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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태인현 고현내면에서 100명을 모아 조약을 만들고 피를 마시며 맹세를 하여 한마음으로 적에게 나아가기로 한 약장 유학 황기환·송운채·김직술 등은 성주님 태인현감께 삼가 재배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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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짜
    음력 1895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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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현 고현내면에서 100명을 모아 조약을 만들고 피를 마시며 맹세를 하여 한마음으로 적에게 나아가기로 한 약장 유학 황기환·송운채·김직술 등은 성주님 태인현감께 삼가 재배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올립니다 [泰仁縣古縣內面聚合百人因成條約歃血同盟一心赴賊約長幼學幼學黃基煥宋雲采金直述等謹泣血上書于都巡察使兼慰撫使道主閤下伏]

삼가 생각건대, 충성할 때는 목숨을 바치고 효도할 때는 자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 신하와 아들의 본래 임무이며, 이단을 배격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것은 성현이 마음으로 경계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추로(鄒魯)의 옛 나라로 호남의 우리 현(縣)과 같은 곳에서도 현자들이 서로 일어나고 충효가 계속 이어져서, 실제로 도(道)내 기북(驥北)의 땅이었습니다. 무성(武城)의 거문고 소리에 아직 자유(子游)의 고풍이 남아있고, 상대(觴臺)의 노래 소리에 오히려 고운(孤雲)의 옛 터가 남아있습니다. 순박한 풍속이 계속 이어져서 아직도 충효와 예의, 그리고 문물이 있는 땅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은 소요가 매우 심하고 세상일은 혼란해졌습니다. 이때에 함께 약조한 저희들은 모두 충훈(忠勳)과 유현(儒賢)의 후예로서 선대의 유업을 저버리지 않고, 충성된 마음을 품어 밭을 갈고 책을 읽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칼을 갈아 깊이 감추어 목숨을 바쳐 굳게 지키려 했습니다. 다만 좋지 않은 시기를 만났으니 한 마음으로 적에게 나아가 생사를 함께 하여, 위로는 만분의 일이라도 성은(聖恩)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충효의 선업을 지키려는 뜻으로 조약을 만듭니다. 100명을 모아 피를 마시며 함께 맹세하고 절목을 만들어 오가작통을 행한 것이 갑오(甲午)년 3월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4월에 본도의 난리가 크게 심해져서 고부(古阜)에 모여 병기를 모으고 성곽을 이루어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조짐이 있었는데, 그 곳의 광경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순상(巡相)인 김(金), 김문현 등이 특별히 완군을 보내어 영관 이곤양과 서기 이돈승으로 하여금 군대를 인솔하게 하였습니다. 서로 싸움을 할 때에 전임 수령인 홍(洪), 홍면주 또한 충의(忠義)를 내어 함께 토벌하자는 뜻으로 각 면에 명령을 전하고 별감(別監) 전(全)으로 하여금 신속하게 군사 100명을 모집하게 할 때 첩문(帖文)을 가지고 본면의 동각(洞閣)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민심이 동요하여 책을 읽던 자가 책을 놓고, 밭을 갈던 자가 쟁기를 던졌으며, 남자는 달아나고 여자는 숨었으며, 노인은 탄식하고 어린애는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의 정경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삼가 함께 약조한 저희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뿔피리를 불어 유상대에서 크게 모이니 일개 면민과 동민 수천 명이 일제히 둘러섰습니다. 약장 황기환이 약조에 따라 적을 토벌하자는 뜻을 말하니, 김씨 집안의 70여명과 각성(各姓) 40~50명이 일제히 자원하여 의기가 당당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사인(士人)인 김기술·김찬규·이봉선·송정회·김영학·권송호 등 수십 명이 선봉군을 자원하였습니다.

김기술이 칼을 뽑아서 팔을 베고 피를 들어 맹세하고, 자원하여 나간다는 뜻으로 혈서를 썼습니다. 깃발을 ‘창의김기술수기(倡義金箕述手旗)’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기와 혈서를 펼치게 하여 바로 출발하여 본관(本官)을 뵈었습니다. 저희 100여 명은 피를 마시고 맹세하여 자원해서 적을 치러 나가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적어 관에 보고하였더니 전임 성주께서 기뻐하여 크게 칭찬하시고 특별히 말·총·창·칼 등을 내주며 10리 까지 호송해주었습니다. 저희 100여명은 다음 날 출발할 때에 군령에 따라 다짐을 올렸습니다.

아! 이기거나 지는 것은 병가(兵家)의 일상적인 일입니다. 이 선봉부대는 갑자기 황토현의 진중에서 예기치 못한 변고를 당했으며, 저희들은 다음날 중도에서 만나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을 잡으며 통곡했는데, 하늘과 땅이 안개가 낀 것 같았고 산과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습니다. 생존을 도모할 수가 없어서 각각 흩어져 집으로 돌아온 지 7~8달이 되었습니다. 저들의 침탈을 견디지 못하여 낮에는 숨었다가 밤에 나오는 날이 오래되었습니다.

비태(否泰)에 운수가 있고 박복(剝復)에 때가 있습니다. 다행히 대군이 남하하는 것을 만나, 위 김기술이 먼저 위무사 앞으로 원통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친군영의 데김[題音]에, “가상하도다. 힘을 합쳐 적을 토벌하고 거괴를 잡아들이며 평민을 귀화시키고 말·총·창·칼 등을 바로 본 현에 반납한 뒤에 성책(成冊)을 만들어 보고하라”는 본관의 하교가 있었습니다.

또한 친군영대장 합하에게 호소하였는데, 제교(題敎)에, “피를 마시며 함께 맹세하는 것이 어찌 옛날만 아름답겠는가? 더욱이 김기술은 본래 충신의 후예로 의기를 내어 적을 토벌했으니 매우 가상하다. 그리고 이 혈서를 보니 감격하여 눈물이 나게 한다. 적을 토벌하는 때에 관군과 힘을 합하여 도모했다면 하찮은 일이지만 공은 갑절이나 될 것이다. 관과 민을 막론하고 이것을 알려서 특별히 보호하라. 더욱이 길을 다닐 때에 이것을 준거로 삼아 침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교를 받들어 지난 날 적에게 나아갈 때의 맹세한 마음을 오늘 적을 토벌할 때에 다시 일으켰습니다.

12월 8일부터 본면의 동각에 창의토포소(倡義討捕所)를 설치하고 위의 김기술 등과 한마음으로 충분히 의논하여 힘을 모으고 의기를 내어 한 달 동안 적들을 체포하였습니다. 위로는 윤지(綸旨)와 아래로는 고유(告諭)와 방(榜)및 절목(節目) 등을 받들었는데, 원괴는 저들이 모두 도망하여 아직 잡지 못하였고, 말·총·창·칼 등은 반납하였으며 민포의 작폐는 금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군수전(軍需錢)과 군수미(軍需米)는 매우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이 한 푼의 돈과 한 홉의 쌀도 민간에 걱정을 끼치지 않았으며 각자 밥을 먹고 물을 마셨습니다. 각 읍 소모영이 주고받은 문보(文報), 병정(兵丁)과 민포(民捕)가 왕래한 여러 곳, 각 면의 훈장에게 왕복한 사통, 마을마다 게시한 문자 등에는 매번 원괴를 잡아들이고 병기는 수거하며, 평민은 귀화시키고 작폐는 엄단할 것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성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데, 오는 것이 어찌하여 늦어집니까? 이에 오시니 마치 죽을 지경이던 자가 살아나고, 매우 걱정하던 자가 다시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하물며 저희들처럼 억울한 마음이 있는 자는 어떠하겠습니까?

일전에 순영문에서 의소(義所)는 혁파하고 문장(文狀)은 봉하여 올리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전후의 사실을 자세하게 아뢰었습니다. 위무사합하와 친군영병소에서 불쌍히 여긴다는 뜻을 특별히 내리시면서, 순영문에서 돈 80냥과 감결을 내주었고, 친군영에서는 말 1필·칼 1자루·총 1자루를 관인(官印)을 찍어 상으로 주었습니다. 빈천한 일개 선비가 특별히 은혜를 입으니 매우 황송하여 등에 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감히 성주님께 우러러 호소합니다. 전후의 문장과 창의토포소의 실제 사실을 적은 책, 병기를 수납한 성책과 군수전 및 쌀의 수납을 성책(成冊)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신 뒤에 특별히 처분하여 백세(百世)동안 없어지지 않는 공적이 되도록 해주시기를 간절히 외람되게 아룁니다. 두려움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성주 합하

관(官) [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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