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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대개 나라의 길조가 날로 혼란해지자 간신들이 조정에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지니지 않고 어질고 능력 있는 자를 질투하며 탐학을 그치지 않았다. 벼슬자리에 사람을 등용할 때는 그 사람됨이 훌륭한가의 여부는 살피지 않고 먼저 그 집안의 재산이 넉넉한가의 여부를 물으며 관직과 작록(爵祿)을 마음대로 농단하였다. 그리하여 뇌물을 써서 관직을 얻을 수 있고 문벌로써 작록을 받을 수 있으며 헛된 이름으로 관위(官位)를 뛰어오를 수가 있게 되었으니, 우리 동방예의지국이 어찌 하여 이런 극단적인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이때에 4명의 간신이 있었다. 박영효(朴永孝, 永은 泳의 오자)는 부마(駙馬)라는 높은 신분으로 금릉위(錦陵尉)에 이르렀고,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在弼, 在는 載의 오자) 등은 관품이 3품에 이르고 대대로 국록을 먹었으니, 임금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은전(恩典)이 매우 크다. 그런데 이들은 ≪결락≫ 마음을 갖고 왜인(倭人)들과 결탁하여 흉계를 품으며, 몰래 그들의 풍속을 숭상하여 왜이(倭夷)의 것들을 모두 터득하고자 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883) 겨울 10월에 기회를 틈 타 왜병과 서로 호응하기로 약속하고 변란을 일으켜 국가를 도모하고자 왜인들을 이끌고 대궐로 들어가서 임금을 협박하고 신하들을 핍박하며 못하는 짓이 없었다. 시퍼런 칼날과 창이 전각(殿閣)에 빽빽하게 늘어섰으며 총과 무기들이 궁정에 나열되어 있었다. 4명의 흉적은 왜인들과 함께 임금을 에워싸고 빨리 명령을 내리도록 다그쳤는데, 그 소리가 궁궐 안을 진동시켰다. 임금께서 한참 동안 탄식하시다가 상황이 궁박하고 힘이 다하였음을 아시고 붓을 들어 먹을 찍으려고 하였다.
이때 시임(時任) 보국(輔國) 조영하(趙永河, 趙寧夏의 오기)가 몇 명의 척신 관료들을 데리고 임금 곁으로 달려들어 경황 중에 오른손으로 임금의 손을 가리면서 간언하여 말하기를, “저들 4명의 흉적과 왜이(倭夷)들이 비록 기회를 타서 이처럼 변란을 일으키기는 하였으나 우리나라의 운수가 아직 만 년이나 남아 있으니 결코 저들의 바람에 따를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왜장(倭將)의 무리들이 큰 소리로 협박하면서 칼로 조영하의 오른팔을 내려쳤다. 이어 왼손으로 임금의 손을 가리자 연이어서 왼팔을 내리쳤다. 역사(力士)와 용부(勇夫)라도 두 팔이 모두 떨어져 나갔으니 쓰러지는 것은 더 이상 논할 것이 못되었다. 그 당당한 충절은 해와 달과 함께 빛날 것이다. 가까이서 모시던 여러 신하들도 모두 칼 아래의 귀신이 되었다. 당시 검은 구름이 사방을 가려서 해와 달이 빛을 잃었으며 원한의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언덕처럼 쌓였다.
그런데 청국 장수 원세개(遠世蓋, 袁世凱의 오기)가 한창 군무에 힘쓰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자신의 군사들을 데리고 대궐 안으로 달려들어 왔다. 그러자 왜병들이 청국 군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한때 대오를 갖추어서 총을 쏘니 화염이 해를 가리고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그러자 원세개는 칼을 휘두르며 총탄을 무릅쓰고 곧장 들어와서 먼저 앞을 가로막는 왜이(倭夷)를 베고, 군병들이 왜병을 향하여 총을 쏘며 뒤따르니 지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한바탕 풍파가 산과 바다를 뒤집을 듯 하였으며, 총탄이 비오는 듯쏟아졌고 연기가 하늘을 메웠다. 어느덧 원세개가 임금 옆으로 다가가자 4명의 흉적과 왜장들이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원세개는 즉시 데리고 온 군병들과 함께 임금을 호위하여 옛 궁궐로 옮겼으니, 그의 용맹과 의기는 옛날의 관운장이라 하더라도 미칠 수가 없을 것이다. 즉시 좌우의 포도청(捕盜廳)과 여러 장신(將臣)들에게 명령을 내려 4명의 흉적 무리를 잡아들이도록 하였으나, 4명의 흉적은 이미 사태가 변하였음을 알아채고 도주하였으므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저들 무리의 생도 등 수백 명을 잡아서 즉시 거리에서 처형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육진(六鎭)에 포교(捕校)를 보내어 4명의 흉적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였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다. 이들 4명의 흉적은 재주가 일반백성들보다 뛰어나고 그 생각이 간교하니 옛날의 장사성(張士成)이라 하더라도 미칠 수가 없을 것이다.
10여 일 뒤에 경상수사(慶尙水使)의 장계(狀啓)를 보니 거기에 이르기를, “삼가 교칙(敎勅)을 받들어 사창미(社倉米) 100석(石)을 김옥균(金玉均) 등에게 지급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저 4명의 흉적들이 밤을 틈타 달아날 때 동래(東萊)를 지나다가 수사(水使)에게 거짓 조서(詔書)를 전달하고 쌀 100석을 얻어서 왜국으로 건너간 것이었다. 아! 저 수사는 천만뜻밖에 간당들이 지은 화에 억울하게 걸려서 금부(禁府, 의금부)에 갇히고 관작을 삭탈당하였으며 감옥에서 죽었다. 이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였던 왜병들은 멀리 남의 나라에 와서 그들의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패망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잠시라도 이곳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즉시 신문(新門) 밖으로 빠져나가 밤낮으로 도망쳐서 인천(仁川)으로 가서 배를 세내어 돌아갔다.
저 왜이들은 자주 조선을 침략하였다. 지난 임진년(壬辰年, 1592)의 침략이 실패한 이후에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서 조선이 어려운 틈을 노려 왕왕 침범하였으며 지금은 4명의 흉적과 함께 부하뇌동하여 조정을 어지럽혔다. 그래서 일단 편리한 때를 기다려서 처벌하기로 하였다. 복식을 바꾸고 공문서의 양식을 고치며 각 진(鎭)을 혁파한 것은 한결같이 저들의 원에 따라 잠시 시행하였다. 그러나 밝은 하늘이 조용히 미워하고 신령이 암암리에 모해하여 저 흉악한 이적(夷狄)이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처럼 패하여 돌아가도록 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884) 5월에 대원위께서 비로소 중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오셨다. 그때 임금께서 백관들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으로 마중을 나가셨으며 기내의 백성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멀리까지 와서 대원위를 맞이하였다. 이들은 멀리서 대원위의 수레를 보고 앞으로 나아가 죽 늘어서서 절을 하였다. 어떤 이는 기뻐서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임금의 기쁨과 대원위의 즐거움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수레가 모화관에서 머물자, 멀리 산천을 바라보니 삼각산(三角山)은 겹겹이 말머리 앞에 우뚝 서서 반갑게 맞이하는 것 같았으며 한강물은 넘실넘실 수레 앞으로 점점 다가오며 역시 따뜻하게 맞이하는 듯하였다.

주석
임금께서 백관들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으로 마중을 나가셨으며 기내의 백성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멀리까지 와서 대원위를 맞이하였다. 흥선대원군은 1885년 8월에 중국에서 돌아왔으며 이때 고종은 남문(南門) 안에서 대원군을 영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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