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회당 중건기[永懷堂 重建記]
고종(高宗) 갑오 12월 5일에 동학적(東學賊)이 장흥부를 침범하여 부사 박공(朴公) 헌양(憲陽)이 죽고, 기실(記室) 박영수(朴永壽)와 장좌(將佐) 임기남(任璂南)·주두옥(周斗玉)·주열우(周烈佑)·김창조(金昌祚) 등이 모두 따라 죽고 한 사람도 적을 따르지 않았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박공은 내무참의(內務參議)에 추증되었다. 난이 평정된 뒤에 임기남(任璂南)의 아들 병추(炳秋)가 같이 죽은 사람들의 자손과 함께 돈을 내어 계(契)를 만들고, 성(城)안의 동쪽에 사당 1채를 지어 3월 보름에 박공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여러 의사(義士)들도 함께 제사를 모시는 것을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았다. 순무사(巡撫使) 이도재(李道宰)가 장흥(長興)에 왔다가 이 일을 듣고, 그 사당의 이름을 영회당(永懷堂)이라고 이름하고 그 계에 부조도 하였다. 어사 이승욱(李承旭)도 그들을 위해 시(詩)를 짓고 그 일을 크게 드러내었다. 충의가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 진실로 이와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당이 불탔는데, 계장(契長) 김영익(金榮翊)이 부계장(副契長) 김석신(金晳信)과 함께 이것을 없어지게 해서는 안된다고 여겨 예양강(汭陽江) 옆에 땅을 살펴보아 예전대로 중건(重建)하였다. 이때에 여교현(呂敎鉉)에게 예물을 들려서 내게 보내 기문(記文)을 구하였다.
내가 난리 때에 완도(莞島)의 산속으로 피신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 호남의 여러 군(郡)들 중에 문을 열어 적을 들이거나 대그릇의 밥과 병의 음료로 적을 맞이한 곳이 있었으며, 1개 도(道)의 중요한 병권(兵權)을 쥐고 있으면서 성을 버리고 도망가서 산 자도 있었다. 그러나 장흥읍만 처음부터 끝까지 적에 대항하였으니 제(齊)나라의 즉묵(卽墨)과 당(唐)의 평원(平原)도 어찌 이것을 능가하겠는가? 다만 행(幸)과 불행(不幸)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람이 평상시에 비록 취사(取捨)의 구분을 대략 알고 있더라도 하루 아침에 난리에 직면하여 평소에 지키던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 자가 드문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지기(志氣)가 평범하여 구차하게 살아남는 것이 부끄러워할 만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흥의 일은 비록 눈이 온 매우 추운 겨울에 외로운 나무가 여전히 푸른 것과 같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만약 공론(公論)이 조정에서 행해진다면 박공(朴公, 박헌양)은 대관(大官)에 추증되고, 의사(義士)들은 차관(次官)에 추증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사당을 세우라는 명(命)이 내려지고 관리로 하여금 술을 올려 구천(九泉)에 있는 충혼을 위로할 것이다.
그러나 참의(參議)의 추증은 겨우 박공에 그쳤고, 해마다 제사는 겨우 향촌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마련하여 지냈다. 그것이 어찌 충의(忠義)를 권장하는 것이겠는가? 비록 그렇다고 해도 임병추(任炳秋)와 김영익(金榮翊) 등 여러 사람들이 전후에 걸쳐 온 힘을 다해 의로운 행적이 백세(百世) 뒤에도 없어지지 않게 하였다. 이것도 기록할 만하다.
옥사(屋社) 후 23년 임신년(壬申年, 1932) 입추(立秋)에
김해(金海) 김영근(金永根)이 기문을 기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