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명을 모아 조약을 만들고 피를 마시며 함께 맹세하여 한마음으로 적을 토벌하기로 한 약장 황기환·송운채·김직술 등은 피눈물을 흘리며 성주 합하께 글을 올립니다 [聚百人以成條約歃血同盟一心討賊約長黃基煥宋雲采金直述等泣血上書于城主閤下伏]
충성할 때는 목숨을 바치고 효도할 때는 자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 신하와 아들의 본래 임무이며, 이단을 배격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것은 성현이 마음으로 경계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추로(鄒魯)의 옛 나라로 호남의 우리 현(縣)과 같은 곳에서도 현자들이 서로 일어나고 충효가 계속 이어져서, 실제로 도(道)내 기북(驥北)의 땅이었습니다. 무성(武城)의 거문고 소리에 아직 자유(子游)의 고풍이 남아있고, 상대(觴臺)의 노래 소리에 오히려 고운(孤雲)의 옛 터가 남아있습니다. 순박한 풍속이 계속 이어져서 아직도 충효와 예의, 그리고 문물이 있는 땅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은 소요가 매우 심하고 세상일은 혼란해졌습니다. 이때에 함께 약조한 저희들은 모두 충훈(忠勳)과 유현(儒賢)의 후예로서 선대의 유업을 저버리지 않고, 충성된 마음을 품어 밭을 갈고 책을 읽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칼을 갈아 깊이 감추어 목숨을 바쳐 굳게 지키려 했습니다. 다만 좋지 않은 시기를 만났으니 한 마음으로 적에게 나아가 생사를 함께 하여, 위로는 만분의 일이라도 성은(聖恩)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충효의 선업을 지키려는 뜻으로 조약을 만듭니다. 100명을 모아 피를 마시며 함께 맹세하고 오가작통을 행하고, 또한 별도로 절목(節目)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4월에 본도의 난리가 크게 심해져서 고부(古阜)에 모여 병기를 모으고 성곽을 이루어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조짐이 있었는데, 그 곳의 광경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순상(巡相) 인 김(金), 김문현 등이 특별히 완군을 보내어 영관(領官) 이곤양(李昆陽)과 서기(書記) 이돈승(李敦昇)으로 하여금 군대를 인솔하게 하였습니다. 서로 싸움을 할 때에 전임 수령인 홍(洪), 홍면주 또한 충의(忠義)를 내어 함께 토벌하자는 뜻으로 각 면에 명령을 전하고 별감(別監) 전(全)으로 하여금 신속하게 군사 100명을 모집하게 할 때 첩문(帖文)을 가지고 본면의 동각(洞閣)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민심이 동요하여 책을 읽던 자가 책을 놓고, 밭을 갈던 자가 쟁기를 던졌으며, 남자는 달아나고 여자는 숨었으며, 노인은 탄식하고 어린애는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의 정경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삼가 함께 약조한 저희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뿔피리를 불어 유상대에서 크게 모이니 일개 면민과 동민 수천 명이 일제히 둘러섰습니다. 약장 황기환이 약조에 따라 적을 토벌하자는 뜻을 말하니, 김씨 집안의 70여명과 각성(各姓) 40~50명이 일제히 자원하여 의기가 당당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사인(士人)인 김기술·김찬규·이봉선·송정회·김영학·권송호 등 수십 명이 선봉군을 자원하였습니다.
김기술이 칼을 뽑아서 팔을 베고 피를 들어 맹세하고, 자원하여 나간다는 뜻으로 혈서를 썼습니다. 깃발을 ‘창의김기술수기(倡義金箕述手旗)’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기와 혈서를 펼치게 하여 바로 출발하여 본관(本官)을 뵈었습니다. 저희 100여 명은 피를 마시고 맹세하여 자원해서 적을 치러 나가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적어 관에 보고하였더니 전임 성주께서 기뻐하여 크게 칭찬하시고 특별히 말·총·창·칼 등을 내주며 10리 까지 호송해주었습니다. 저희 100여 명은 다음 날 출발할 때에 군령에 따라 다짐을 올렸습니다.
아! 이기거나 지는 것은 병가(兵家)의 일상적인 일입니다. 이 선봉부대는 갑자기 황토현의 진중에서 예기치 못한 변고를 당했으며, 저희들은 다음날 중도에서 만나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을 잡으며 통곡했는데, 하늘과 땅이 안개가 낀 것 같았고 산과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습니다. 생존을 도모할 수가 없어서 각각 흩어져 집으로 돌아온 지 7~8달이 되었습니다. 저들의 침탈을 견디지 못하여 낮에는 숨었다가 밤에 나오는 날이 오래되었습니다.
비태(否泰)에 운수가 있고 박복(剝復)에 때가 있습니다. 다행히 대군이 남하하는 것을 만나, 위 김기술이 먼저 위무사 앞으로 원통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친군영의 데김[題音]에, “가상하도다. 힘을 합쳐 적을 토벌하고 거괴를 잡아들이며 평민을 귀화시키고 말·총·창·칼 등을 바로 본 현에 반납한 뒤에 성책(成冊)을 만들어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김기술 등과 함께 본면의 동각에 창의토포소를 설치하고 경내에 군사를 보냈으나 거괴는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자는 처벌하고, 폐단을 일으키는 것은 금지하며, 몰수한 것은 압류하고, 병기는 거두어서 바치기 위해 성책(成冊)하여 성주님이 오시기를 잠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시기를 기다리니 어찌 온 백성이 기뻐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때에 맞게 비가 내리는 것 같습니다.
친병(親兵)의 위엄은 탕왕과 무왕의 시대인 듯 싶습니다. 가는 곳마다 친병에 복종하면서 잔악한 적을 소탕하여 나라가 편안해지고 백성이 안정되며 밭을 가는 자와 책을 읽는 자가 기약할 수 있었으니, 태평의 큰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과연 어떤 동요를 부르겠습니까. 있는 곳마다 모두 복종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이에 전후의 실제 사적(事蹟)을 덧붙여서 우러러 아룁니다. 특별히 헤아려서 연유를 들어 감영에 보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