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서 [請願書]
전라북도 도내 유생들
청원인(請願人) 고경주(高敬柱) 나이
정해붕(鄭海鵬) 나이
이종렬(李鍾烈) 나이
청원인들은 모두 외진 곳의 볼품없는 사람으로 우리 성조(聖朝)의 오백년간의 융성하고 화평한 은택을 입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충의를 떨치고 높이는 것은 신하의 본디 임무이고, 정학을 지키고 사설을 물리치는 것은 유가의 맥락(脈絡)입니다. 태인군의 선비 김기술은 가계(家系)가 강진으로 충민공(忠敏公) 휘(諱) 회련(懷鍊)의 17대손이고,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킨 원모당(遠慕堂) 휘 후진(後進)의 11대손이며 함께 창의(倡義)한 췌세공(贅世公) 휘 정(濎)의 9대손입니다. 여러 대에 절친 충훈(忠勳)의 후예로 본래 충의와 큰 절개를 가지고 있고, 사람이 지녀야 할 떳떳한 도리를 지니고 있어 열성조(列聖朝)의 하늘과 같은 성은을 잊지 않았습니다. 세분 선조의 대대로 돈독히 한 충정을 조금이나마 갚으려는 마음이었습니다.
불행히도 1894년 4월에 본도에서 소요가 크게 일어났는데 그 광경을 일일이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 무리가 고부에 모인 날에 감영의 완군이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성이 있는지라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여 집안의 부형(父兄)과 자질들을 모두 모으고 의병을 일으킬 것을 말했더니 주저없이 온 집안이 흔쾌히 응낙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노(家奴)로 하여금 본면(本面), 내면의 유상대에서 뿔피리를 불게 하여 크게 일개 면민을 모았는데, 한동네에 수천 명이 일제히 늘어섰습니다. 의병을 일으켜 자원하여 나가자는 뜻을 말했더니, 원근의 친족 70여 명과 각성(各姓) 50여 명이 마치 한 입에서 나오듯이 의기가 당당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제가 칼을 뽑아 팔을 베고 그 살점을 들어 서약하고 피를 마시며 맹세했습니다.
제가 앞장서서 함께 창의한 김찬규·이봉선·송정회·권송호 등과 바로 관아로 들어가 자원할 것을 밝혔고, 회소(會所)에서 몇 백 명이 이름을 적어 관에 아뢰었습니다. 본읍(本邑), 태인현의 수령 등이 기뻐하며 크게 칭찬하고 말·총·창·칼 등을 내주어 당일 출발하였고, 후군(後軍) 100여 명은 군령에 따라 다음 날 출발하겠다는 다짐을 올렸습니다.
저희들이 황토현의 진중에 바로 들어갔는데, 이미 새벽이 되어 모든 군사들이 잠을 자고 있어서 군소(軍所), 진중에 이름을 신고하지 못했습니다. 해가 뜨지 않는 새벽에 적병이 뒤에서 공격하여 손발을 쓰지 못했고 갑자기 예측하지 못한 변고를 당하여 칼을 뽑아 죽으려고 했으나 훗날 기회가 있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구해 피신하고자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겨우 경계를 벗어나니 후군도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의 패배를 말하고 손을 잡고 통곡하니 하늘과 땅이 안개가 낀 것 같았고 산과 내가 우는 것 같았습니다. 슬프고 원통하여 그 망극함을 어찌 말로 하겠습니까? 집에 돌아온 뒤에 얼마 있지 않아, 아! 저 도인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길에 늘어서고 스스로 접주나 대장을 칭하는 자들을 이루 셀 수가 없었습니다.
입도(入道)하지 않는 자는 속인(俗人)이라 하고, 바른 말을 하는 자는 도를 훼손한다고 하여 위협하고 보복하기를 마치 풀을 베는 듯이 하니 하물며 창의한 김기술은 어떠하겠습니까? 남북의 비류들이 날마다 와서 때때로 침범하여 그 예봉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처자와 조카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숨은 지가 7~8개월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가산과 집기들은 흩어져서 남지 않은 것은 말할 필요가 없으나 김기술의 종제와 일가붙이를 아, 저 비도들이 그들의 진영으로 잡아가서 그 형구(刑具)에 당한 것을 말과 글로 다하기가 어려우나 그 매우 원통함을 호소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곤경에 처한 새가 그물에서 풀려나고 목마른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처럼 다행히 천운(天運)의 순환을 만나고 임금께서 측은하게 여기시어 특별히 양호위무사순상 이공(李公)·친군심영병방 황공(黃公)·순무영좌선봉 이공(李公)·우선봉(右先鋒) 이공(李公)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적을 토벌하게 하여 완영(完營)에 행군하였습니다. 그래서 김기술은 지난 날에 팔을 베고 적에게 나아가며 맹세했던 마음을 오늘 다시 일으켜서 위무사합하께 나아가 원통함을 호소하였습니다.
제교(題敎)에, “공은 이루지 못했으나 의기는 가상한 일”라고 하였고, 배제(背題)에, “말·총·창·칼 등은 관의 물건이니 바로 본현에 반납하고 성책(成冊)하여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친군병소(親軍兵所)에 호소하였더니, 제교에, “피를 마시며 함께 맹세하는 것이 어찌 옛날만 아름답겠는가? 더욱이 김기술은 원래 충신의 후손으로 특별히 충심을 가지고 의기를 내어 적을 토벌하였으니 매우 가상하다. 그리고 이 혈서를 보니 그것에 감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이 나게한다. 적을 토벌하는 때에 관군과 힘을 합하여 함께 도모했으니 일은 절반이루었지만 공은 갑절이나 될 것이니 관과 민을 막론하고 이것을 알게 하여 특별히 보호하라. 길을 다닐 때에도 이것에 준거하여 침탈하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본관에 호소하니, 제교(題敎)에, “의병을 일으켜 비도를 토벌한 것은 충성에서 나왔다. 원모당의 후예로서 바른 사람일 것이다. 감영에서 이미 실상을 알았으니 조만간에 반드시 공을 드러내는 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창의한 약장 황기환·김직술·양억 등이 피를 마시고 함께 맹세하며 약조한 100명의 소장(訴狀)을 친군병소(親軍兵所)에 바치니, 그 제교에 “이 사람들의 충의는 탁월하여 미치기 어렵다. 아직 초야에 묻혀있어 이것이 애석하지만 심영병방(沁營兵房)과 같은 힘으로는 풀어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본관에게 호소하니, 제교에, “100명의 동맹은 참으로 금석(金石)을 뚫을 만하다. 소장을 보고나니 나도 모르게 경탄하였다. 더욱 충의에 힘써서 지난 날의 공을 무너뜨리지 않았으니 실로 여러 유생들에게 신망이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전후의 제교를 받들고 한 조각의 충심을 더욱 돈독히 하여 태인 고현면 동각에 창의토포소를 설치하였습니다. 말·총·창·칼 등을 위무소(慰撫所)에 반납하였고, 외읍(外邑) 민포의 작폐를 금지하여 조금도 민간에 걱정을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순영문(巡營門)에서 돈 80냥을 상으로 하사하였고, 감결(甘結)을 내려주었습니다. 또 친군영에서는 말 1필·칼 1자루·포 1자루를 상으로 주었습니다. 그 충성이 국가에 미치고 공적이 민간에 더해진 것은 세상에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7~8년이 지난 지금에는 이들의 공적이 사라져버렸으니, 사람이 지닌 도리에 격발하여 차마 침묵할 수 없어 사실에 근거하여 본도 관찰부에 호소합니다.
제지(題旨)에, “학이 울어 소리를 들었으니 물러가서 기다리라”라고 하셨는데, 이에 송구함을 무릅쓰고 호소하니 살펴보신 뒤에 대궐에 상주하여 이 필부(匹夫)로 하여금 충성을 발휘하고 의를 높인 행적으로 포상의 은전을 받게하여 환동팔역(環東八域), 우리나라이 보고 듣고서 밝은 하늘 아래에서 춤추게 하여 주시기를 모두 바라고 또 바랍니다. 이전의 글도 첨부했습니다.
1901년 5월 일
군부대신(軍部大臣) 각하
고경주(高敬柱)· 정해붕(鄭海鵬)· 이종렬(李鍾烈)· 유하상(柳夏相)· 안중휘(安仲輝) ·박종학(朴鍾鶴)· 조병선(曺秉善)· 오도원(吳道源)· 김영중(金榮中)· 박정양(朴鼎陽) ·이범구(李範九)· 윤삼하(尹三夏)· 김용학(金用鶴)· 신태두(申泰斗)· 유연대(柳淵大) ·김석준(金錫準)· 유대근(柳大根)· 송홍(宋泓)· 김병은(金秉殷)· 권사진(權思鎭) ·소진항(蘇鎭恒)· 윤태국(尹泰國)· 조용하(趙鏞夏)· 임상호(任相浩)· 황경주(黃京周) ·최경원(崔鏡源)· 정규(丁逵)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