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내 유생인 유학 이기식·유종규·윤태국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재배하며 순상 합하에게 편지를 올립니다 [道內儒生幼學李箕植柳種奎尹泰國謹齋沐再拜上書于巡相閤下]
삼가 생각하건대, 충을 장려하고 공훈을 표창하는 것은 조정의 성대한 의식이고, 가리고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것은 사림의 공의(公議)입니다. 태인군의 선비인 김기술(金箕述)은 가계가 도강으로 충민공(忠敏公) 휘(諱) 회련(懷鍊)의 후손이고,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킨 원모당(遠慕堂) 휘 후진(後進)의 11대손이며 함께 창의(倡義)한 췌세공(贅世公) 휘 정(濎)의 9대손입니다. 이 사람은 도량이 넓고 충의가 보통사람보다 뛰어났습니다.
불행히도 지난 1894년 4월에 동요(東擾)가 크게 일어나 비류(匪類)들이 고부(古阜)에 모여들자 완영(完營)에서 행군하여 적을 토벌할 때에 기술은 충의를 발휘하여 사람들을 모아 함께 의논하였습니다. 그 때에 칼을 빼어 팔을 베어 피를 마시며 함께 맹세하였습니다. 뜻밖에 수 천 명이 그 당당한 의기를 보고 흔쾌히 따랐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선봉장이 되어 바로 관정(官庭)에 들어가 적을 토벌할 것을 자원하였더니, 그 때에 태인의 관장인 홍(洪) 등이 그 충의에 감격하여 말·총·창·칼 등을 내어주어 그 날 길을 떠났습니다.
후군 100여명은 다음 날에 출발하기 위해 군령에 따라 다짐을 올렸습니다. 기술은 바로 황토현의 진중에 나아갔는데, 새벽녘에 적병이 뒤에서 갑자기 일어나 손발을 쓰지도 못하고 예기치 못한 변고를 당했습니다. 칼을 뽑아 죽으려고 했으나 뒷날을 도모하려는 뜻으로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경계를 벗어났습니다. 후군도 도착하여 그 패배를 말하고 손을 잡고 통곡하였습니다. 그 분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 후에 비류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접주(接主)와 대장(大將)을 칭하며 그들의 도에 들어오지 않는 자는 죽이기를 풀로 베는 것처럼 쉽게 하였습니다. 하물며 창의한 김기술이 겪은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남북의 비도들이 날마다 와서 침탈하여 겨우 피신하여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다행히 천운(天運)의 순환을 만나서 비태가 돌아왔습니다. 임금께서 특별히 양호위무사 이상공과 친군심영병방 황공(黃公)에게 명하여 완영으로 행군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기술은 지난날에 피를 마시며 적에게 나아갈 때의 충의를 이때에 다시 발휘하여 위무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제교(題敎)에, “공은 비록 이루지 못했으나 의기는 가상하다”라고 하였으며, 배제(背題)에, “말·총·창·검 등은 관의 물건이니 바로 본현에 반납하고 성책을 만들어 보고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친군영 병소(兵所)에 호소하였더니, 제교에, “피를 마시며 함께 맹세하는 것은 어찌 옛날에만 아름답겠는가? 더욱이 김기술은 본래 충신의 후예로 특별히 충심을 가지고 의기를 내어 적을 토벌하였으니 매우 가상하다. 그리고 이 혈서를 보니 그것에 감격하여 눈물이 나게 한다. 적을 토벌하는 때에 관군과 힘을 합하여 함께 도모하니 특별히 보호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여러 번 본군에서 충성을 칭송하는 제사(題辭)가 있었고, 심영병방은 이 사람의 충의는 탁월하여 미치기 어렵다고 말하였습니다.
전후의 이러한 제교를 받고 한 조각의 충심을 더욱 돈독히 하여 태인 고현면에 창의토포소를 설치하였습니다. 비류를 소탕하고 말·총·창·칼 등을 일일이 영문에 수납하였으며 외읍(外邑) 민포(民捕)의 작폐도 금지하여 민간에 걱정을 끼치지 않았습니다. 순영에서 80냥을 상으로 하사하고 감결을 내려주었으며, 친군영에서 말·총·칼 등을 상으로 주어 당당한 그 충의는 호남에 빛났고 밝은 그 공덕은 시골 마을에 두루 미치었습니다. 이와 같이 웅대한 방략을 가진 자에게 병권(兵權)을 맡기게 한다면 한 지방의 근심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10년 동안 아무런 들림이 없으니 실로 사림의 한탄이고 조정의 의례에 흠이 됩니다. 그래서 감히 한 목소리로 우러러 호소합니다. 어질고 밝으신 합하께서 이 사람의 충의를 어루만져 임금님께 아뢰어 시골 한 귀퉁이에서 쓰여지도록 도와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903년 10월 일
사(使) [수결]
도내 유학 이기식(李箕植)·유종규(柳鍾奎)·윤태국(尹泰國)·민순호(閔珣鎬) ·유환동(柳煥東)·석영(錫永)·승주(承柱)·기우근(奇宇根)·백익수(白益洙) ·김봉술(金鳳述)·임상학(林相鶴)·김혜겸(金惠謙)·송원호(宋元浩)·오중근(吳重根) ·정해붕(鄭海鵬)·박제대(朴齊大)·김요봉(金堯鳳)·이건화(李建和)·정운승(鄭雲昇) ·전봉표(全鳳杓)·최상현(崔相鉉)·이정의(李廷儀)·유하상(柳夏相)
창과 방패를 잡고 사직(社稷)을 지켰다는 말은 옛날에 들었으나, 충의에 의지하여 비류(匪類)를 토벌하려했다는 사람이 지금 있으니 어찌 가상하지 않은가? 더욱 격려하고 힘쓰는 것이 마땅하다. 아직 등용되지 않아 비록 이것이 의례에 흠이 되어도 이런 사림의 논의가 있으니 어찌 들림이 없다고 하겠는가? 신중하게 다시 널리 채록할 일.
8일 주사(主事) 이용섭(李龍涉)·서기(書記) 이조영(李肇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