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乙未年, 개국 504년)
당저(當宁, 그 당시의 임금) 32년, 처음으로 본국의 력서(曆書)를 썼다. 본도(本道)의 백(伯)은 연안(延安) 이씨인 이도재(李道宰)이고, 본 수령은 광주(廣州) 이씨인 이병훈(李秉勳)이다.
정월(正月) 계유삭(癸酉朔)
초1일. 맑음.
새벽에 연배례(年拜禮)를 행하고, 이어서 차례(茶禮)를 올렸다. 다만 사당 앞[廟前]에서만 도포를 입고 제사를 올렸으며, 이외에는 감히 도포를 입지 못하였다. 성묘(省墓)하고 세배(歲拜)할 때는 모두 소매 좁은 주의[狹袖周衣]를 입을 뿐이었다. 오후에 인구성책(人口成冊)하는 일로 가마(加馬) 벗 송문숙(宋文叔)의 집에 가본즉, 구암(九岩) 벗 이안집(李安集), 잠암(簪岩) 김▣▣(金▣▣)이 먼저 와 있었다. 문숙(文叔)은 마침 몸이 편치 않아서 일을 하지 못하였고, 세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일을 하였다. 새벽닭이 두 번 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었다.
초2일. 맑다가 흐렸다.
김▣▣(金▣▣)이 그 지친(至親)을 문상(問喪)하기 위하여 인사하고 갔다. 내기(內岐)의 이생원(李生員) 초지(草枝) 어르신이 와서 면의 일[面事]을 상의하다가 석양이 되어서야 가셨다. 이 후로 두 사람이 교대로 적었다. 이날 밤에도 새벽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밤에 눈이 내렸다.
초3일. 눈이 대지에 흩뿌렸다.
온 종일을 종이에 쓰는 일[楮役]로 지냈다. 한밤중이 된 후에야 비로소 일을 마쳤다.
초4일. 해가 들기도 하고 구름이 끼기도 하였다.
며칠 간 주인(主人) 문숙남(文叔南)이 이 마을의 구임(舊任)을 지휘하였다. 아침저녁을 돌아가면서 바치고, 간간이 술과 떡을 내오며, 밤에는 등잔기름을 바꾸어가면서 교대로 일을 같이 하였다. [이리저리 바빠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암(簪岩)의 벗 김윤옥(金潤屋)을 방문하여 술을 두 잔 마시고 나왔다. 그리고 잠시 장동(莊洞)의 김약방 어른(金藥房丈)을 방문하여 억지로 권하여서 한 잔을 마시고는 곧 돌아왔다. 새 면임(面任) 홍봉국(洪鳳國)을 만나니, 전령(傳令)을 꺼내 보여주었다. 새해 전후로 제출된 10여 장(丈)에 종이 가득 긴 글이 쓰여 있었는데, 눈길 닿는 곳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뜻이 가득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기쁘고 진실로 감복하게 하는 뜻이 있었다. 듣자니, 수령이 이날 남해당(南海堂) 제관(祭官)으로서 나주(羅州)에 갔다고 하였다. 듣자니, 초1일에 일인(日人) 30여 명이 영상(嶺上, 경상도)에서 비괴(匪魁)를 압송해 와서 본부(本府)에 유숙하고, 나주(羅州)로 내려갔다고 한다. 초2일에는 경군(京軍) 100여 명이 힘을 합하여[眼同] 비괴(匪魁) 전봉준(全琫準), 손화중(孫化中) · 최경선(崔卿先, 卿先은 景善의 오식) · 홍낙관(洪樂貫, 貫은 寬의 오식)[을 잡아들이고,] 운봉(雲峰) 수성장(守城將) 박문달(朴文達)과 함평수령은 성문을 열어주어 적들을 받아들인 죄가 있어 [같이 잡아서] 나주(羅州)에서 와서 본읍(本邑)에서 유숙하고, 다음날 출발하여 상경하였다고 한다.
초5일. 눈.
머슴[雇兒] 마음금(馬音金)이 각질(脚疾)이 있어서 열흘이 넘도록 일어나질 못하였다. 여덟 집에서 충당하여 수성(守城)하게 할 뜻을 면임(面任)이 전령(傳令)을 가져와서 보여주었다.
초6일. 맑다가 흐렸다.
서쪽 삼덕산(三德山) 조고(祖考)의 산소에 가서 살펴보고 눈을 쓸었다. 그리고 봉연(鳳淵)의 큰집[大宅]으로 가서 가묘(家廟)를 받들어 살피고, 술 두 잔을 마셨다. 돌아서서 상촌(上村)으로 가서 빙장 어른(氷丈)의 환후를 물어보고 또 술을 두 잔 마셨다. 오치댁(梧峙宅)으로 가서 기후(氣候, 氣體, 기력과 體候)를 여쭈었다. 그리고 이상인(李喪人)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억지로 권하여 술을 반 잔 마셨다. 석양이 되어 귀가하였다. 듣자니, 연전에 초군(樵軍)이 나귀 한 마리를 산곡(山谷)에서 습득하였는데, 이날 끌고 가서 아객(衙客, 원을 찾아와서 지방관아에 묵고 있는 손님) 오생원(吳生員)에게 주었다고 한다. 밤에 비가 내렸다.
초7일.
새벽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종일 눈보라가 휘날렸다. 나다니는 사람들이 없었다.
초8일. 날씨가 매우 차가웠다.
듣자니, 그저께 경인(京人)이 짐 싣는 말[卜馬] 40필에 병정들의 의복을 싣고 나주(羅州)로 내려갔다고 한다. 듣자니, 고부(古阜) 황전(黃田)의 김여수(金汝受) 부자가 죄를 나주에서 받았고, 모두 27인이 초6일에 같이 죽었다고 한다. 황혼 무렵에 본 수령이 나주에서 관아로 돌아왔다. 이틀 동안 눈보라가 날리고, 날씨는 지독하게 추웠다. 북쪽으로 올라갈 일이 몹시 힘들 듯하니, 참으로 이른바 ‘왕사를 견고히 하지 않을 수 없다[王事靡鹽]’라는 것이로다.
초9일. 맑고 추웠다.
구산(九山)에 가서 벗 김문백(金文伯)을 보고, 고모님을 찾아뵙고 세배하였다. 유목동(柳木洞)을 찾아 절을 드리고, 곧 부중(府中)으로 들어가 고복(考卜)하고 왔다.
초10일. 입춘(立春)이었다.
이날은 곧 말날[午日]이어서 촌가(村家)에서 콩을 찌는 것[蒸太]은 거의 모두가 이날에 하였는데, 또한 세전(歲前)에는 세상이 어지러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날씨는 맑고 추웠다. 지난 가을 강진(江津, 江은 康의 오식) 고금도(古今島, 현재 완도에 속함)에 와서 살던 머슴[傭兒] 김몽(金蒙)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또 와서 말하길, 장흥(長興) · 강진(康津)과 병영(兵營) 세 곳이 난리의 독을 입어 장흥부사가 죽었고, 병사(兵使)는 몸을 빼어 화를 면하였다고 하였다.
11일. 맑고 따뜻하였다.
진흙에 나막신 코가 빠져서 길을 가기에 몹시 어려웠다. 그런데 연촌(硯村) 심서방(沈書房)이 나주(羅州) 박산(博山)에서 저물녘에 왔다. 술통의 술을 마시면서 회포를 풀고, 얼마 있다가 인사하고 갔다.
12일. 맑고 따뜻하였다.
구산(九山) 아저씨가 잠시 들렀다가 곧 갔다. 오후에 읍내의 장을 둘러보았다. 온갖 물건이 값이 뛰어 해가 바뀌기 전보다 두 배나 다섯 배는 되었다. 청어[東鯖] 한 마리[尾]에 1돈 6 · 7푼이었고, 북어(北魚) 한 마리[尾]에 1돈 7 · 8푼이었고, 해의(海衣, 김) 1토(吐)에 3돈이었고, 황육(黃肉) 1냥어치는 반 근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비싸서 못 먹게 되면] 가난한 집 노인은 반드시 평소의 병이 생기고 말 것이니 한탄스럽고 한탄스럽다.
13일. 맑고 따뜻하였다.
고금도(古今島)에서 어떤 여인이 와서 말하길, 영해(靈海, 영암 앞바다) 아래로는 유리걸식하는 사람들이 길바닥을 메우고 [구걸하느라] 가게를 채웠으며, 포대기에 어린아이를 업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장보러 가는 듯이 계속 이어져 끊이질 않는다고 하였다. 듣자니, 본부(本府)의 오가병정(五街兵丁)과 수성군(守城軍)이 밤이 새도록 수직(守直)하되, 연전부터 지금까지 하룻밤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14일. 맑음.
선봉장(先鋒將) 이규태(李圭泰)가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나주(羅州)에서 올라왔다. 일인(日人)이 전진(前陣)이 되어 본부(本府)로 들어갔다가, 오후에 일인들은 곧 출발하여 올라갔다. 이날 밤 우리 마을에서 일곱 짐의 땔감을 향청(鄕廳)에 져다 바쳤다.
15일. 맑음.
선봉(先鋒)이 아침 일찍 군사를 거느리고 올라갔다고 한다. 본면(本面)의 상유사(上有司) · 약장(約長) · 해사원(解事員) 및 각 리(里)의 연장(連長) · 통수(統首)가 사랑(舍廊)에 모였다. 비류(匪類)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문(探問)하고, 3일 안에 다시 실상을 탐문하여 약장(約長)에게 고한다는 뜻을 각 리(里)의 연장(連長) · 통수(統首)에게 지휘하고는 날이 저물어서 자리를 파하고 갔다. 봉연(鳳淵)의 선비 송성위(宋聖爲)가 찾아오고, 광주(光州) 복룡촌(伏龍村)의 벗 김항지(金恒之)가 와서 같이 유숙하였다.
16일. 비.
17일. 맑음.
선동(仙洞)의 등림(嶝林) 표숙(表叔, 외숙)이 왔는데, 외가는 무고하다고 하였다. 석사 정남현(鄭南賢)이 이달 14일 죽었는데, 나이 50에 후사가 없으니 집안에서는 불쌍하고도 불쌍하게 여겼다. 길을 가다가 보니, 일인(日人)과 경군(京軍)이 광주읍(光州邑)에서 담양(潭陽) 애교(艾橋)까지 30리나 이어져 끊이질 않았는데, 만여 명이 올라간다고 하였다. 본읍(本邑)에 갇혀 있던 죄인들이 며칠 사이에 많이 풀려났다고 한다.
18일. 맑음.
초토선봉장(招討先鋒將) 이규태(李圭泰)가 일인(日人)과 경군(京軍) 천여 명을 거느리고 오전에 본부(本府)에 도착하였는데, 각 마을의 부지군(負持軍, 짐꾼)들이 다투어 와서 맞이해 대접하였다. 혹 괜히 도구를 가지고[持械] 돌아온 자들도 있었다. 부군(負軍)에게는 경군소(京軍所)에서 각 사람마다 품삯 5돈씩을 내준다고 하였다. 본면(本面)의 약장(約長)과 각 리(里)의 연장(連長)이 약장(約長) 생원 이초지(李草枝) 댁에서 모임을 가지고, 날이 저물어서야 자리를 파하고 돌아갔다. 흥덕(興德) 가평동(佳平洞)의 석사(碩士) 경천보(敬天甫)가 찾아와서 유숙하였다. ‘금년의 결역(結役, 結稅 속에서 京邸吏 · 營邸吏들에게 주는 급료)은 도결(都結) 25냥씩(협읍[峽邑]은 25냥, 연읍[沿邑]은 30냥)을 마련하여 징납하라고 하였는데, 쌀이건 돈이건 간에 백성들이 원하는 편의대로 시행하라는 뜻이 의정부(議政府)의 관문(關文), 순영문(巡營門, 감영)의 감칙(甘飭), 관가(官家)의 전령(傳令)에 거듭하여 자세하게 밝혀져 있다. 그리고 갑오년(甲午年)의 대동미(大同米)는 반으로 깎아주라고 하여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은택이 따스하게 미쳤다. 추위가 끝난 연후에, 봄볕이 다시 살아나는 듯이, 민정을 살뜰히 살피시니, 소생함을 모두 축하할 일이로다. 대저 갑오년(甲午年)은 호남(湖南) 전체가 봄부터 겨울을 지나도록 비도들의 소요[匪擾]에 놀라 떨었고, 가뭄 속에서 굶주림을 견디었으며,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거두는 일은 그 시기를 많이 잃었었다. 그래서 이러한 조세를 감해주는 은혜를 내리게 된 것이다. 본읍(本邑)에서 작년에 전세(田稅)를 거두지 못한 것은 별도로 각 면의 유원(儒員)들이 정하여 올리되, 서리(胥吏)들의 손을 접근치 못하게 하고, 금년의 도결(都結)을 거두어 올리는 일은 읍에는 향원(鄕員)을 두고, 면에는 면원(面員)을 두되, 역시 서리배(胥吏輩)들이 그 사이에 간여치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한다.
19일. 맑음.
경천보(敬天甫)가 인사하고 갔다. 구암(九岩)의 벗 이안집(李安集)이 기산(岐山)에서 찾아왔다가 잠시 후 인사하고 갔다. 오후에 황룡시(黃龍市)를 둘러보았는데, 소 값이 해가 바뀔 때보다 많이 떨어졌고, 물가도 다소 떨어졌다고 한다. 이날 밤 동장(洞長)이 전세색(田稅色)의 사통(私通)을 가지고 와서 말하길, 작년의 전세(田稅) 중에서 거두지 않은 것을 거두어 올리려고 관가(官家)에서 내일 본리(本里)에 행차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밤도 없이 각 리(里)의 [전세를] 거두지 않은 작인(作人)이 있는 곳에 지위(知委, 지시)하라고 하였다. 또한 전령(傳令)을 본즉, 순영(巡營, 감영)의 감결(甘結), 의정부(議政府) 관문(關文)에, “윤음(綸音)으로 칙령(飭令)하신 말씀의 뜻은, 지금 이후로 우리 동방은 자주 독립국으로 대군님(大君主)이 섭정(攝政)함을 고하고[誓告], 짐(朕)이란 글자를 쓴다. 개국(開國) 503년 갑오(甲午) 12월 13일 칙령을 반포한다[頒飭].”라는 것이었다.
20일. 맑고 따뜻하였다.
전세색리(田稅色吏)가 와서 말하길, 금일 내로 [전세를] 거두어 올리지 않은 각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미리 기다리게 할 것인즉, 사또(使道)는 내일 행차할 것이라고 하였다. 각 리(里)에서 세미(稅米) 3석을 가지고 와서 두었다. 상유사(上有司)와 면임(面任)은 아침에 나왔다가 저물어서 돌아갔다. 이날 밤 비가 내렸다.
21일. 비.
관가(官家)에서 나와서 바치는 것을 감독하였다[監捧]. 쌀과 콩[米太]은 합하여 17석을 바쳤는데, 매 곡(斛)마다 들어가는 것이 16두(斗)여서 법성납(法聖納)보다 줄어든 것이 2두(斗)였다. 관가(官家)는 밤이 되어서야 관아로 돌아갔는데, 병정(兵丁) 10여 명이 각자 등불을 들고 총을 메고 호위하여 갔다.
22일. 맑음.
관가(官家)에서 아침 일찍 행차하여 당장에 봉납해야 할 50석을 받아 둔 후, 곧바로 읍 동쪽 구산(九山)으로 가서 감봉(監捧)하고, 오후에 관아로 돌아갔다. 이날은 곧 대원군(大院君)의 수신(晬辰, 생신)이어서 관사(館舍)에 참석하여 하례를 올렸는데, 동헌(東軒)에서는 잔치를 베푼다고 하였다. 오후에 전세(田稅)를 바치지 않은 작인(作人)을 압송하는 일 때문에 저물어서 부중으로 들어갔다가 밤에 집으로 돌아왔다.
23일. 맑음.
죽남(竹南)의 족인(族人) 이경(而景)이 와서 유숙하였다. 밤에 비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쳤는데, 흡사 땅이 흔들리는 듯했다.
24일.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개울물이 차올라 보를 넘었다. 오후에 이경(而景)이 인사를 하고 떠났다. 나는 가마(加馬)에 가서 국영심(鞠永心)을 찾아보고, 작년에 잃었던 가승(家乘, 조상의 내력)을 찾아왔는데, 술을 사서 대접하고 기쁜 마음을 표하였다. 그리고 벗 송문숙(宋文叔)과 이안집(李安集)을 차례로 찾아보았으나 모두 출타하고 없어 보지를 못하였다.
25일. 날씨는 맑고 추웠다.
우수(雨水)였다. 듣자니, 그저께 본읍(本邑)의 수성군(守城軍) 3백 명이 수를 채우고 점고(點考)를 받으며 오늘까지 3일을 번을 들었다고 한다. 외연(外硯)의 벗 심덕행(沈德行)이 찾아와서 곡자(曲子, 누룩) 1통(同)을 사가지고 갔다. 오후에는 흐리고 바람이 불다가 눈이 내렸다. 제촌(堤村)의 벗 김경보(金卿甫)가 잠시 들렀다가 곧 돌아갔다.
26일.
눈이 온 대지를 덮고, 눈보라가 크게 일어서 날씨가 보통 때와 달랐다. 방안에 물을 떠 놓은 것이 밤을 지난 후에는 얼음이 되었다. 추위가 대한절기(大寒節)보다 심하였다.
27일. 맑고 추웠다.
땔감을 사려고 서쪽 삼덕산(三德山)에 가서 광주(光州) 어르신의 환후를 여쭈었다. 그리고 임곡(林谷)으로 가서 사장산(社場山) 어르신께 절을 올리고 몇 마디 나눈 후 잠시 치삼(致三) 김형(金兄)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곧 돌아서서 대곡(大谷)으로 가 원당(院堂) 어르신께 절을 올리고, 이어서 성관(聖觀) 보(甫)를 방문하였다. 저물어서 귀가하였다. 땔감은 살 곳이 없었다. 공연히 눈 속에서 고생보따리만 사들고 왔다.
28일. 맑고 추웠다.
영광(靈光) 진천동(眞泉洞) 벗 김화숙(金化叔)이 찾아와서 몇 마디 나눈 후 장동(壯洞)으로 간다고 하였다. 오후에 하촌(下村)으로 가서 촌계(村契)에 참석하였다. 상하촌(上下村)의 계를 나누느냐 모으느냐 하는 일을 두고 두 가지 논의를 질질 끌다가 술만 몇 순배 돌린 후에 곧 올라왔다.
29일. 비.
봉연(鳳淵)의 비부(婢夫) 연술(連述)이 와서 말하길, 그의 상전 생원님[生員主]의 환후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고 한다.
30일. 흐림.
오후에 연촌(硯村)의 심서방(沈書房)을 신행(新行)의 예를 올리고 나주(羅州) 박산(博山)의 누이 집에서 온 것을 가서 보았다. 후에 그의 종형(從兄) 치일(致一)이 저물어서 도착하였고, 나도 유숙하였다. 어제 사문사(赦文使, 사면문서를 전달하는 사자)가 지나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