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 비제[御史碑題]
갑오년(甲午年) 동비의 소요로 장흥성(長興城) 전체가 불에 타고 함락될 때에 부사 박공(朴公) 헌양(憲陽)과 기실(記室) 박공 영수(永壽)가 함께 해를 입었고, 성을 지키던 장리(將吏)와 군졸(軍卒) 90여 명도 모두 따라죽었다. 재앙 뒤에 장리의 자손이 계(契) 하나를 만들어 영회라고 이름하고, 재물을 모아서 박공을 위해 비(碑)를 세우고 제각(祭閣)을 마련해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는데, 함께 죽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제사를 지냈다. 어사(御史) 이공(李公) 승욱(承旭)이 이 읍에 들어와서 이 계첩(契帖)을 가져다가 보고 서문을 지은 뒤에 시(詩)를 덧붙여 그들의 충의를 밝게 펼치고 아울러 100금(金)을 내어 제사비용을 부조하였다. 계원(契員)이 송구스럽고 고마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나무로 된 비를 세워 공의 덕(德)을 칭송하였다. 내가 마침 본 관아에 묵고 있었는데, 호장(戶長) 김범기(金範祺)가 어사의 시와 서문을 보여주며 세운 비의 제목을 간청하였다. 나도 그 충의를 장려하는 처지에서 일어나는 감회가 없을 수가 없어 이에 그 시운(詩韻)에 따라 시를 지었다. 비록 시의 품격은 아니더라도 덕을 칭송하는 말은 될 것 같았다. 박공 두 분의 곧은 충심과 함께 죽은 사람들이 의를 지킨 것에 대해서는 이미 직지(直指)의 글이 있어 감히 부언하지 않겠다.
장부(帳簿)를 살피는 게 귀신같아 책상에 지체되지 않고,
은혜와 위엄이 정사(政事)에 행해져 햇빛과 서리가 함께 하네.
난리 뒤에 폐국(弊局)이 회복되어
공덕을 칭송하여 집집마다 축하의 술잔을 바친다.
충의(忠義)를 갖추어 죽은 넋을 위로하고
하나의 글은 원한을 털어버리기에 충분하다.
100금(金)의 부조에 시사(詩史)를 겸하였는데
감동의 눈물 구원(九原)에 떨어뜨릴 길 없네.
무술년(戊戌年, 1898) 유하(榴夏, 5월) 완산후인(完山后人) 이직호(李直浩)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