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사실(擧義事實)
장보(章甫, 儒者의 冠, 儒者)의 창의(倡義)는 예부터 있지 않았던 일이었으나 우리 동방의 용사지변(龍蛇之變)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동도(東徒)들의 작란(作亂)에 미치어 붓을 던지고 창을 휘두르는 선비들이 연이어서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헌원(軒轅)이 전쟁을 벌인 이래, 처음 있는 유생으로 구성된 병사들[儒兵]이다. 그들의 의(義)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대개 춘추(春秋)의 법에 따르면, 난신적자(亂臣賊子)는 사람마다 죽일 수 있다는 것이 의(義)이다. 어찌 유독 입곡(笠轂)을 타고 호부(虎符)를 가진 연후에 적을 토벌할 수 있겠는가? 도도한 물결처럼 천하에 능히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밝힐 수 있는 곳은 우리 동방[大東]뿐이었다.
넓디넓은 양호(兩湖) 사이에서 능히 천지의 의기(義氣)를 기를 수 있는 자는 유자(儒者)뿐이다. 이는 우리 열성조(列聖朝)께서 사기(士氣)를 배양하고 예의(禮義)의 가르침을 암암리에 밝히신 공효인데, 왕왕 변란을 당한 시기에 나타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아! 유도(儒道)가 쇠미(衰微)해지고 시운(時運)이 판탕(板蕩)하여, 소위 동학지도(東學之徒)들이 청령(靑領, 학자들이 입는 옷, 학자)를 가탁하여 녹림(綠林, 도적떼)를 불러 모으고, 세상을 미혹하게 하는 삿된 말을 퍼뜨리며, 감히 하늘까지 넘치는 재앙을 낳고, 마음속으로부터 길이 아니고 규칙에 거스르는 것을 기도한 맹아가 몇 해 전부터 자라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다가 갑오년(甲午, 1894년) 봄에 고부(古阜)·장사(長沙) 등지에서 터져 나와, 군현(郡縣)을 타고 넘어 곧바로 완부(完府, 전주)를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성상(聖上)께서는 황지적자(潢池赤子)라 보시고 차마 그들을 벨 수가 없어 관리를 보내어 그들의 죄를 묻게 하시고, 특별히 너그러이 용서[寬貸]하여 귀화(歸化)토록 하였다.
그러나 어리석은 그들 흉도(兇徒)들은 끝내 [그 은혜에] 감격할 줄을 모르고, 더욱이 불만 섞인 무리들[不逞之群]을 모아 들여 이리저리 날뛰면서 높은 벼슬을 누리던 옛 족속들과 밭 매고 사는 어리석은 백성[畎畝蚩氓]들을 협박하고 강압하여 아울러 그 무리에 들도록 하였다. 그래서 성곽과 해자를 건너 타고 점령하며, 군기(軍器)를 빼앗고, 향리(鄕里)를 겁탈하고 노략질하며, 재화와 보물을 훔치고, 사람들의 집을 불태우며, 사람들의 무덤을 파헤치고, 부녀자들을 욕보이며, 의관(衣冠)을 찢어 버리는 등 [그들이 부리는] 요사스런 재앙이 하늘에 미치고, 윤리를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이는 참으로 만고(萬古)에 없던 변괴이다.
양호(兩湖) 여러 읍[列邑]의 수재(守宰)들은 혹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혹 능욕을 보기도 하여 모두가 그 자리를 잃었다. 그런데 오직 금영(錦營, 충청감영)·금성(錦城, 나주)만이 능히 방어해 내고 지켜 싸웠으니, 우뚝하게 홀로 광풍처럼 몰아치는 티끌 속에서 남아 있게 되었다. 어찌 금수산천(錦繡山川)만이 우리나라의 보배일 뿐이리오? 한 조각 외로운 성에서 더욱 만장(萬丈)의 의로운 소리[義聲] 높였으니, 반드시 ‘금산(錦山)이 순절(殉節)한 곳’이란 명성보다 아름다운 이름을 양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흥성(興城, 흥덕)의 수령 윤후(尹侯, 尹錫禛)는 구구(區區)한 작은 읍[小邑]으로, 음우지비(陰雨之備)도 없었고, 또한 보장(保章, 章은 障의 오식)해 주는 견고한 지형도 없이, 다만 무형(無形)의 군대를 가슴속[方寸]에서 운용하고, 가죽 아닌 갑옷[非革之甲]을 가슴속에 감추고 앉아서 진무(鎭撫)하되 지켜야 할 곳을 잃지 않았다. 이런 깊은 계산과 멀리 보는 계략은 다른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알아본 자는 본현(本縣, 흥덕)의 사인(士人) 강영중(姜泳重)이었다.
강영중은 평소 [시절을] 슬퍼하고 개탄해하던 선비로서, 평상시에 충의(忠義)로써 자부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국가가 어려운 때를 당하고, 유학의 운수[儒運]가 다해 가는 때를 당하여 늘 답답해하고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산림 속에 몸을 숨기고 지내며, 때때로 막걸리 몇 잔씩을 통음(痛飮)하면서 문득 제갈량(諸葛亮, 촉한의 軍師)의 「출사표(出師表)」를 읊조리고, 북명(北溟, 북해)의 큰 물고기 곤[老鯤]과 같이 양각풍(羊角風, 회오리바람)을 타고 급격히 떠오를[扶搖] 형세를 얻지 못함을 스스로 한탄하고 끌끌 혀를 차기를 마지않았다. 그리고 매번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과 어울렸는데, 그의 삼종형(三從兄) 모양(牟陽, 고창)의 사인(士人) 강수중(姜守重)과 유광희(柳光熙)·이석구(李錫九)·유지보(柳志普), 진사(進士) 김영철(金榮喆), 정언(正言) 정규삼(鄭奎三), 그리고 흥성(興城)의 진사 김상환(金商煥), 사인(士人) 최영섭(崔榮涉)과 박윤화(朴胤和)·임경호(任燝鎬)·박추화(朴錘和) 등이었다. 이들과 종종 서로 만나면 한참 동안 말을 주고받다가 문득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그들이 모의(謀議)한 것은 대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적들의 형세는 날로 불어나고, 한쪽 손으로는 일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산골 집에 머무르고 있던 어느 날 밤, 창가에서 홀연히 가을바람 소리가 일어나는 것을 듣고는 개연(慨然)히 갑옷[鐵衣]을 걸치고 동도들을 정벌할 생각[東征之思]이 일어나 옷을 떨쳐입고 윤후(尹侯, 尹錫禛)를 찾아뵈었다.
윤후 역시 깊은 생각에 잠겨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의병을 일으키겠다는 말을 듣고는, “이것은 나의 뜻과 같다.” 하고 씩씩하게 받아들였다. 이렇게 한 마디 말에 서로 뜻이 부합하여 간담상조(肝膽相照, 뜻이 훤히 드러남)하니, 드디어 서로 더불어 기쁜 마음으로 군사[軍僚]와 부서(部署)를 정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미 그것을 맡을 사람이 있으니, 달리 [다른 사람을] 선택할 필요는 없었고, 다만 의병 자금만 모으면 될 일이었다. 이에 강영중이 말하길, “이 일은 그대가 주관하시오.”라고 하였다. 강영중이 물러나와 여러 벗들과 널리 충의(忠義)를 지닌 사람을 구하여 수십에서 백에 이르는 사람들을 얻었는데, 이들은 모두 뜻을 같이하고 같은 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일제히 함성을 맞추고 몸을 떨쳐 일어나 모두 왕사(王師)를 도와 적을 토벌하기를 원하였다.
서사(誓辭)는 진중(珍重)하고, 군모(軍謀)가 엄밀했음은 물론이다. 왕사(王師)가 남하(南下)함에 이르러, 윤후(尹侯)가 이 뜻을 순무영 선봉[巡撫先鋒] 이공(李公)에게 알렸다. 그래서 강영중(姜泳重)을 수성좌부장(守城左副將)으로 삼고, 감찰(監察) 신종관(愼宗寬)을 도령장(都領將)으로 삼고, 진사(進士) 김상환(金商煥)을 주획관(籌劃官)으로 삼고, 진사 이병광(李秉光)을 우부장(右副將)으로 삼고, 황재진(黃在鎭)을 도찰원(都察員)으로 삼고, 첨사(僉使) 박내민(朴來敏)을 중군(中軍)으로 삼고, 최영섭(崔榮涉)을 별참모(別參謀)로 삼고, 박윤화(朴胤和)를 도호장(都護將)으로 삼고, 강수중(姜守重)을 고창수성장(高敞守城將)으로 삼고, 이석구(李錫九)를 좌부장(左副將)으로 삼고, 김상렬(金相烈)을 우부장(右副將)으로 삼고, 진사 김영철(金榮喆)을 참모(參謀)로 삼고, 전 감현(前監縣) 은수룡(殷壽龍)을 별장(別將)으로 삼고, 유광희(柳光熙)을 서사(書史)로 삼았다.
유병(儒兵)이 일제히 떨치고 일어나 적당(賊黨)을 추포하니, 열흘에서 한 달 사이에 왕사(王師)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대괴(大魁)·소적(小賊)이 차례로 사로잡혀, 곧 장각(張角)의 36방 무리들을 죽이듯 하여 하루아침에 흩어지고, 모두 풍화(風化, 敎化)의 가운데로 돌아왔다. 이것은 모두 왕의 신령함[王靈]이 미치지 않음이 아니요, 또한 유병(儒兵)이 먼저 제창하고 떨쳐 일어난 힘인 것이다. 그러니 누가 백면서생(白面書生)은 적을 헤아릴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찌 남방의 강함이 북방의 강함만 못하다[南方之强, 不如北方之强]라고 할 것이며, 시나 읊조리는 자들[詩家者流]은 병법을 쓰는 사람들만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반드시 “해동(海東)의 유병(儒兵)은 천하의 정병(精兵)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개개의 유생들이 충의(忠義)로써 서로 목숨을 맡기니, 어디를 간들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며, 어떤 어려움인들 건너지 못하겠는가? 이제 이 창의(倡義)의 거사로 말미암아 국운(國運)이 다시 창성할 것이며, 사기(士氣)가 다시 떨칠 것을 점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감히 그 사실을 민멸(泯滅)하게 할 수 없어 그 대강의 전후 사정을 서술하여 후일의 말을 세우려는 군자[立言君子]에게 참고 자료로 삼게 하고자 한다. 용집(龍集) 31년(載), 갑오년(甲午, 1894년) 대려(大呂, 12월), 모양(牟陽, 고창의 별칭)의 사인(士人) 이규채(李圭彩)가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