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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1월[十一月]

초 1일

새벽. 새벽과 밤에 부슬비가 내렸으며 비가 쏟아지다가 그쳤다. 아침 일찍 밥을 먹은 후에 천지가 매우 어두컴컴해졌다. 비가 왔다. 하루 내내 매우 어두웠으며 맑지 않았다. 비가 혹 쏟아졌으며 밤에 바람이 크게 불었다.

초 2일

아침 일찍 바람이 또한 불었다. 본읍 또한 성을 지키기 위해 본동의 백성들을 모집할 때에, 호수(戶首)가 이정신(李正伸)을 데리고 갔다. 종제(從弟) 대신에 간 것이다.

초 3일

조금 추웠다. 날씨가 맑지 않았다. 덕봉(德鳳)이 읍에서 성을 지키다가 날이 저물어 집에 도착하였다.

초 4일

아침 일찍 서리가 하얗게 내려 촉촉하였다. 추운 기운이 점차 일었으며, 종조모가 회갑잔치를 열어 친족마을의 노인들에게 인사했다. 대개 지난 9월이었는데, 생일을 몰라서 이날에 이르러서 잔치를 하였다. 이른 아침이 지나 정동(靜洞)에 가서 집을 지을 만한 터를 살폈다.

초 5일

날씨가 희미했다. 아침이 지나 이용암(李龍菴)과 함께 임천 사기점곡(沙器店谷)에 가서 산의 형세를 즐겼으며, 이윽고 무재산(武才山)의 윗 봉우리에 올라서 사방을 살폈다. 총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곧 나는 세상에 대해 가진 뜻에 느끼는 바가 있어서, 생각하며 앉아 있었다. 구름이 사방으로 이어져 있어서 실로 볼 만하였다. 또한 보광사(普光寺) 옛 터에 내려가서 돌로 된 비석의 명문을 보았더니 이르기를, “고려때 양광도(楊廣道) 안렴사(按廉使) 최현우(崔玄佑) 운운”이라고 써 있었다. 이윽고 보광령(普光嶺)을 넘어 투암(投岩) 주점에 이르러서 송정의 묘암(猫岩)을 살폈더니 100 명에 가까운 도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곧 길을 피해 마거동(麻車洞) 앞을 지나 울암(鬱岩)의 구석에 이르러 아래로 내려가 집에 도착하였다. 밤에 비인접(庇仁接)이 근처 사람들과 함께 상포(上浦)에 진을 치고 있고, 본읍의 수성군 몇 사람이 진의 형세를 보려고 총을 쏘면서 진으로 들어갔는데, 진을 친 도인들이 모두 흩어져 도망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넘어져 읍인들에게 잡힌 자가 20여 명이었고, 그들을 결박하여 읍으로 들어가 가두었으며, 또한 화포 50여, 큰 말 2필을 얻었다고 운운하였다. 나는 이를 듣고 웃었다.

초 6일

구름이 끼었으며 혹 흩어지거나 혹 날씨가 맑았다. 비가 뿌리다가 그쳤으며, 날씨가 좋지 않았다. 밤에 도인들과 일본 병사(倭兵)가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 때문에 어지럽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초 7일

아침 일찍 날씨가 희미했으며, 서리가 끼어 습하였다. 나는 새 솜옷을 입었다. 오시에 본읍의 수성군이 야인(野仁)에 들어온다고 운운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선동의 처갓집으로 피해 머물러 잠을 잤다. 밤에 석롱(石聾)·소죽(少竹)이 모였으며, 곧 잠을 잤다. 해질 무렵과 오전에는 날씨가 맑았다. 팔충곡(八忠谷)에 갔을 때 시 4구(句)를 읊었다.

초 8일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봉규(鳳圭)와 함께 놀았다. 아침 일찍 서리가 내려 습하였다. 밤에 비가 뿌렸으며, 구름이 짙어 어두웠다. 잠깐 동안 구름이 걷히고 비가 그쳤다. 석롱의 집에 잠시 모였다가 머물러 잤다.

초 9일

양촌(陽村)에 가서 경원(慶元)을 만나 세상의 혼란에 대해 이야기했다. 홍산 현감 김병대(金炳大)가 그 정치가 어질고 밝으며 청렴하고 결백하였으므로, 모든 백성들이 “부지런하다”라고 칭송하였다. 세 번을 가서야 밤에 김몽암(金夢岩)을 만났다. 이름은 필제(弼濟)이며, 자는 여량(汝良)이다. 세상에서 학자로 부르던 사람이다. 밤에 세상의 일을 말했는데 몽암이 말하기를, “마땅히 마음을 바르게 하고, 본분을 지켜야 한다”라고 운운하였다. 음촌(陰村)으로 돌아와서 머물러 잠을 잤다. 밤에 석롱·소죽과 작은 모임을 갖고, 처갓집에서 머물러 잠을 잤다. 하루 내내 매우 맑았다. 저녁에 소죽의 집에서 밥을 먹었다.

초 10일

아침 일찍 서리가 끼고 습하였다. 김제철(金濟喆)[자는 중길(重吉)이다.]씨와 함께 세상의 일을 이야기했다. 오후에 선동에서 집으로 올 때 먼저 지석리(支石里)에 들려서 손문수(孫文秀)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집에 도착했다. 해질 무렵에 정동 앞에 이르러서 이용암을 만나서 말하기를, “이학용(李學容)이 유회(儒會)에 들어가서 도인을 해칠 뜻이 있다고 하므로, 원당도인(元堂道人)이 잡아가서 죄를 다스렸다”라고 운운하였다. 그 때문에 작별하고 선동에서 고양이 1마리를 얻어서 왔는데, 김필국(金弼國)의 집에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1일

새벽 밤. 아침 일찍 날씨가 맑았다. 요곡에 가서 족숙인 경구(警九)·순팔(順八)씨와 더불어 서로 이야기했다. 이때 이모의 아이가 와서 말하기를, “지금 집의 재산과 의복이 모두 다른 곳에 숨겨져 있으니, 도적들보다 늦게 와서는 안 된다”라고 운운했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돌아왔다. 날씨가 조금 맑았으며 밤에는 달빛이 있었다. 도인들 1,000여 명이 탑리(塔里)에 진을 치고 있으며, 내일 한산성(韓山城)을 함락시키려 한다고 운운하는 것을 들었다. 마을 백성들이 동요하였다.

12일

아침 일찍 날씨가 매우 어두웠고 바람이 혹 불기도 했다. 이른 아침 전에 도인 1,000여 명의 호남접이 야인(野仁)의 앞길을 빨리 달려갔다. 나는 요곡에 갔는데, 친족 아낙네들이 모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날이 희미하고 바람이 불었다. 다시 돌아와 신곡 뒷산의 윗 봉우리에 올라서 보았더니, 과연 이들 도인들이 성을 함락시키려고 총을 쏘아 불빛이 하늘을 찌르고 집들이 모두 타버려서 오랫동안 쌀쌀하고 매서운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때 수성군과 읍내 사람들이 사방으로 도망쳐서 세상이 크게 혼란함을 또한 알 수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으니, 도인들이 집을 태우고 성을 함락시킨 후 종동(宗洞) 앞으로 행진하였고, 이윽고 진을 치고 점심밥을 먹었다고 운운하였다. 본읍은 모두 타버렸으며, 호남의 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은 것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해가 저물자 신성포(新成浦)를 건너갔다고 운운하였다. 땅거미가 질 무렵 칠산(七山)의 도인 4∼5 명이 총을 쏘면서 본 마을에 들어왔으며, 집과 마을 안의 소와 돼지를 뒤지고 갔다. 또한 우리 집에도 들어와 뒤졌으며, 돼지를 보자 총으로 때렸으나 돼지가 소리를 내면서 도망하자 저들이 잡아가지 못하였다. 이날 하루 내내 날씨가 희미하고 바람이 불어 좋지 않았다. 밤에 가랑비가 오다가 그쳤으며, 밤의 기운이 좋지 않았다.

13일

새벽. 아침 일찍 날씨가 매우 어두웠으며, 바람이 혹 불기도 하고 비가 쏟아지는 것이 이슬과 같아서 실로 비가 오는 것 같지 않았다. 오후에 바람이 크게 불었다. 밤이 되자 가락암에 도인 수천 명이 진을 쳤다. 이른 밤에 상(喪)을 당한 홍산 선동의 나병하(羅炳夏)[자는 건영(建永)이다.]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머물러 잠을 자고 갔다. 다음 날 가락암 도인들이 혹 원산에 들어가서 폐단을 일으켰으며, 가양(加陽)의 도접인(道接人) 또한 요곡에 들어가서 폐단을 일으켰다고 운운하는 것을 들었다. 오현(烏峴)에 올랐다.

14일

오현에 올랐다. 어제 밤에 진을 친 도인들이 나교(羅橋)의 골짜기 경계로 옮겼으며, 해질 무렵 칠산접(七山接)이 근처 접의 수천 명과 함께 또한 가락암에 진을 쳐서 시끄러웠으며 평온하지 않았다. 하루 내내 날씨가 맑았다. 날씨가 맑은 것이 봄 날씨와 같았다.

15일

사시에 요곡에 가서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하루 내내 날씨가 따스하여 마치 봄과 같았다. 하늘의 뜻이 또한 도인들이 진을 치는 것을 돕는다고 사람들 모두가 운운하였다. 도인 수천 명이 가락암에 진을 쳤다. 하루 내내 시끄러웠다. 해질 무렵 1진이 이동하여 사곡으로 향하는 길로 갔으며, 나교 안으로 간다고 운운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1진은 남아 있다가 다시 옮겨 다리에 진을 쳤다. 나는 수차례 오현에 올라 진의 형세를 살폈다.
해질 무렵 오현에 올라서 바라본즉 색깔을 띤 구름이 공주 계룡산(鷄龍山)의 경계에 닿아 있었다.

16일

하루 내내 날씨가 맑았다. 해질 무렵에 도인 수천 명이 사곡 앞에서 북을 두드리며 원당(元堂)으로 갔다. 대개 어제 나교접(羅橋接)에 진을 친 것이다. 밤에 본 마을을 지키고 있었는데, 삼경에 전해오는 소리를 들은 내용 중에 도적 수천 명이 각기 나교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마을 안이 모두 시끄러웠고 혹 재산을 뒷산으로 옮긴다는 자도 있었으며, 또한 우리 집도 그랬다. 닭이 운 후에 들으니 원당접이 모두 나교에 진을 쳤다고 하였다. 도적들이 마을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본 마을은 비어졌다. 세상을 놀라게 하고 거짓말이 많아서 이에 말을 믿을 수 없으나, 이에 대해서는 기대할 만하다. 이른 밤에 눈이 왔으며, 혹 연이어 오기도 했다. 삼경에 달이 높이 떴다.

17일

아침 일찍 구름이 끼어 어두웠다. 아침이 지난 후 읍내에 가서 호적창고를 찾아서 열람했는데, 이에 건륭(乾隆·)가경(嘉慶 )연간 이하의 것들이었다. 배벽소(裵碧沼)를 만나 문루에 올라서 보았더니, 가옥이 연이어 불태워졌으며, 내외로 함께 둘러 싸여 모두 파괴되었다. 답답하여 슬픈 생각이 들었다. 돌아와서 사곡에 들어가 윤호운(尹湖雲)을 만났다. 호운이 말하기를, “너의 좁은 방 1간을 빌려 주면, 나는 마땅히 화를 피하여 옮겨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집에 가서 아버지와 상의하여 대답하겠다”라고 하고 왔다. 하루 내내 매우 어둡고 밝지 않았다.

18일

새벽. 날씨가 맑았다. 바람이 불어서 춥고 시렸다. 나의 처 김씨가 홍산 선동에서 부친을 뵙고 싶어 하여, 갈 때에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갔다. 바람이 불어서 길 위가 춥고 시렸으며 구름이 끼어 혹 하늘에 닿아서 날이 희미하였다. 해질 무렵 아버지께서 배가 조금 편찮으시다고 해서 오지 못하였다. 그래서 선동에 머물러 잤다. 밤에 도사(都事)의 집에 가서 더불어 이야기하고 왔다. 달빛이 매우 밝았다.

19일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아침 일찍 밥을 먹은 후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집에 도착했다. 들으니, 어제 밤에 처 할아버지 도정(都正) 어른이 와서 잠을 주무시고 갔다고 운운하였다.

20일

아침 일찍 갑자기 추워진 것이 어제와 같았다. 하루 내내 날이 희미하였다. 사곡에 가서 호운(湖雲)과 만송(晩松)을 만났다. 오시에 이승하(李承夏)[청사(晴沙)의 아들이다.]와 함께 왔다. 집에 와서 이야기를 한 후 작별하였다. 이윽고 정토산(靜士山)에서 약을 캤다. 집으로 내려가서 들으니, 본읍에 유회(儒會)가 있어서 장차 야인(野仁)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운운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행장을 꾸려서 땅거미가 질 무렵 집을 떠나 용동으로 들어갔다. 이종환(李鍾煥)의 집에서 머물러 잠을 잤다. 도인들이 서천성(舒川城)을 함락하고 경병(京兵)을 만나서 오히려 패주하였다고 들었다. 이날 밤 눈이 처음부터 크게 와서 시를 읊었다.

21일

이른 아침 이후 용동에서 눈을 밟고 집에 도착하였다. 이윽고 덕봉(德鳳)과 응학(應鶴)을 불러서 책농(冊籠)과 보궤(譜几)를 짊어지고 선미로 들어갔다. 정문효(鄭文孝)와 박성우(朴聖瑀)의 집에 놓아두었으며, 나는 선동에 도착하였다. 바람이 불고 눈이 와서 춥고 시려서 사람들이 더운 입김을 절로 불었다. 처가 집에서 머물러 잤다.

22일

하루 내내 춥고 시렸다. 밤에 일본군사 50 명이 홍산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인심이 조금 흔들렸으며, 모두가 말하기를, “다만 이 고을 수령인 김병대(金炳大)의 선정을 믿는다”라고 하였다. 선동에서 재차 잠을 잤다.

23일

하루 내내 춥고 시렸다. ‘화계십경(花溪拾景)’을 그렸다. 박의서(朴儀瑞)와 함께 화제(畵題, 그림 설명글)를 썼다. 땅거미가 질 무렵 종형 응기(應基)가 용동에서 선동에 도착하였다. 나와 함께 잠을 잤다.

24일

하루 내내 흐리고 추웠다. 이때의 혼란한 일을 들은 것이 1∼2가지가 아니어서 모두 기록할 수 없다. 또한 선동에서 나흘째 잠을 잤다.

25일

날씨가 맑았다. 혹 흐리기도 하였으며 아침이 지나 응학·덕봉이 선동에 도착하였다. 나는 집의 소식을 자세히 물었다. 덕봉이 말하기를, “어제 본읍 사람 20∼30 명이 야인리에 들어와서 여러 마을의 집들을 모두 뒤졌으며, 또한 원산 임정만(林正萬)을 데리고 갔는데 죽었다고 한다”라고 운운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다만 우리 집 안마당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야헌 선생이 어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고 한다. 나는 이를 듣고 개탄을 마지않았다. 또한 선동에서 닷새째 잠을 잤다.

26일

동지이다. 구름이 많이 끼었다. 날이 조금 맑았으며 아침이 지나서 할아버지 야헌 어른에게 문안을 하는 편지를 써서 덕봉에게 부쳐서 보냈다. 오후에 삼종(三從)인 의경(儀敬)과 이화연(李花然)이 와서 선동에 있는 처가에 들어갔다. 화연이 말하기를, “경병(京兵)이 어제 모두 남포(藍浦)로 갔다”라고 운운하였다. 잠깐 동안 있다가 삼종인 의경과 이화연이 함께 홍산의 읍 경계로 갔다. 선동에서 엿새째 잠을 잤다.

27일

새벽. 아침 일찍 구름이 끼어 매우 어두웠다. 날이 맑지 않고 산 아지랑이와 바다 습기가 계속되어 날이 희미하였다. 나는 선동에서 아침 일찍 일정보다 늦게 출발하였다. 종형인 응학이 함께 왔다.
선미에 들어가서 문효(文孝)의 집에서 책궤(冊几)를 찾아 돌아왔다. 용동의 최화엽(崔華曄)의 집에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살펴보니 과연 난을 겪은 마을다웠다. 쓸쓸한 모습을 금할 수 없었다. 밤에 야인의 우리 집에서 잤다.

28일

아침 일찍 구름이 끼어 흐릿하였다. 비로소 경태(慶泰)의 집에서 교지(敎旨) 4장을 찾아서 우리 집에 숨겨두었다. 야인에서 선동으로 가는데 날이 점차 맑아졌다. 이보다 앞서 선동으로 갈 때에 태봉(胎封)에 이르러서 산에 올라 송공(宋公)의 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청리(靑里)를 지나면서 시를 읊었다. 선동(仙洞)에 들어갔으며, 처가 집에서 머물러 잤다.

29일

새벽. 아침 일찍 크게 안개가 일어서 매우 어두웠다. 오후에 성북의 아버지께서 임천 봉곡(鳳谷)에서 선동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말을 들으니 “남포(藍浦)의 경병(京兵)들이 어제 지호를 건넜다”라고 운운하였다. 다시 잠을 잤다.

30일

어제 석롱의 집에서 서로 어울려 놀면서 문을 나와서 살펴보니, 크게 안개가 일어서 가까운 곳을 분별하기 힘들었다. 오늘 아침이 지난 후에도 똑같이 매우 어둡다. 이른 아침 이후 점차 맑아졌다. 오후에 석롱 어른이 비로소 『삼재편(三才篇)』을 썼다. 밤에 이복룡(李福龍)과 함께 놀았다. 밤에 빗소리를 들었다. 석댁(石宅)에서 사흘째 잠을 잤다.

주석
한산성(韓山城)을 함락 충청 전라 연합농민군이 한산과 서천의 관아를 점령했을 때 공주전투에 참여했던 경리청 군사를 이끌고 온 서산군수 성하영과 일본군 소대 병력이 임천 등지로 진출해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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