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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태인현 고현내면에서 100명을 모아 조약을 만들고 피를 마시며 함께 맹세하여 한마음으로 적에게 나아가기로 한 약장 유학 황기환·송운채·김직술 등은 삼가 피눈물을 흘리며 친군영대장 합하께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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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현 고현내면에서 100명을 모아 조약을 만들고 피를 마시며 함께 맹세하여 한마음으로 적에게 나아가기로 한 약장 유학 황기환·송운채·김직술 등은 삼가 피눈물을 흘리며 친군영대장 합하께 글을 올립니다 [古縣內面聚合百人因成條約歃血同盟一心赴賊約長幼學黃基煥宋雲采金直述等謹再拜泣血上書于親軍營大將閤下]

삼가 생각컨대 충성을 할 때는 목숨을 바치고 효도를 할 때는 힘을 다하는 것이 신하와 자식의 본래 임무입니다. 이단을 배격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것은 성인의 마음입니다. 우리나라는 추로(鄒魯)의 옛 나라이고 호남의 우리 현과 같은 곳에서도 많은 어진 이들이 잇따르고 충신과 효자가 계속 이어져서 실제로 도내의 기북(驥北)이 되었습니다. 무성(武城)의 거문고 소리에 아직 자유(子游)의 고아한 풍속이 남아있고, 상대(觴臺), 유상대(流觴臺)로 누대의 노래 소리에 오히려 고운(孤雲)의 옛 터가 남아있습니다. 순박한 풍속이 이어져서 아직도 충효와 예의 그리고 문물이 지금까지 500년이나 되었습니다.

뜻밖에 지금 소요가 크게 일어나고 세상일이 어수선한데, 함께 약조한 우리들은 모두 충신과 유현(儒賢)의 후예로서 선대의 유업을 저버리지 않고, 충성된 마음을 품어 밭갈고 독서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칼을 갈아 깊이 감추어 목숨을 바쳐 굳게 지켰으나 다만 때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마음으로 적에게 나아가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하여 위로는 만분의 일이라도 성은(聖恩)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충효의 유업을 지키려고 조약을 만들었습니다. 100명을 모아 피를 마시며 함께 맹세하고 절목을 만들며 오가작통(五家作統)한 것이 1894년 3월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4월에 본도에 소요가 심하여 고부(古阜)에 모여 병기를 모으고 성곽을 이루어 반역의 불온한 조짐이 있었습니다. 그 곳의 광경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구 순상(舊 巡相) 김(金) 등이 특별히 완군(完軍)을 보내어 영관 이곤양·이첨사·이돈승으로 하여금 군대를 인솔하게 하였습니다. 서로 싸울 때에 전임 수령인 홍(洪) 또한 충의를 내어 함께 토벌하자는 뜻으로 각 면에 영(令)을 보냈습니다. 별감(別監) 전(全)으로 하여금 신속하게 군사 100명을 모집하게 할 때 첩문(帖文)을 가지고 본면의 동각(洞閣)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민심이 동요하여 책을 읽던 자가 책을 놓고, 밭을 갈던 자가 쟁기를 던졌으며, 남자는 달아나고 여자는 숨었으며, 노인은 탄식하고 어린애는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의 정경이 어떠하였겠습니까? 함께 약조한 저희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뿔피리를 불어 유상대에서 크게 모으니 일개 면민과 한동네에 수천 명이 일제히 둘러섰습니다. 약장 황기환이 조약에 따라 적을 토벌하자는 뜻을 말하니, 김씨 집안의 70여명과 각성(各姓) 40~50명이 일제히 자원하여 의기가 당당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양반인 김기술·김찬규·이봉선·송정회·권송호·김영학 등 수십 명이 선봉군을 자원하였습니다. 김기술이 칼을 뽑아서 팔을 베고 그 살점을 들어 맹세하고, 자원하여 나간다는 뜻으로 혈서를 썼습니다. 깃발을 ‘창의김기술수기(倡義金箕述手旗)’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기와 혈서를 펼치게 하여 바로 출발하여 본관(本官), 수령을 말함을 뵈었습니다.

저희 100여명은 피를 마시고 맹세하여 자원해서 적을 치러 나가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적어 관에 아뢰었더니 전임 수령께서 기뻐하여 크게 칭찬하시고 특별히 말·총·창·칼 등을 내주며 10리 까지 호송해주었습니다. 저희 100여명은 다음 날 출발할 때에 군령에 따라 다짐을 올렸습니다. 아! 이기거나 지는 것은 병가(兵家)의 일상적인 일입니다. 이 선봉부대가 갑자기 황토현의 진중에서 예기치 못한 변고를 만났습니다. 저희들은 다음날 중도에서 만나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을 잡으며 통곡했는데, 하늘과 땅이 안개가 낀 것 같았고 산과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습니다. 목숨을 보존할 수가 없어서 각각 흩어져 집으로 돌아온 지 7~8개월이 되었습니다. 저들의 침탈을 견디지 못하여 낮에는 숨었다가 밤에 나오는 날이 오래되었습니다. 비태(否泰)에 운수가 있고 복박(復剝)에 때가 있습니다. 다행히 대군이 남하하는 것을 만나 위 김기술이 먼저 순상 합하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제교(題敎)에 “공은 비록 이루지 못했으나, 의기는 가상한 일이다”라고 하였고, 배제(背題)에, “말·총·창·칼 등은 관의 물건이니 바로 본현에 반납하고 성책(成冊)하여 보고하라”라는 본관의 하교가 있었습니다. 또한 친군영대장 합하에게 호소하였는데, 제교(題敎)에, “피를 마시며 함께 맹세하는 것이 어찌 옛날만 아름답겠는가? 더욱이 김기술은 본래 충신의 후예로 의기를 내어 적을 토벌했으니 매우 가상하다. 그리고 이 혈서를 보니 감격하여 눈물이 나게 한다. 적을 토벌하는 이때에 관군과 힘을 합하여 도모한다면 하찮은 일이지만 공은 갑절이나 될 것이다. 관과 민을 막론하고 이것을 알려서 특별히 보호하라. 더욱이 길을 다닐 때에 이것을 준거로 삼아 침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교를 받들어 지난 날 적에게 나아갈 때의 맹세한 마음을 지금 적을 토벌할 때에 다시 일으켰습니다.

지난 12월 8일에 본면의 동각에 창의토포소(倡義討捕所)를 설치하여 한 달이 되었는데, 말·총·창·칼 등을 반납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제교에 거괴를 잡아들이라는 하교는 없었으나 저들을 없애려고 맹세한 날의 뜻을 오로지 하며 밤낮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모두 도망하여 마음이 부끄러운 가운데 각 면의 훈장에게 보낸 사통(私通)과 마을에 붙은 글에 매번 거괴를 잡아들이고 병기는 거둬들이며 평민을 안도하게하고 작폐(作弊)를 엄단할 것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순창의 경우 민포(民捕)들이 적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벌떼처럼 일어나 한 지경에 재빨리 들어가 공(公)을 빙자하여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고 죄 없는 평민들을 제멋대로 침탈하여 가산을 몰수하거나 병기 대신 돈을 받아내는 경우도 있어 소문도 낭자하고 직접 보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저희들의 어리석은 소견이지만, 어찌 그러해야 하거나 그러해서는 안되는 사체(事體)를 모르겠습니까? 순창 소모영(召募營)의 본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 아랫사람의 작폐가 있어서 김광양(金光陽)의 집에 편지를 보냈고, 다시 소모영의 별영관(別營官) 임규석(林奎錫)에게도 편지를 보냈습니다. 답장이 모두 왔는데, 순창의 민포가 경계를 넘어 침탈하는 폐단을 엄히 금지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거두어서 보관하고 있는 얼마의 쌀과 돈은 저희들이 몰수하여 보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 해당 동민들이 결가(結價)를 메우려고 적의 집에서 몰수한 것이 있거나, 순창 민포가 몰수하여 가져가는 것을 저희들이 빼앗아 보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창의토포소를 만든 이후로 한 푼의 돈이나 한 홉의 쌀도 민간에 걱정을 끼친 것이 없이 각자 밥을 먹고 물을 마셨습니다. 약간의 보관하고 있는 물건은 전혀 거론하지 않았고, 해당 마을과 집에 각각 보관한 것은 한 면이 모두 보고 들어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책을 만들어 보고하라는 순영문의 하교를 받았기 때문에 매우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처지에서 속마음을 모두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약간의 거둬들인 말과 총, 약간의 보관하고 있는 돈과 쌀은 일일이 성책을 만들어 보고하였으니, 마른 하늘에 어찌 죄에 걸릴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우뢰와 같은 제교(題敎)를 받드니 “의소(義所)를 혁파하고 문장(文狀)을 봉하여 올리라”라고 하였으니 매우 황송하옵니다. 이에 창의토포소의 전후사실을 적은 책과 문장을 봉하고 거둬들인 병기의 전후 항목 등을 다시 성책을 만들어 일일이 순영문에 보고하였습니다.

대저 창의토포소의 설치는 모두 저희들의 충심에서 나온 것이고 혁파여부도 저희들의 충심에 달려있지 순영문의 처분에 달려있지 않으며, 당초 금년 봄에 팔을 베어 피를 마시며 맹약한 글 또한 순영문의 지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적을 토벌하는 이 날에 위무사 사또의 제교(題敎)와 친군영 대장소의 제교를 받으니 어리석은 자를 바르게 서게 하고 비겁한 자를 염치가 있게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비록 먼 곳의 어리석은 자이지만 어찌 근본에 보답하고 미루어 감화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임금의 밝은 다스림에 백옥처럼 흠이 없는데, 저희가 폐단을 일으켜 총명을 가렸다는 이같은 혐의가 있어서, 의소(義所)는 혁파하며 문장은 봉(封)하여 올리라고 하였습니다. 충심이 있는 터에 진실로 억울한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을 다하려고 하니 말이 어눌해지고 마음이 답답하여 만 가지를 빠뜨리고 한 가지만을 적습니다. 삼가 합하께 바라건대, 곤외(閫外)도 장군의 백성들입니다.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며 적을 토벌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이런 때에 밝게 살피고 또 살피어서 저희들이 지난 날 맹세한 마음이 어떠한지, 오늘 토포소를 설치한 것이 어떠한지, 작폐한 것이 어떠한지를 상세하게 사유를 따져 분간하시어 먼저 순영문에 포고하시고, 다시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그 죄는 벌하고 그 사실은 사실대로 하여 의로운 충심을 펴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삼가 외람되게 친군영대장 합하(親軍營大將閤下)께 아룁니다.

심영병방(心營兵房) [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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