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조선은 산과 바다의 동쪽 한 구석의 작은 나라지만, 상고 이래로 ≪결락≫ 인의(仁義)를 바탕으로 나라를 세워 예절을 근본으로 삼으며 오륜(五倫)을 숭상하고 삼강(三綱)을 높이 세워 ≪결락≫ 백성들의 풍속은 순박하며 옛 성인과 철인(哲人)의 법도를 모두 체현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천하 만방 가운데서 으뜸인 나라가 조선이라 하였다.
그러나 개국(開國) 491년 현 임금 19년 임오년(壬午年, 1882)에 나라의 운수가 점차 쇠퇴하고 기강이 더욱 무너졌다. 안으로는 간신과 역적들이 생겨나서 정권을 농단하며 나라 일을 도우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밖으로는 탐관오리들이 많아져서 국법을 어기는 것이 극도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연이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정공(正供, 조세)은 기한을 넘기고 창고는 텅 비게 되어, 위로는 백관(百官)에서 아래로는 군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녹봉을 여러 달 동안 지급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수많은 군졸들이 원한을 품고 하루 아침에 난을 일으켰으니, 이는 옛날에 들어보지 못하였던 큰 변고였다.
오영(五營)의 군총(軍摠)들이 사사로이 훈련도감의 병영 내에 모여서 각각 무기를 들고 곧장 궁궐로 돌입하였다. ≪결락≫ 창과 방패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들이 한꺼번에 고함을 지르며 중전(中殿)을 잡으라고 하였는데, 그 소리에 산이 무너지고 땅이 움직이는 듯하였다. 이들의 칼을 맞고 죽은 궁녀가 부지기수였다. 이때 대전 사령(大殿使令) 홍우길(洪佑吉, 홍계훈의 오기)은 타고난 성품이 충직한 자였는데, 중전을 업고 군총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대전 내인(大殿內人)으로 나의 누이이다”라고 하고는 동소문(東小門)으로 탈출하여 몰래 가마꾼을 고용해서 즉시 장호원(長湖院)에 있는 ≪결락≫ 판서(判書) 민두호(閔斗浩, 浩는 鎬의 오자) 집으로 갔다. 그러니 백관과 수많은 궁녀들은 중궁전이 어디로 가셨는지를 까마득히 몰랐다. 군총들은 궁궐 안에서 사흘 밤낮을 으르렁거리고 날뛰었으나 역시 중전의 종적을 알 수가 없었다. 이들은 곧장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여러 척신(戚臣)들의 집으로 가서는 불을 지르며 벽을 부수고 한편으로는 눈에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찔러 죽였다. 그러자 대원위(大院位, 흥선대원군)께서 전하와 협의하여 군총들에게 호령을 내려 그들을 즉시 물러가도록 하였다. 당시의 광경을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당시 군총들의 거사는 전적으로 왕후를 시해하려는 계획이었는데, 이날은 바로 6월 20일이었다.
이때 뜻밖에 중국사신이 와서 황제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대원위를 중국으로 압송하여 갔으니 그 내막이 어떠하였는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또 청국(淸國)의 장수 3인이 각각 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기내(畿內)에 도착하여 동쪽과 남쪽의 두 관왕묘(關王廟) 앞과 훈련도감 내의 여러 곳에 동시에 진을 치고, 한편으로는 오군영(五軍營)을 혁파하고 친군영(親軍營)을 신설해서 병정을 모집하여 날마다 훈련을 시켜 여러 다른 나라들이 감히 도모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영남, 호남, 강서(江西) 등 3도에 관첩(關帖)을 작성하여 보내어 각자가 관할하는 군영에 ≪결락≫ 설치하고 경병(京兵) 중에서 잘 훈련된 자를 몇 명씩 그 군영으로 파송하여 교련시키도록 하였으니, 이 때부터 군사력이 웅장해졌다.
이때 각국의 사람들이 약간의 군사들을 데리고 기내로 왔는데, 서양 제국에서 영미(伶美, 영국과 미국)는 대정동(大貞洞)에 주둔하였으며, 러시아는 신문(新門, 새문안) 안에 주둔하였고, 일본은 남산 아래 진현(陣峴, 진고개)에 주둔하였다. 일본과 청국 두 나라 사람들은 성내의 사방으로 난 길가에 위치한 집을 사서 각자 장사를 하였다. 대개 청국은 우리나라가 300여 년 동안 섬겼던 종주국이지만, 나머지 여러 나라들은 모두 적국이었다. 청국 장수 몇 명이 각처에 주둔하며 각국의 동정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