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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영회단[永懷壇]

갑오년(甲午年) 7월 그믐날에 우리 고을의 성주(城主)인 박부사(朴府使, 박헌양)가 1필(匹)의 말로 임소(任所)에 도착하기 전에 동학배(東學輩)가 여러 읍에서 소란을 일으켰다. 동학배는 전주(全州)가 함락된 이후에 그 기세가 점점 강성해졌다. 본읍의 적괴(賊魁)인 이방언(李方彦)은 타고난 성품이 흉악하고 비류(匪類)에 물들어서 경내(境內)의 무뢰(無賴)한 부류를 모았는데, 그 무리가 몇 천 명이 되었다. 마을을 약탈하여 경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박부사는 정사(政事)에 나온 날에 먼저 향교(鄕校)의 삭망례(朔望禮)를 실행하고 유림(儒林)들과 당시의 사태에 대해 말하였다. 음(陰)을 누르고 양(陽)을 지탱하며 사학(邪學)을 척결하고 정학(正學)을 지킬 것을 간절하게 훈계를 하며 말하기를, “이처럼 도도한 세상에서 강학(講學)을 잠시라도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각 면(面)에서 큰 덕이 있는 사람을 골라 훈장(訓長)에 임명하고 날마다 강의를 받게하고 창고 곡식을 내어 식량을 지급하고 무비(武備)를 수련하여 적을 막을 계획을 세웠다.
이방언(李方彦)을 불러 귀화(歸化)시키려 하자, 방언은 글을 올리고 귀순해서 읍안의 남은 무리가 점차 가라앉았다. 적괴 구교철(具敎轍)과 이사경(李士敬)은 끝내 귀순에 응하지 않고 이웃 경계로 도망을 가거나 창궐(猖獗)하여 기포(起包)를 하였다. 박부사가 분노하여 뒤를 밟아 체포하려고 했으나 하지 못하였다. 그 해에 가뭄과 흉년을 만나 직접 연해(沿海)의 여러 면들을 돌아보고, 이앙(移秧)을 못하거나 말라죽은 곳에는 역(役)을 줄여주었다.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실행하려고 했으나 하지 못하였다. 이 때에 적의 기세가 대단해져서 귀신과 물여우가 되어 침탈을 하니 민심이 흉흉해졌다.
박부사가 적의 변고를 우려하여 직접 병영(兵營)에 가서 구원을 청하여 함께 그들을 토벌하였다. 교철(敎轍)의 무리가 지금 웅치면(熊峙面)에서 인민(人民)을 살육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성장(守城將) 임창남(任昶南)에게 관군을 인솔해서 토벌을 하게 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대흥면(大興面)의 적괴 이인환(李仁煥)이 적도(賊徒) 1,000여 명을 몰고 고읍(古邑)으로 바로 향하고, 위협에 따라 쫓는 군사들이 다시 남면(南面) 등지를 공격하였다. 날로 무리가 모여서 적의 기세가 크게 일어났다. 남면에서 바로 회령(會寧)으로 향하기에 다시 수성장에서 명하여 나가서 격퇴하게 하였으나 저들의 수효가 많고 우리는 적어서 손해를 보고 돌아왔다. 박부사가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관군(官軍)을 크게 일으킬 때에 병영의 구원병 수백 명이 마침 도착하여 관군과 함께 힘을 합쳐 추격을 하였다. 웅치 등지에 있던 적도가 보성(寶城)으로 숨어들어가서 관군과 병영의 군대가 모두 돌아왔다. 방언(方彦)이 성 밖으로 나가 도망을 하였다. 방언은 겉으로 귀화를 하고 속으로는 음흉하고 사특한 마음을 품었으며 해치려는 마음을 간직하여 매우 헤아릴 수가 없었다.
박부사는 적들이 양반과 백성을 강제로 저들에게 몰아가는 것을 걱정하여 경내의 양반과 백성 중에 의(義)를 지키고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을 의사(義士)로 기록하고 성을 지킬 것을 유림과 상의하였다. 적괴가 이것에 원한을 품고 몰래 흉악한 계획을 모의한 지가 오래되었다. 널리 가까운 경계의 적들을 불러모아 12월 1일에 적들이 보성에서 와서 사창(社倉) 등지에 주둔하였는데, 큰 접(接)은 10,000여 명이고 작은 접은 2,000∼3,000명이었다. 금구(金溝)의 거괴 김방서(金方瑞)와 화순(和順)의 괴수 김수근(金秀根) 및 능주(綾州)의 거괴 조종화(趙鐘化)가 모두 군사를 인솔해서 왔다. 이 때에 방언이 급속하게 군사를 일으켜서 말하기를, “나주로 향했다가 강진으로 갈 것이다”라고 했는데, 인환(仁煥) 및 교철(敎轍) 등과 오래 전에 세운 계획이었다. 박부사가 교철이 명을 어긴 것과 방언의 흉계를 분하게 여기고, 수성(守城)하는 일을 날로 더욱 견고하게 하였다. 날마다 성을 순시하고 장졸(將卒)을 위로하며 어진 교화를 펴니 읍촌(邑村)의 백성들 중에 감격하여 일어나서 한번 싸워 충성을 바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2월 3일에 적들이 성 밖에 바로 이르렀다. 방언은 평화(平化) 송정(松亭)의 산등성이에, 인환과 교철은 건산(巾山) 뒤쪽 산등성이에 주둔하였다. 방서 등은 벽사(碧沙) 뒷뜰에, 사경(士敬) 등은 행원(杏園) 앞뜰에 주둔하였다. 그 기세가 바람이 몰아치고 벼락이 치는 듯하였다. 이 날 박부사가 동문(東門)에 올라 적의 기세가 매우 대단한 것을 보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적의 기세가 저와 같은데, 이웃에서 구원이 오지 않아 적을 막기가 어렵다. 전부 죽은 뒤에 그칠 뿐이고 이 적과 함께 하늘을 함께 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고 하며 슬프게 탄식하니, 좌우에서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12월 4일에 적이 불을 질러 벽사(碧沙)의 공해(公廨)와 민가가 타서 모두 재가 되었다. 연기가 하늘에 가득차서 온 성의 인민(人民)이 혼이 나가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날 밤에 박부사가 성을 돌다가 동쪽 문루(門樓)에 이르렀다. 이 때 기실(記室) 박공(朴公, 박영수)도 뒤를 따라 왔는데, 적이 사면에서 구름같이 모여들고 포소리가 하늘을 흔들었다. 부사가 성을 지키고 있던 아전과 백성을 불러 말하기를,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운수가 아니면 운명이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 위급한 성을 굳게 지켜 보전되기를 바랐는데, 오늘에 이르러 이처럼 급박하니 너희는 성을 넘어 살기를 도모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어찌 구차하게 죽음을 면하겠는가”라고 하며 슬프게 눈물을 머금었다. 벽사찰방(碧沙察訪) 김일원(金日遠)도 함께 성을 지키다가 병영에 구원을 요청하는 일 때문에 아침 일찍 성을 나갔고, 그의 처자는 성안에 머물러 두었다.
다음날 새벽에 다시 문루에 올라 적진을 살펴보았는데, 갑자기 포소리가 한번 울리더니 적이 북쪽 성을 넘어 들어와서 성안이 어수선해졌다. 관군이 부사를 부축하여 문루를 내려와 바로 동헌(東軒)에 들어가니 적들이 뒤를 쫓아와서 난리를 피웠다. 혹은 소매를 잡고 옷을 당기거나 혹은 인신(印信)과 병부(兵符)를 찾기도 하였으나 부사는 낯빛을 변하지 않고 큰소리로 크게 꾸짖어서 말하기를, “내가 왕명(王命)을 받아 인신과 병부가 나에게 있다. 너희들이 어찌 감히 빼앗아 가지려고 하는가”라고 하며 호통이 입에서 그치지 않았다. 적이 동문으로 끌고나가 시장에 이르러 창을 휘두르거나 포를 쏘아 무수히 위협을 하였으나 부사는 정색하고 반듯하게 앉아 조용히 의(義)를 취하였다. 이 날이 바로 갑오년 12월 5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였다. 기실(記室) 박공(朴公)은 흉악한 변고를 갑자기 당하였다. 부사의 생존여부를 알지 못하여 황급하게 관문(官門)에 갔다가 적을 만나 해를 입어 함께 순절하였다. 한 집안의 충의(忠義)가 해와 별처럼 빛나는데, 만약에 평소 마음에 축적한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처럼 열렬할 수 있겠는가? 온 성이 잿더미가 되고 시체가 쌓여 골짜기를 메우니 그 참담함은 말로 할 수가 없었다. 부사의 시신은 시장가에 버려졌으나 아전과 백성이 적도에게 겁을 먹어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다.

12월 7일 선비 김용후(金容厚)와 백우인(白禹寅)이 몰래 시신을 거두었는데, 입고 있던 두루마기로 시신을 싸서 시장의 모래에 묻었다. 읍(邑)의 점주(店主) 이매암(李賣巖)이 책실(冊室)의 시신을 거두어 성안의 요충지에 보관하였다. 적도가 강진의 병영을 함락시키고 12월 12일에 돌아와서 본읍의 남문 밖과 건산(巾山) 뒤의 산등성이에 주둔하였다. 이날에 소모관(召募官) 백낙중(白樂仲)이 경군(京軍)을 인솔하여 와서 바로 건산의 적들을 격파하였고, 다음날 새벽녘에 다시 남문 밖의 적을 격퇴하였다.
12월 14일 적병이 수만 명의 병사를 크게 일으켰는데, 남면(南面)에서 적도의 1대(一隊)는 읍 밖의 반월평(半月坪)에, 다른 1대는 본읍 뒷산에 주둔하였다. 경군은 둘로 부대를 나누었다. 사방에서 포를 쏘니, 적병이 크게 패배하여 죽은 자의 수효를 알지 못하였다.

12월 15일 유림 고광익(高光翼)이 출신(出身) 조경승(曺璟承)과 함께 소모관을 보고 성주(城主, 장흥부사)의 시신을 거두는 일을 말하고, 물러나서 선비 김좌현(金佐鉉)·조덕승(曺德承)·전병추(全秉秋)·김예현(金叡鉉)·김한익(金漢翊)과 함께 관(棺)과 명주를 준비하여 평화(平化) 죽봉(竹峯) 아래 깨끗한 땅에 초빈하였다. 그 때에 아전 엄찬교(嚴瓚敎)·신도익(申道益)·조공일(趙共日)이 함께 시신을 수습하였다. 12월 25일에 서실(書室)로 옮겨 초빈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호상(護喪)을 맡은 아전은 송신묵(宋愼黙)과 신필규(申必奎)이었고, 지공(支供, 음식접대)을 맡은 사람은 주창도(周昌都)였다. 12월 28일에 성주의 아들인 진사(進士)가 분상(奔喪)하였고, 다음 날에 성주의 막내동생 별솔(別率)이 내려왔다. 을미년(乙未年) 1월 2일에 기실(記室)의 아들인 전서(典書)가 분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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