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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영회당 이건기[永懷堂移建記]

삼군(三軍)이 적에 달려갈 때에는 전모(前茅)를 먼저 들었다. 우리나라가 옥사(屋社)하자 갑오년(甲午年)에 동비(東匪)가 전모(前茅)가 되어 제일 먼저 일어났다. 시천(侍天)의 1가지 주문(呪文)은 그 재앙이 삼국(三國)에 퍼져 죽은 시체가 백만이 되고 피는 천리까지 흘렀다. 끝내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옛 도읍이 변하여 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아! 참담하다.
이 때 장흥부사 박공(朴公) 헌양(憲陽)은 인륜(人倫)과 강상(綱常)이 존망하는 즈음에 우뚝 서서 웅어(熊魚)의 취사선택을 분별하여 기꺼이 적의 칼날을 받았는데, 죽음을 바라보기를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하였다. 휘하의 장사(將士)도 의기(義氣)를 내어 따라 죽은 자가 95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그 충성스럽고 용감한 혼백(魂魄)은 밝게 빛나서 위로는 하늘에 이르고 아래로는 산악(山岳)에 걸쳐 천년을 지나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영회당(永懷堂)은 바로 의를 따라 죽은 장사의 혼령을 위로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천관산(天冠山)은 닳지 않고 천관의 물은 마르지 않으니, 이 사당은 산과 물과 더불어 함께 할 것이다.
아! 장하다. 내가 옛날에 남쪽의 관찰사로 있을 때에 먼저 장흥관아에 들어가서 그들의 처자를 위로하고 특별히 10,000문(文)을 내어 제수비용을 부조하였다. 복명(復命)하는 날에 별단(別單)을 써서 올렸고, 다시 주자(朱子)의 첩황고사(貼黃故事)에 따라 교주(繳奏)로 상세히 진술하였다. 이 얘기는 일성록(日省錄)에 실려 있어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이 사당은 전에 장흥군의 경내 동쪽에 있었으나 지난 갑인년(甲寅年, 1914)에 육정신(六丁神)의 거두어간 바 되어 지금 다시 남산(南山)의 뒤쪽 예양강(汭陽江)가로 옮겨 세웠다. 그것을 유지하는 계책은 전적으로 계(契)를 세운 것에 달려있었다. 계장(契長) 김영익(金榮翊)과 김석신(金晳信) 등이 편지를 보내 나에게 그 일을 기문(記文)으로 적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내가 어찌 늙어 글을 그만두었다고 감히 고사하겠는가? 마침내 그들의 이름을 왼쪽에 함께 적어 살펴보는데 편리하게 한다.
기실(記室) 박영수(朴永壽), 수성별장(守城別將) 임기남(任琪南), 수성통장(守城統將) 주두옥(周斗玉), 수성호위장(守城護衛將) 주열우(周烈佑), 수성천총(守城千摠) 김창조(金昌祚)·여갑섭(呂甲燮)·최응륜(崔應倫)·최성두(崔誠斗)·김규화(金奎華)·김태우(金泰佑)·오학인(吳學仁)·손성모(孫誠模)·김민조(金民祚)·이봉주(李俸柱)·송재영(宋在永)·여무섭(呂武燮)·여동윤(呂東允)·신응태(申應兌)·김주립(金柱立)·김주오(金柱五)·여동근(呂東根)·송승묵(宋承黙)·손창국(孫昌國)·이홍서(李洪瑞)·신동채(申東采)·손여근(孫汝根)·신동신(申東信)·김기삼(金基三)·주채곤(朱采坤)·김흥두(金興斗)·서관종(徐官宗)·송재섭(宋在燮)·엄희교(嚴熹敎)·신현립(申鉉立)·김연조(金連祚)·신현섭(申鉉燮)·김덕민(金德敏)·임태옥(任泰沃)·김천기(金天祺)·신응연(申應淵)·조봉국(趙奉國)·주창영(周昌英)·김문조(金文祚)·송재완(宋在完)·오필근(吳必根)·주점순(周点順)·임병원(任炳元)·박재규(朴在奎)·임병숙(任炳琡)·여형탁(呂亨鐸)·조복암(趙福巖)·임정화(任正華)·손봉식(孫奉植)·조한길(趙漢吉)·김희진(金喜鎭)·주복현(周福鉉)·김칠두(金七斗)·송낙진(宋洛鎭)·이화민(李化玟)·김석현(金錫鉉)·김영만(金英萬)·손민돈(孫玟敦)·신천동(申千同)·손봉규(孫奉圭)·주이훈(周伊勳)·장낙도(張洛道)·최정두(崔定斗)·김병엽(金秉燁)·김양균(金陽均)·박팔홍(朴八洪)·김청길(金靑吉)·조금암(趙金巖)·장동석(張同石)·이영근(李永斤)·정승문(鄭升文)·김준삼(金俊三)·김덕손(金德孫)·김분실(金分實)·김청산(金靑山)·김갑록(金甲祿)·장순삼(張順三)·오만길(吳萬吉)·주몽길(周夢吉)·오춘반(吳春伴)·김유신(金有信)·오부조(吳夫祚)·양규화(梁圭化)·하영암(河永巖)·서윤숙(徐允叔)·이성민(李成民)·이태문(李太文)·김명숙(金明叔)·임익선(林益先)·김익두(金益斗)·주봉묵(朱奉黙)이 그들이다.
아! 군사가 패하면 장수가 죽는 의는 없어지고, 군대를 무너지게 하고 나라를 욕되게 한 장수는 전혀 부끄러움이 없구나. 그 폐단을 살펴보면 모두 의를 사는 것보다 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장흥(長興)처럼 의를 따라 죽은 장사(將士)는 의가 귀중하다고 할 만하다. 300주(州)의 땅을 지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장흥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굽히지 않았다면 시천(侍天)의 무리가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숨을 쉬는 것을 용납했겠는가? 삼국(三國)은 반드시 간과 뇌가 땅에 버려지는 참혹한 재앙이 없었을 것이고, 우리나라는 자연히 나라가 망하는 탄식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그래서 천하에서 가장 두렵고 가장 미워하는 것은 삼군(三軍)의 전모(前茅)라고 하였다.

저옹(著雍, 고갑자로 戊이다) 집서(執徐, 고갑자로 辰이다)

무진년(戊辰年, 1928) 양월(陽月, 10월)이 오기 전 5일에

전 호남좌우성지부행인 (前 湖南左右省持斧行人) 완산(完山) 이승욱(李承旭)이

삼가 기문을 씀.

날인(捺印).

주석
전모(前茅) 춘추(春秋)시대에 초(楚)의 전군(前軍)이 사용한 깃발로 행군할 때에 적이 있으면 모(茅)를 들어 후군(後軍)에게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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