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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2월대(十二月大) 계묘삭(癸卯朔)

감사(監司) 이도재(李道宰)는 연안(延安) 사람. 본수(本倅, 군수) 이병훈(李秉勳)은 광주(廣州) 사람. 선봉장(先鋒將) 이규태(李奎泰)는 덕수(德水) 사람. 다음해의 책력[曆書]은 대조선(大朝鮮) 개국(開國) 504년 을미(乙未)로 쓴다고 하였다.

초1일. 맑음.

본리(本里)의 동임(洞任)이 이방(吏房)의 사통(私通, 공사에 관하여 편지 등으로 사사로이 연락함)을 가지고 와서 말하길, 경군(京軍)의 선진(先陣)이 금방 읍으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급히 땔감과 짚신을 져 보내고, 오후에 도착한 부군(府軍)은 총 천 명에 가까운데 그 중 왜인(倭人)이 백 명이라고 하였다. 이날 밤이 깊어가려는 때, 또 군량(軍粮) · 군전(軍錢) · 마태(馬太, 말먹이 콩)에 관한 령이 있어 밤새도록 쓸어 거두어서 보냈다.

초2일. 맑음.

본부(本府)의 관속(官屬)들이 본관(本官) 이병훈(李秉勳)의 신연(新延, 신임맞이)을 맞이하려고 새벽에 전주(全州)로 떠났다고 하였다. 초토선봉(招討先鋒) 이규태(李圭泰)가 군사들을 멈추게 하고 머물러 쉬면서, 각 면과 리로 전령(傳令)을 보내 효유(曉諭)하고, 부내(府內)의 접주(接主) 세 집을 부수었다는 소문이 돌자 광주(光州)에 머물러 있던 동학군은 이미 풍비박산하였다고 한다.

초3일. 맑음.

초토소[招討所]에서 보낸 군사들이 죄인들을 각처에서 찾아내어 잡아들였고, 본읍(本邑)의 장교(將校)들은 군사들을 호궤하려고 본리(本里)의 농우(農牛)를 끌고 가려다가 잘 조처하여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날 밤 쌀과 콩을 거두어들이라는 령이 또 나와서, 즉시 거두어서 보냈다.

초4일. 맑음.

경군과 왜군 백여 명이 마을 앞을 지나 영광(靈光) 사창(社倉)으로 가서 접주(接主) 세 사람을 잡아 본부(本府)의 사격장[射場]에서 죽였는데, 그 중 하나는 슬내(膝內)의 손덕수(孫德秀)라고 하였다. 경군(京軍) 10여 명이 신평(新坪) 김씨의 집[金氏家]에 들어가서 소와 말을 끌고 가고, 돈과 재물을 찾아내어 가져갔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내동(內洞)에 구덩이를 파고 장막을 엮어두었는데, 10여 인은 숨을 만하였다.

초5일. 흐림.

경군과 왜군 수백 명이 모두 영광(靈光)을 향하여 가고, 오직 선봉대장(先鋒大將, 이규태)만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영에 머물렀는데, 백 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듣자니, 수일 전에 나주(羅州) 수성군(守城軍)이 광주(光州) 사창(社倉)으로 출진하였는데, 광주(光州) 수성군(守城軍)이 동학당[學黨]을 유인하여 선봉(先鋒)이 되었고, [나주의] 수성군은 후진(後陣)이 되어 사창(社倉)을 향해 가서 후진에서 포를 쏘면서 엄호하고 죽여 동학당[學黨]이 흩어져 도망쳤다고 한다. 기포(起包)했다고 한 곳으로 마을을 돌면서 접주(接主)를 잡아갔다고 한다. 광주(光州) 수남(水南)의 접주(接主) 정지학(鄭志學)은 남평(南平) 관아 가운데로 들어가서 수령에게 방포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경군(京軍) 한 사람이 본리(本里)로 들어와 짐을 싣는 소[駄牛] 1필을 끌고 가고, 경군이 각 접주들의 집에서 찾아내온 소들을 부중(府中)에 내다 팔았는데, 값이 아주 헐했다고 한다.

초6일. 흐리다가 저물녘에 개었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전령(傳令)이 재차 나왔는데, 감사의 뜻[辭意]이 분명하고도 알맞았다. 오후에 봉연(鳳淵)으로 가서 저녁때 증조비(曾祖妣)의 기제(忌祭)에 참석하였다.

초7일.

집으로 돌아가다가 길에서 금평(錦坪)의 김교리(金校理)를 만나 말을 주고받다가 왔다. 교중(校中, 향교)에서 이날 유회(儒會)를 연다는 회문(回文)이 도착하였다. 오후에 교중(校中)으로 들어가려고 시가(市街)를 지나는데, 경군(京軍)이 사격장에 모여서 세 죄인을 태워죽였다. 교당(校堂)에 이르러보니, 향중(鄕中)의 진신(搢紳)과 장보(章甫)들이 크게 모여들어 향청의 뜰과 양사재(養士齋)를 가득 채웠다. 하남(河南)의 기교리(奇校理), 하사(下沙)의 기옥구(奇沃溝), 고산리(古山里)의 기참봉(奇參奉), 금평(錦坪)의 김교리(金校理), 제촌(堤村)의 이진사(李進士), 기동(基洞)의 김진사(金進士), 내현(內峴)의 반진사(潘進士) 등이 다 와서 참석하였다. 의제는 왕사(王師)를 호궤하고 비류를 쓸어버리는 일에 미치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초8일.

동산(東山)의 손오위장(孫五衛將) 집에 들어가서 영광(靈光) 단지동(丹芝洞)의 이진사(李進士)를 만나 서장(書狀)에 대해 상의하고, 집으로 돌아와 요기하였다. 그리고 곧 돌아서서 또 들어가는데, 눈이 동산(東山)에 쌓여 있었다. 날이 저물어서 귀가하였다. 이로부터 한 유소(儒所)에서 소 1필, 쌀 2석을 부조로 대장소(大將所)에 바치고, 경내의 사민(士民)들도 모두 공궤(供餽)할 것을 들고 와서 바쳤다. 각 읍(邑)의 죄인들은 차례로 잡혔고, 전봉준(全琫準)이 순창(淳昌) 땅에서 잡혔다고 한다. 이날 밤 수성군(守城軍)이 갑자기 영광댁(靈光宅)으로 침입하여 탈을 일으키고 갔으며, 김몽치(金蒙治)를 잡아갔다고 한다.

초9일.

눈이 온 땅을 덮었다. 교중(校中)에 갔는데, 교중(校中)에서 소 1필, 쌀 3석을 선봉(先鋒)에 부조로 바쳤다. 고산리(高山里)의 기참봉(奇參奉)은 그의 문하생을 이끌고 와서 군사들을 호궤할 소와 양식[糊軍牛粮]을 바치고, 단자를 드린 후[呈單] 갔다. 교중(校中)의 모든 인원[諸員]이 다 귀가하였는데, 선봉장(先鋒將)이 군사를 이끌고 나주(羅州)로 갔다. 듣자니, 벽사찰방(碧社察訪, 社는 沙의 오식)이 동학군(東學軍)에게 쫓겨나 어제 본부(本府)로 왔다고 한다. 장흥부사와 이방 · 호방[吏戶]이 동도(東徒)들에게 탄환을 맞았고, 이러한 연고로 와서 청함에 따라 선봉(先鋒, 이두황)이 급히 갔는데, 선봉(先鋒)이 떠나려고 할 즈음에 수성장(守城將)에게 분부하여 세 죄인을 사격장[射場]에서 태워죽이라고 하였다. 그 중 하나는 북일(北一) 구해(九海)의 김선오(金善五)였는데, 선달 기우선(奇宇先)의 아우가 칼을 빼어 머리를 베고 배를 갈라 쓸개를 꺼냈다 한다. 오시에 경군(京軍) 2백여 명이 남쪽에서 올라와서 전주로 가려고 하는데, 전주에서 급한 기별이 왔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한다고 하였다. 석양 무렵에 귀가하였다. 이날 밤 수성군(守城軍) 2명이 갑자기 두암댁(斗岩宅)을 들이닥쳐 돈을 토색(討索)하여 갔다.

초10일.

듣자니, 금곡(金谷)의 한덕일(韓德一) · 김명달(金明達) · 공기로(孔琪老) 등이 다 잡혔다고 한다. 박호장(朴戶長)이 말과 나귀를 끌고 갔다.

11일.

듣자니, 통내(桶內)의 김백명(金伯明)이 역시 잡혔다고 한다.

12일.

본 수령 이병훈(李秉勳)이 이날 진시(辰時)에 도임(到臨)하였는데, 본도(本道)의 소모사(召募使)를 겸직하였다. 면임(面任)이 전령(傳令)을 가지고 와서 첩련(帖聯, 첩으로 붙인 글귀)을 보여주는데, 본백(本伯)이 위무사(慰撫使)를 겸한다는 감칙(甘飭, 지시공문)과 윤음(綸音, 임금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모으라는 뜻이 정성스레 거듭 밝혀져 있었다. 오후에 교중(校中)에 들어가 몇 마디 나누다가 돌아왔다.

13일.

정소(呈訴, 呈狀, 소장을 관청에다 바침)하는 일로 식전에 읍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중지되어 곧 돌아왔다. 이날 향중(鄕中)의 진신(搢紳)들이 다 와서 수령을 배알하였다. 저녁에 교중(校中)에 들어가 유숙하였다. 기교리(奇校理) · 기옥구(奇沃溝) · 이진사(李進士) 및 향유(鄕儒) 모든 인원이 모임에 참석하여 향약(鄕約)에 관해 의논을 분분하게 나누었다.

14일.

교중(校中)에서 돌아왔다.

15일.

정소(呈訴)의 뎨김(題音, 결정문)에, ‘검은 물을 들여도 검은 물이 들지 않기는 진실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湼不緇誠難矣]. 그런데 스스로 새로워진다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일이다[自新尤美事]’라고 하였다. 비로소 근심을 풀고 아침 일찍 나주(羅州)로 나아갔는데, 풍치 어르신(風峙丈)이 함께 갔다. 바람이 불고 날씨는 매우 차가웠다. 대하(大河) 앞 주점에 들러 술을 석 잔 마시고 곧 떠났다. 길에서 색우포(塞右浦)를 보니 불에 타버린 인가가 근 40호였다. 천동(泉洞) 한 마을은 모조리 타버리고 남은 집이 없었다. 북창(北倉)에 이르러 동서로 서로 갈 길이 나누어졌다. 노동(魯洞)의 누이 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난리를 겪은 일을 이루 형언할 수 없고 잃어버린 것이 40냥어치는 된다고 하였다. 돌아서서 내동(內洞)으로 갔다. 북창(北倉)에서 주엽정(周葉亭)에 이르기까지 30리 길인데, 점막(店幕)이 다 타버리고 오직 작천점(鵲川店)만이 겨우 불길을 면하였다. 저물녘이 되어서 내동(內洞)에 이르렀다. 울면서 사장(査丈) 어른의 영연(靈筵, 靈座, 靈位를 모시어 놓은 자리)에 절을 하였다. 난리를 겪은 후 상사(祥祀, 大祥제사)를 안전하게 거행하였으니 천만 다행이었다. 마을에는 닭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이웃 마을에서 한 마리 수탉을 빌려서 새벽을 알려주는 대가로 팔아 한 꿰미[一貫文]를 얻어 부조로 식후에 주었다[賻給食後].

16일.

나경빈(羅敬賓) 부자와 같이 성중(城中)으로 가서 성루(城壘)를 새로 수리하여 쌓은 것을 보았다. 이른바 왜대인(倭大人)이 일인(日人)들을 거느리고 동헌(東軒)과 모든 공청(公廳)의 일을 주장하고, 목사(牧使)는 노반청(奴班廳)으로 물러나 거처하였다. 일인들이 사대문(四大門)을 수직(守直, 맡아서 지킴)하니, 수성군(守城軍)이 분해하고 한탄함이 그지없었다. 전봉준(全琫準) · 최경선(崔敬善, 敬은 景의 오식)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는데, 일인이 구호(捄護, 捄는 救의 오식)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손화중(孫化中)은 고창(高敞)에서 잡혔는데, 일인 10여 명이 나아가서 중로(中路)에서 끌고 갔다고 한다. 이날 일인과 경군(京軍) 수십 명이 내려왔다. 날씨는 매우 차가웠다. 한기를 맞으면서 돌아와서 유숙하였다.

17일.

인사하고 길을 나서 광산(廣山)에 이르러 용동 어르신(龍洞丈氏)을 배알하였는데, 풍치 어르신(風峙丈)이 마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노동(魯洞)으로 가서 유숙하였다. 어제 진시(辰時)에 응칠(應七) 형이 득남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나주(羅州) 한 경내로 말할 것 같으면, 성중(城中) 근처는 소를 끌고 양식을 싣고[牽牛駄粮] 성으로 들어가 난을 피하였지만, 각 마을의 소들은 싹 쓸어서 빼앗아갔다고 한다.

18일.

돌아오는 길에 일인(日人) 10여 명이 부군(負軍) 50여 명을 이끌고 나주(羅州)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방곡(防谷)에 들어가 역와 어르신(櫟窩丈)을 배알하고, 점심을 먹은 후 인사하고 돌아왔다. 듣자니, 어제 한덕일(韓德一) · 김명달(金明達)을 방포하여 읍중(邑中)에서 죽였다고 한다. 듣자니, 본면(本面)의 상유사(上有司)가 면내(面內) 각 마을의 인구를 성책(成冊)하여 갔다고 한다.

19일.

상유사(上有司) 문숙(文叔)이 동암(冬岩)의 벗 이안숙(李安叔)과 더불어 하유사(下有司)를 거느리고 와서 인구성책(人口成冊)을 다시 고쳐서 갔다.

20일.

본리(本里)의 인구성책(人口成冊)을 다시 고쳐 바로 잡으려고 가마(加馬)에 가서 상유사(上有司) 문숙(文叔)을 찾아뵙고, 상의한 후 돌아왔다. 연촌(硯村)의 심아(沈雅)를 찾아보고, 나주체지(羅州體紙)를 내어주었는데, 주인이 술을 내어 대접해주었다. 저물어서 귀가하였다.

21일.

상유사(上有司) 문숙(文叔)이 벗 이안숙(李安叔)과 더불어 인구성책(人口成冊)하는 일로 교중(校中)으로 가면서 나에게 같이 가자고 청하였다. 교촌(校村)에 이르러 촛불을 밝히고 [인명을] 적는 일을 하는데, 세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베껴 적었다. 새벽닭이 세 번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취침하였다. 각 면의 약장(約長)들이 모두 모여서 규례(規例)에 대해 상의하였고, 곧 호적대장(戶籍臺帳)과 같이 하였다.

22일.

식전부터 교대로 적으면서 성책(成冊)하여 오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일을 마치게 되었다. 그래도 미흡한 곳 1질(一秩)은 집에 돌아가서 고치려고 일을 멈추고 돌아왔다. 시장을 지나다가 본 수령이 수성군(守城軍) 수백 명을 거느리고 크게 위의(威儀)를 떨치면서 죄인 6명을 죽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송무정(宋茂亭)의 공치선(孔致先) 형제, 오현(鰲峴)의 김접주(金接主)였으며, 나머지 세 사람은 그 성명을 알지 못했다. 김(金) · 공(孔) 두 사람은 참수하였고, 네 사람은 총을 쏘아 죽이고는 태웠다. 석양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듣자니, 어제 경군(京軍) 10여 명이 나주(羅州)에서 화약과 탄환을 싣고 전주(全州)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것은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어서 그런 것일 것이다.

23일.

바람이 불고 날씨는 차가웠으며 눈발이 날렸다. 수일 전부터 본 수령이 각 면의 면임(面任) · 서원(書員) · 하유사(下有司)와 각 리의 동임(洞任)에게 전령(傳令)을 내어 병기(兵器)를 거두어들여서 관가(官家)에 바치고, 소위 접주(接主)들 또한 각자 병기(兵器)를 바쳐서 하나라도 빠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인구성책(人口成冊)하는 일로 구암(九岩)에 가서 벗 송문숙(宋文叔) · 이안집(李安集)과 더불어 상의하여 교정(較正)하였는데, 잠암(簪岩)의 김아(金雅), 장산(莊山)의 외손(外孫) 역시 와서 글 쓰는 일을 낮에서 밤까지 번갈아가면서 하였다. 새벽닭이 세 번 우는 때에 이르러서야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닭고기와 술로 창자에 기름칠을 하였다.

24일.

마침 마을에 강신(講信, 향약 때 여러 사람이 모여서 술을 마시며 約法이나 契를 맺음)하는 술자리가 있어 세 순배를 돌렸다. 덕치(德峙)의 김상제(金喪制)와 계동 어르신(桂洞丈) 역시 자리에 참석하여 같이 마셨다. 그래서 [그분들을] 배알하고 잠시 있다가 인사하고 돌아왔다. 구해(九海) 화산(華山)의 족숙(族叔)이 내방하여 유숙하였다.

25일.

날씨가 다소 풀렸다.

26일.

성책(成冊)하는 일로 다시 잠암(簪岩)에 가서 이(李) · 송(宋) · 김(金) 세 친구와 번갈아가면서 적었다. 세 친구는 어제부터 일을 하였다고 한다. 밤이 되어서야 분담하여 하던 일을 마치고, 새벽닭 소리를 들으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때 이생원(李生員) 등림(嶝林) 어르신이 와서 술기운에 말씀을 잘하셨다.

27일.

식전에 귀가하였다. 봉연(鳳淵)의 선비 송성위(宋聖爲)가 찾아왔다. 저물녘에 읍내의 시장에 나가보았는데, 본 수령이 거느린 경군(京軍) 수성군(守城軍)과 육청관속(六廳官屬)과 병대(兵隊)는 칼과 총[釰砲]을 메었고, 노령(奴令)은 깃발과 장대[旗棍]를 잡았으며, 창우(倡優)들은 괭가리와 북[金鼓]을 연주하였는데, 그 위의(威儀)가 아주 엄숙하였다. 어찌 다행하게도 오늘과 같은 날이 찾아와 다시 관군(官軍)의 위의를 보게 되었는가! 사격장[射堂]에 진열하여 있는 호위병이 매우 성대하였고, 병정들은 좌우로 나뉘어 앞에 있었으며, 수성군은 좌우로 나뉘어 뒤에 있었다. 삼반(三班)을 점고(點考)하는데, 이속(吏屬)들은 땅에 엎뎌 있고, 죄인들을 삼반(三班) 가운데서 뽑아내어 법을 집행하였다. 강계중(姜桂中)은 참하여 효수하였고, 강서중(姜西中) · 손경서(孫敬敍) · 정별장의 조카(鄭別將姪) · 손학모(孫鶴模) · 공치광(孔致光) 등 16인은 총을 쏘아 죽였다. 모두 17인이 법의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28일.

교회(校會)가 있다는 것을 듣고, 오후에 교당(校堂)으로 가보니 기옥구(奇沃溝), 제촌(堤村) 이진사(李進士), 기동(基洞) 김진사(金進士) 및 각 면의 약장(約長) 외에 다른 향교(鄕校)에서도 다 와서 모였다. 얼마 있다가 본 수령이 나와서 영문절목(營門節目) 15권(卷)을 각 면의 상유사(上有司)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곧 오가통조약(伍家統條約)이었다. 친히 그것을 입으로 낭송하는데, 백성들을 근심하는 뜻이 뚜렷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줄 계책을 향유(鄕儒)들에게 묻기를 거듭하여 마지않았다. 필경에는 공정(公正)이라는 두 글자로 권장하여 법의 뜻[法意]을 봉행하되,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움을 용납해서는 아니 되고, 만약 사사로움을 용납하는 자가 있다면 비류(匪類)와 같은 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하였다. 수령이 석양이 되어 관사로 돌아가고, 나 또한 집으로 돌아왔다.

29일.

서쪽 삼덕산(三德山)으로 가서 광주 어르신(光州丈氏)의 환후를 여쭙고, 천어(川魚) 한 꿰미로 정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임곡(林谷)으로 가서 사장산 어르신(社場山丈氏)을 배알하고 몇 마디 나눈 후에 돌아왔다.

30일.

구산(九山)으로 가서 상인 김문백(金文伯)을 만나보고, 자세한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고모님 댁을 찾아가 몇 마디 나누다가 돌아왔다.
나주목사 민종렬(閔鍾烈, 鍾은 鐘의 오식)이 호남도초토사(湖南都招討使)가 되고, 수성장(守城將)은 정재완(鄭在完)이었으며 홍주(洪州)목사 이승우(李承宇)가 호서도초토사(湖西都招討使)가 되었다.
운봉(雲峯) 수성장(守城將)은 박문달(朴文達)이다. 4월 23일 황룡(黃龍)에서 접전을 벌일 때, 대장(隊長) 이학승(李學承)은 싸움에 임하여 발길을 돌리지 않고 싸워 절개를 세우고 의를 위하여 죽었다. 12월 초하룻날, 병영(兵營) 우후(虞候) 정규찬(鄭逵贊)이 병사(兵使)를 강하게 만류하며 더불어서 같이 죽기를 각오하고 성을 지킬 것을 원하였는데, 병사는 겁에 질려서 도주하였고, 우후는 홀로 성안에 머무르면서 화약(火藥)을 태워 없애고, 군기(軍器)를 감추었으며, 끝내 적의 칼끝에 순절(殉節)하였다. 그 손자 원헌(元獻) 역시 적에게 달려들어 의를 위해 죽었다. 가히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 할 만하였다. 강진(江津) 뇌산(雷山)의 처사(處士) 김한섭(金漢燮)이 「경시적도문(警示賊徒文)」을 지었다가 동비(東匪)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주석
대조선(大朝鮮) 개국(開國) 이해 갑오개혁에 따라 청나라 연호를 사용치 않고 조선왕조 개국 연대를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조선의 접두사로 대(大)를 붙이기로 하였는데 관례에 따라 역서를 반포할 적에 이 형식을 따랐다. 청나라 간섭을 배제하려는 의도였다.
초토소[招討所] 초토영. 정부에서는 1894년 11월 잔여 농민군을 토벌키 위해 충청도 연안인 홍주에 호연초토영(湖沿招討營), 호남의 나주에 호남초토영을 별도로 설치했다. 초토영의 군사들은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농민군 색출에 나서 많은 비리를 저질렀다.
장흥부사 이해 12월 초순 이방언·이인환 등이 이끈 농민군이 장흥 관아를 점령했는데 부사 박헌양(朴憲陽)과 구실아치들이 반항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관아의 인부를 빼앗겼다.
검은 물이 들지 않기는 진실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湼不緇誠難矣] 『논어(論語)』 양화제17(陽貨第十七)에 “견고하다고 말하지 않더냐? 견고하면 갈아도 닳아지지 않는 법이다. 희다고 말하지 않더냐? 희면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 법이다(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 라는 내용이 있다.
왜대인(倭大人) 일본군은 12월 초순, 정토군(征討軍)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부대를 결성하고 나주에 그 본부를 두었다. 일본군 대대장인 소좌 미나미 쇼시로로(南小四郞)가 지휘했다. 왜대인은 일본군 대대장을 말한다.
노반청(奴班廳) 노방청(奴房廳)의 오류. 지방 관아의 관노들이 출근해 대기하는 건물. 가장 낮은 관아 건물이다.
나주체지(羅州體紙) 체지(體紙)는 체지(帖紙)의 오류. 관아에서 구실아치를 고용할 때 주는 임명장, 곧 사령(辭令)이다.
약장(約長) 향약의 우두머리. 향약은 군현 단위 또는 면 단위로 실시하면서 그 책임자를 두었다.
육청관속(六廳官屬) 육청은 육방(六房)의 오류. 육방은 지방관아에 딸린 이방·호방·예방·병방·형방·공방인데 여기에 딸린 관속을 아전 또는 구실아치라 부른다.
삼반(三班) 지방 관아에 딸린 아전 장교, 관노와 사령 등 하리(下吏)를 총칭하는 용어.
오가통조약(伍家統條約) 농민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향촌을 오가작통의 관례에 다라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만들고 통장을 두고 이를 다시 면 단위로 묶어 통수를 두었다. 그 조약에는 농민군 색출이나 물품 공급 따위의 의무 조항을 두었다.
운봉(雲峯) 수성장(守城將)은 박문달(朴文達) 문달은 봉양(鳳陽)의 자임. 운봉은 박봉양이 수성군을 조직해 완강하게 버텨 나주와 함께 농민군이 진입하지 못한 곳이다.
병영(兵營) 우후(虞候) 여기 병영은 강진에 있는 전라병마절도사영임. 12월 초순 농민군이 병영을 공격하자 병사 서병무(徐丙懋)는 도주했으나 우후인 정규찬은 화약고에 불을 질러 저항했다.
강진(江津) 뇌산(雷山)의 처사(處士) 김한섭(金漢燮) 강진(江津)은 강진(康津)의 오식. 이곳 유림인 김한섭은 농민군 토벌을 위해 수성군을 조직하려고 통문을 돌렸고 이해 12월 초순 농민군이 강진현 관아를 점령할 때 저항하다가 동문수학인 이방언에게서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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