 동당(東黨)들은 끝내 깨닫지 못하고 갈수록 더욱 날뛰니, 이로 인하여 나라는 어지러워지고 백성은 피폐해져서 장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임금께서 부득이하게 무력을 사용하셔서 8,000명의 군사를 소집하여 충청도와 전라도로 파송하니, 1,000의 병마(兵馬)는 곧장 공주로 내려가고, 2,000의 병마는 전주로 보내도록 명하고, 2,000의 병마는 태인과 정읍으로 파견하고, 1,000의 병사는 곧장 남원으로 향하고, 1,000의 병마는 충주(忠州)와 청풍으로 파송하고, 1,000의 병정은 곧장 죽산(竹山)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남으로 내려간 병정 1,000명이 먼저 공주에 도착하니 동당은 이미 해영(該營)을 차지하여 지키고 또 각각 수천 명을 파견하여 산판(山坂)의 요해처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관군은 왜인(倭人)들에게 군사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변화에 대응하는 전술이 일상적인 병법과는 달랐으나, 동학은 오합지졸로 단지 숫자가 많은 것만 믿었으며 평소 병법에 어두웠다. 그래서 그 고을에서 10여 일 동안 교전을 하였는데, 관군의 기세가 갈수록 더욱 높아져서 적들이 그 예봉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동도는 형세가 궁박함을 알아차리고 그대로 패하여 전주로 달아났다. 사방의 관군은 전주 등지에서 합세하여 진을 치고, 먼저 적의 허실을 탐색한 뒤에 곧장 전주성 밖에 도달하였다. 동도들도 이미 성내에 웅거하면서 여러 날 동안 성문을 열지 않았는데, 그 형세가 마치 철통처럼 단단하였다. 관군이 사방에서 성을 포위하고 서로 대치하면서 관망한 것이 족히 보름은 되었다. 그러자 동도들은 식량과 마초(馬草)가 부족하여 수많은 군졸들이 위급함을 호소하자 급박한 상황 하에서 은밀히 하나의 기이한 계책을 내어 한밤중에 여자 300명을 남문 밖으로 내보냈다. 이때 관군이 동도가 나오는 것으로 알고 일시에 총을 발사하니 총에 맞아 죽은 자가 태반이나 되었다. 이때 북문 밖에서 지키고 있던 관군들이 총성을 듣고 놀라서 남문 밖으로 가서 일제히 남문 밖의 부대와 합세하였다. 그러자 잠깐 사이에 동도들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북문 밖으로 도망쳐 달아나서 북쪽의 산과 들로 성채(城寨)를 옮겼다. 다음날 해가 뜰 때 관군들이 높은 곳에 올라 성내를 바라보니 동당은 이미 밤에 북문으로 달아나 북쪽의 들로 부대를 이동하여 성내는 황량하였으며, 남문 밖의 시체는 모두 여자들이었다.
그 이튿날 첫닭이 울 때 두 부대가 번갈아가며 교전을 하였다. 관군들은 남쪽의 산을 등지고 부대를 원앙진(䲶鴦陣)으로 나누었으며 동도는 북쪽의 산을 등지고 양의진(兩儀陣)으로 나누어 늘어섰다. 두 진영에서 크게 총을 쏘아 총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때는 바로 닭이 세 홰째 울 때였는데 초경(初更) 5점(點)이 되도록 양측의 승부는 막상막하였다. 이튿날 새벽에는 전투가 점차 확대되었다. 이때 관군들이 갔다가 다시 돌아왔으며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동도는 많은 군병들이 단지 앞으로 나아갈 줄 만 알고 물러날 줄은 몰랐으며, 총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며 수많은 군병들이 죽음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러니 관군들이 가진 무기가 비록 뛰어나다고 하지만 어찌 감히 적을 상대할 수 있었겠는가? 신병(神兵)이 토벌하는 것이 아니라면 저들의 공격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때 검은 연기가 사방을 뒤덮으며 총성이 울려 천지가 진동하였다. 관군은 약한 세력으로 강한 적을 상대할 수 없음을 알고 20리 밖으로 달아났다.
이때 유회군(儒會軍)이 나주(羅州) 인근의 고을에 군영을 설치하여 창궐하는 동도들을 토벌하였다. 그러자 동당 수천 명이 그 고을로 돌입하여 성 밖에서 교전을 하였는데, 여러 날 동안 승부를 결정짓지 못하였다. 막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려고 할 때 유병이 기묘한 꾀를 내어 그 고을의 북문 밖에서 동당을 크게 쳐부수니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후로 동도는 감히 경내로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유병 수백 명이 금산(錦山)을 방어하였는데, 동도와 여러 날 동안 전투를 하여 그 고을의 서문 밖에서 동당을 크게 쳐부수어 창과 총에 다친 자가 무려 180여 명에 이르렀다. 그 후에 동도가 그 고을에 벌 떼처럼 모여들자 유군은 중과부적의 형세를 깨닫고 성을 버리고 진영을 옮기니, 그 고을은 결국 함락되었다.
이때 전에 쫓기던 관군이 다시 동도와 한바탕 크게 전투를 벌여 전주(全州)와 고산(高山) 두 고을의 경계에서 동당을 크게 격파하였다. 저들의 패잔병들은 태인의 손화중 부대로 가서 합류하였고, 한편은 남원의 김개남 부대로 가서 합류하였다. 이때는 바로 11월 그믐께였다. 사방의 들에 눈이 가득하고 찬바람이 으스스 불 때였는데, 들에 있는 많은 군병들은 홑옷을 입은 데다 군량과 마초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당하니, 비단 도마 위의 고기 같은 경우처럼 죽음을 면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나가는 마을마다 짐승들을 모조리 죽여서 닭 우는 소리와 개 짓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때 관군은 부대를 나누어서 태인과 남원 두 곳으로 저들의 뒤를 추격하여 모조리 섬멸하였다. 그리고 남원으로 추격을 갔던 관군은 김개남을 사로잡아 장대(將臺)에서 효수하였다.
두 곳에서 패한 동도들은 강진(康津), 해남(海南), 장흥(長興), 보성(寶城) 등의 고을로 도망가면서 성을 함락하고 도처에서 사람들을 죽였다. 관군은 사방에서 그들을 추격하여 만나는 곳마다 무찔렀다. 그런데 이곳은 남도의 가장 끄트머리로 앞에는 큰 바다가 있고 뒤에는 추격하는 병사들이 있었으니 날개가 없다면 전혀 살아날 길이 없었다. 아! 저들 무리의 수령이 여기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니 이것이 운명이던가? 손화중과 전녹두는 모두 관군에게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때 죽산과 충주에 파송되었던 관군은 여러 곳을 모두 함락하였으며, 청풍과 제천(堤川) 등지에서 동도를 크게 무찔렀다. 충청과 전라 두 도는 이 이후로 평온을 되찾았다.
영남은 안의(安義)와 거창(居昌) 두 고을에서 유군을 조직하여 호남의 여러 동당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예천(醴泉) 성내의 백성들은 집강청(執綱廳)을 크게 개설하여 경내의 동도들을 모두 경외로 내쫓았다. 쫓겨난 무리들은 깊은 원한을 품고 용궁(龍宮)과 상주(尙州)의 두 곳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각 고을에 통문을 발송하여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예천으로 돌입하여 성을 함락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3,000명을 고을에서 30리 떨어진 금당곡(金堂谷, 금당실)으로 파송하고 모월 모일에 비밀 통지를 기다려서 호응하도록 하였으며, 4,000명으로 군(郡) 남쪽의 서경평(西京坪)에서 남천평(南川坪)에 걸쳐 진을 쳤다. 저들은 각자 총과 창을 지니고 기세가 등등하였으며, 북과 나팔소리 및 함성으로 인하여 산이 울리고 물이 출렁거렸다. 저들은 자주 격문(檄文)을 돌렸다. 아! 말(斗)만 한 작은 고을이 군사들도 쇠잔한데 갑자기 양면에서 기습공격을 받았으니, 성내의 백성들이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데리고 황급히 달아나는 모습을 글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이때 유군 600여 명이 각자 총을 가지고 고을 아래의 모래사장에서 적과 대치하여 진을 쳤으니 바로 8월 28일 신시(申時, 오후 3∼5시)였다. 먼저 동도의 진영에서 한 차례 총을 쏘니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으며, 이어서 유병의 진영에서도 일제히 총을 쏘았다. 양 진영의 총성으로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전투를 한 차례도 채 겨루기도 전에 이른바 동도들이 일시에 패하여 달아나자 유군 진영의 기세는 갈수록 등등해져서 총성이 끊이지 않았으며 추격을 늦추지 않았다. 동도들은 총탄을 맞고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으며 시체가 구릉을 이루었으나 그 많은 유군들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으니 어찌 하늘이 돕고 신령이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승전고를 울리면서 청소(廳所, 집강소)로 회군하여 병사들에게 크게 음식을 베풀었다. 이때는 날이 이미 저물어서 멀리 있는 사람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갑자기 북쪽에서 징소리와 북소리 및 총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멀리서 들리다가 점차 가까워지자 군중(軍中)이 모두 몹시 놀라 얼굴빛이 질렸다. 즉시 상황을 탐색하게 하였더니 바로 금당곡에 주둔하고 있던 동도들이 막 도착한 것이었다. 유군들을 철저하게 단속하여 재갈을 물고 나아가게 하였더니 동당은 이미 북천(北川) 건너편 모래사장에 주둔하고 있었다. 유군 진영에서는 몰래 명령을 내려 동도의 진영을 포위하여 일제히 총을 쏘게 하자, 그 기세가 마치 번개와 우레 같았다. 동도의 진영에서는 별안간에 뜻밖의 기습을 받고 횃불을 모두 꺼버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총에 맞아 다친 자는 고사하고 서로 밟혀서 죽은 자도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약간의 남은 졸개들은 모두 무너져 흩어져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유군은 또 승전고를 울리며 회군하여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었다. 그 이후로 동도들은 도처에서 토벌되었으며 고을과 마을은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