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령(傳令)
본관(本官, 수령)이 임지에 다다른 후 민간을 찾아 살펴본즉, 지조를 지키고 삼가는 선비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중의 허실을 알지 못하겠기에 홀로 가슴을 치며 탄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서면(二西面) 용산(龍山)의 강영중(姜泳重)은 곧 굳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 본촌(本村)의 사람인 최영섭(崔榮涉)·박윤화(朴胤和), 그리고 고창(高敞) 사람 강수중(姜守重)·유광희(柳光熙)·김응묵(金應默) 등 너덧 사람이 짝을 지어 밤에 관아로 들어와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그 중 강영중·강수중과 유광희·김응묵 등은 유명한 벼슬아치의 후손으로, 5백 년 동안 이어온 강상(綱常)을 지킬 수 있는 자들로서, 그들의 의기는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하여도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최영섭·박윤화도 다 삼강(三綱)을 아는 사람들로 그들 기절(氣節)의 강개(慷慨)함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이른바 “충신(忠臣)을 구하려거든 반드시 효자(孝子)가 있는 가문에서 한다.”는 것이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이후로 흥성(興城)·모양(牟陽)과 비록 영주(瀛州, 정읍)·장사(長沙, 무장) 사이에서라도 사람을 가려서 그 이름을 나열하고, 가표(家表)를 찍어내 이때의 청탁(淸濁)을 밝히니, 모두가 지조를 지니고 행하는 사족(士族)이었다. 비록 미천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다 저들 동도[彼東]들에게 물들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저 동도들이] 사방으로 소란을 피우고 요동치되,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수가 적어, 담당 영[所營]에서도 오히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지금 왕사(王師)가 인근 장소에 도착하여 둔을 치고, 죄를 성토하고 적을 토벌하되 옥석을 분간하여 처리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 백성들의 마음은 죄가 있든 없든 모두가 허둥거리고, 겨우 끼니나 잇고 숨을 쉬고 있는 형편이거니와, 만약 경군(京軍)이 멀리 광주·나주[光羅]지경에 진을 치게 되면 흩어져 다니는 적들이 입히는 해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때를 당하여 너희들이 같이 소리를 지르고 일제히 일어나 흩어진 적도(賊徒)들을 무찔러 죽인다면, 어찌 안전을 획득하는 좋은 계책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너희들은 태반이 백면서생들인지라, 용기와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 드물 것인즉, 더불어 안락함을 같이 누릴 수는 있지만, 더불어 환난을 같이 할 수가 없는 자들이요, 근심 속에서 즐거움이 찾아오고, 즐거움 속에서 근심이 찾아온다는 도리를 모르는 자들이니, 이것이 이른바 관(官)이 우선 염려하는 바이다. 이에 영을 내어 깨우치니, 이후 비록 어떤 날에 만약 시급한 회문(回文)이 있게 되면, 같은 읍이건 다른 읍이건 논할 것 없이 모두 힘을 합쳐 대의를 향해 나아갈 것이로되, 만약 혹시라도 이를 위반하고 경계를 넘는 자가 있다면, 먼저 그 목을 베어 군율을 엄히 시행할 것이다. 이에 깊이 유념하여 거행함이 마땅할 것이다.
갑오년 11월 29일
관(官) 압(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