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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전라도각읍소착동도수효급소획집물병록성책
  • 기사명
    1894년 12월 일 전라도 각읍에서 잡은 동도수효와 빼앗은 물건을 기록한 성책 [開國五百三年 十二月 日 全羅道各邑所捉東徒數爻及所獲汁物幷錄成冊]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94년 12월
일러두기

광주(光州) 괴수 전수지(全秀志)와 동당(同黨) 3명을 초2일에 체포, 진영(鎭營)으로 압송하여 효수함.

접주(接主) 허인(許仁), 주윤철(朱允哲), 박원화(朴元化)를 3일에 잡아서 곤장을 때려 죽임.

접주 정수해(鄭水海), 이병조(李秉祚)를 4일에 잡아서 포살함.

접주 이□□(李□□)를 6일에 잡아서 포살함.

도당(徒黨) 김판권(金判權), 국영신(鞠永信), 김점□(金占□)은 6일에 잡아 진영에 압송하여 《죄의》 경중을 가려 처리하게 함.

접괴(接魁, 접의 우두머리) 전유창(全有昌)의 처(妻) 이소사(李召史, 조이)와 박□□(朴□□)는 해당 읍에 가두고 그 아비와 남편이 나타나도록 독촉함.

담양(潭陽) 적괴(賊魁) 22명을 □□일에 사로잡아, 그 중에 이문영(李文永)·채대로미(蔡大老未)·장대진(張大辰)·□□□을 포살하였고, 국문보(鞠文甫)와 김희완(金喜完)는 경군(京軍)이 있는 곳에 압송을 했다. 접주 이장태(李長泰)는 일군소(日軍所, 일본군이 머무는 곳)에서 쏘아 죽였고, 같은 무리 15명은 해당 관아에 엄중히 가두어서 《죄의》 경중을 가려 처리하도록 함.

동복(同福) 적도(賊徒) 220명을 12월 3일에 사로잡아, 그 중에 157명은 포살함. 나머지 생포한 63명 중에 최경선(崔敬善)은 일본군이 죽였고, 이형백(李亨伯)은 경폐(徑斃)하였다. 장운학(張雲鶴)·박건양(朴健洋)·김중현(金仲玄)·김병혁(金炳赫)은 신문(訊問)을 겪고 난 후에 죽었다. 59명은 해당 현(縣)에 엄중히 가두고 《죄의》 경중을 가려 처리하도록 했다. 거괴(巨魁) 최자중(崔自仲)과 노익호(盧益浩) 및 전경선(全敬先)은 □□일 잡아서 압송하게 하였는데 중도에서 죽었음.

창평(昌平) 거괴(巨魁) 한충상(韓忠相)은 12월 6일에 잡아서 결박하였다. 동당인 백처사(白處士)·조공서(曺公瑞)·장영옥(張永玉)·하재원(河在元)·김봉철(金奉哲)·백준수(白俊水)·한성옥(韓成玉)·원만석(元萬石)·이석용(李石用)·강판석(姜判石)·정영운(鄭永云) 등은 해당 현의 감옥에 엄중히 가두고 《죄의》 경중을 가려 처리하도록 함.

화순(和順) 거괴(巨魁) 왕왈신(王曰臣)과 접주(接主) 김용보(金用甫)·조번개(曺番介)·김자근(金自斤)은 12월 7일에 잡았는데, 잡을 때에 쏘아 죽였다. 거괴 최성칠(崔性七)과 최범구(崔範九)는 □□일 잡아서 신문을 하다가 죽었다. 도당 서상조(徐尙祚)은 10일에 잡아서 《죄의》 경중을 가려 처리하도록 했다. 순창(淳昌) 소모관(召募官)이 잡은 거괴 전봉준(全琫準)과 양해일(梁海一)은 일본군이 압송하였음.

함평(咸平) 접주 김경오(金京五)·이춘익(李春益)·이재민(李在民)·이곤진(李坤辰)·김성필(金成必)·김인오(金仁五)·김성오(金成五)·김성서(金成西)·노덕팔(盧德八)은 12월 2일에 잡을 때 쏘아 죽였다. 김치오(金致五)·정원오(鄭元五)·정곤서(鄭坤西)·김경선(金京先)은 7일에 잡았고 잡을 때에 쏘아 죽였다. 거괴 이화진(李化辰)과 동당 조병묵(曺丙黙) 등 6명은 8일에 잡았고 《죄의》 경중을 가려 처리하도록 했다. 동당 이두연(李斗連) 등 5명은 9일에 잡을 때에 쏘아 죽였다. 동당 정경택(鄭京宅)과 서기현(徐基鉉)은 10일에 잡아서 《죄의》 경중을 가려 처리하도록 했다. 거괴 윤정보(尹正甫)·장경삼(張京三)·박춘서(朴春西)·정평오(鄭平五)·김시환(金時煥)·윤찬진(尹贊辰)·김경문(金京文)·박경중(朴京仲)은 11일에 잡을 때에 쏘아 죽였다. 거괴 이은중(李殷仲)은 진영에 보내어 엄중히 조사하여 진상을 파악하게 하였다. 동당 이재복(李在卜)과 김원숙(金元淑)은 12일에 잡을 때에 쏘아 죽였음.

무안(務安) 접괴 배정규(裵正圭)와 박순서(朴順西)는 12월 8일에 잡을 때 쏘아 죽였다. 동당(同黨) 서여칠(徐汝七) 등 6명은 《죄의》 경중을 가려 처리하도록 했다. 적당(賊黨) 18명을 9일에 잡았는데, 그 중에 거괴 김응문(金應文)·김자문(金子文)·정여삼(鄭汝三)·김여옥(金汝玉)·장용진(張用辰)·조덕근(趙德根)은 신문을 겪은 후에 죽었고, 동당(同黨) 12명은 《죄의》 경중을 가려 처리하도록 하였음.

능주(綾州) 적괴(賊魁) 13명을 12월 11일에 잡았는데, 그 중에 7명은 잡을 때에 쏘아 죽였고, 6명은 일군소(日軍所, 일본군이 머무는 곳)에서 목을 베어 경계하였음.

영광(靈光) 적괴(賊魁) 송문수(宋文洙)와 오태숙(吳泰淑)은 12월 5일에 목을 베어 경계하였다. 최준숙(崔俊淑) 등 9명은 잡을 때에 쏘아 죽였고, 박인지(朴仁之)등 10명은 압송하여 장위대관(壯衛隊官)에게 넘겼다. 거괴 양경수(梁京洙)는 잡을 때에 쏘아 죽였고, 이현숙(李玄淑)은 목을 베었음.

옥과(玉果) 거괴 전재석(全在錫)과 김낙유(金洛有) 및 황찬묵(黃贊黙)은 12월 12일에 잡을 때 쏘아 죽였다.

무장(茂長) 거괴 20명을 12월 12일에 잡았는데, 그 중에 김병운(金丙云)과 박경석(朴景錫)은 목을 베었고, 송진팔(宋辰八) 등 18명은 겸읍(兼邑)인 영광군(靈光郡)으로 압송하여 《죄의》 경중을 가려 조처하도록 했다. 우진영에서 잡아 가둔 정동관(鄭同寬)은 12월 12일에 죽었고, 이귀표(李貴杓)와 박동만(朴東萬) 및 박정원(朴正元)은 여황(艅艎)·평리(平里)·복암(伏巖) 등 3개 면에서 잡아 《죄의》 경중을 가려 조치하도록 하였음.

남평(南平) 적도(賊徒) 10명을 12월 10일에 잡았는데, 그 중에 5명은 쏘아 죽였고, 접주 나홍집(羅鴻集)·허재중(許在仲)·박신환(朴信煥)·박덕기(朴德己)·김사현(金士玄)은 진영에 압송하여 《죄의》 경중을 가려 조치하도록 하였음.

망운목(望雲牧) 적괴(賊魁) 이익선(李益善)등 4명은 진영(鎭營)에 압송하여 넘기고 엄중히 조사하여 진상을 파악하게 하였음.

고창(高敞) 거괴(巨魁) 손화중(孫化中)은 12월 11일에 잡아서 일병소(日兵所, 일본군이 머무는 곳)에서 압송하여 갔다. 동당 2명은 잡을 때에 쏘아 죽였음.

나주(羅州) 동오면 의거소(東五面義擧所)에서 잡은 강도수(姜道守)와 정사심(鄭士心) 및 이화삼(李化三) 등 13명은 싸울 때에 쏘아 죽였다. 한달문(韓達文)과 주심언(朱心彦) 등 14명은 진영에 압송하여 엄중히 조사해서 실정을 파악하도록 하였음.

구동(區洞) 통수(統首, 민가 조직인 統의 우두머리)가 잡은 접주 최국서(崔局西) 등 3명은 싸울 때에 쏘아 죽였다. 죽포(竹浦)에서 잡은 2명과 오산(吾山)에서 잡은 1명 및 여황(艅艎)에서 잡은 3명을 잡을 때에 쏘아 죽였다. 삼가(三加)에서 잡은 2명과 도림(道林)에서 잡은 1명 및 용문(用文)에서 잡은 2명은 진영에 압송하여 넘기고 《죄의》 경중을 가려 조치하도록 하였음.

소획한 집물 품목 [所獲汁物秩]

대완포(大碗砲) 6자루와 조총(鳥銃) 20자루는 12월 5일에 함평(咸平)에서 노획

화약(火藥) 70근과 조총 17자루는 8일에, 대완포 2자루와 조총 12자루는 10일에 함평에서 노획.

조총 1자루와 접주차정(接主差定, 접주 임명서) 1장 및 염주(念珠) 1건은 김서욱(金瑞旭)에게서 노획.

위조(僞造) 나무 도장 1개와 염주 1건 및 차정(差定) 첩지 2장은 선채□(宣采□)에게서 노획.

조총 2자루는 윤곤□(尹坤□)에게서 노획.

환도(環刀) 1자루는 김도원(金道元)에게서 노획.

성찰(省察) 차정첩지 1장·위조 홍패(紅牌) 1장·위조 어사화(御賜花) 2개·위조 전교(傳敎) 2장·통제사(統制使) 가마패(假馬牌, 가짜 마패) 문서 3건·암행어사(暗行御史) 가마패 문서 3건을 이화삼(李花三)에게서 노획.

철편(鐵片) 1자루와 접주 차정(差定) 첩지 1장을 박화연(朴化然)에게서 노획.

큰깃발 1매·각궁(角弓) 3자루·□궁(□弓) 1자루·화살 29개·동(銅)화로 1좌(坐)·환도(環刀) 1자루·기독(旗纛, 대장깃발) 2매·총 3자루·영기(令旗)1매·연환(鉛丸, 납으로 만든 총알) 30개·화약 4근(斤)·염주 5건(件)·큰소 6마리·진미(眞米, 찹쌀)가루 2말을 주심언(朱心彦)에게서 노획.

이화삼과 박화연 및 주심언에게서 노획한 것들은 동오면(東五面) 의거통수(義擧統首) 유기연(柳紀淵)이 빼앗은 것임.

초토사(招討使) 민(閔)

주석
이장태(李長泰) 장태는 별명인 것 같다. 농민군이 전술무기로 장태를 만들었는데 이를 처음 만든 이가 장흥의 접주 이방언이라고도 하고 장성출신의 이춘영이라고도 하는데 장성에서 최초로 사용했다. 위 두 지도자의 별명이 ‘장태’였는데 이때 담양에서 잡힌 이장태는 이춘영으로 보인다.
최경선(崔敬善) 태인출신의 농민군 5대 지도자의 한 사람. 최경선은 손화중과 함께 광주에 주둔하면서 나주공격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동복으로 도주해 잠복해 있다가 체포되어 나주 초토영으로 끌려와 일본군에 인계되어 서울에서 재판을 받았다.
경폐(徑斃) 사형이 선고된 자가 집행전에 자살하는 것을 말한다.
전봉준(全琫準)과 양해일(梁海一) 전봉준은 순창에서 민병에게 체포되어 순창 주둔 일본군에 인계되어 나주로 압송했다가 서울에서 재판을 받았다. 양해일은 남접의 지도자인 황하일의 변성명으로 보인다.
배정규(裵正圭) 무안의 배씨들은 농민군 지도자로 많이 등장했다. 특히 배규인(裵奎仁, 배상옥이라고도 함)은 무안 대양리출신인데 호남하도 거괴로 일컬었고 그 동생 규찬(奎瓚)도 참여했다. 또 무안 청산리에도 배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곳 출신 배정기(裵楨基)는 집강소를 차리고 활동했으며 그의 동생 정규도 동참했다.
김응문(金應文)·김자문(金子文) 이들은 형제 사이로 무안군 몽탄 일대에 살았는데 김효문을 포함해 3형제가 잡혀 죽었으며 많은 일가들이 연루되었다.
겸읍(兼邑) 수령이 없는 읍을 다른 고을의 수령이 겸임하는 것을 말한다.
손화중(孫化中) 손화중은 나주공방전에서 실패한 뒤 자신의 활동지역이었던 고창의 이씨 재실에서 숨어 있다가 잡혀 나주 초토영에 압송되어 일본정토대장소 감옥에 갇혔다. 서울에서 재판을 받았다.
한달문(韓達文) 나주 감옥에서 가족에게 보낸 옥중편지가 전해진다.
대완포(大碗砲) 대완구포(大碗口砲). 지름 30cm쯤 되는 쇠나 돌로 만든 둥근 탄알을 넣어 쏘던 큰 화포를 말한다.
위조(僞造) 나무 도장 농민군은 임금이 보낸 암행어사 또는 사자를 가장해 물품 조달의 수단으로 써먹었는데 이들은 어사복을 입고 어사화 마패 등을 위조했다.
홍패(紅牌) 문과의 회시(會試)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던 증서를 말한다. 붉은색 종이에 성적·등급·성명을 먹으로 적었다.
철편(鐵片) 철편(鐵鞭). 고들개 철편. 포교가 가지고 다니던 채찍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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