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고창창의서(興德高敞倡義序)
성인(聖人)이 입인(立人, 立身)의 도에 관해 말한 것이 있으니, 곧 인(仁)과 의(義)이다. 의(義)는 군신(君臣)의 사이보다 [그 덕이] 더 크게 드러나는 곳이 없다. 무릇 국가가 환난에 처하였을 때, 그 신하 된 자로서 자신의 몸을 바쳐 분발하려는 자는 오직 의(義)를 본받으려는 마음만을 가질 뿐,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은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덕을 가져야 성인(聖人)이 이르신 바 입신[立人]의 도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내가 가만히 우리 흥성(興城)의 윤후(尹侯, 尹錫禛)를 살펴보니, 비단 무예(武藝)에만 익숙한 것이 아니라 일찍이 시(詩)·서(書)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인의(仁義)를 복습해 진실로 이미 충의(忠義)의 큰 절개를 안다고 할 것이다. 마침 그가 현의 일을 맡게 되었을 때[知縣] 요사스런 기운이 퍼지고 흉악한 시도가 낭자하였다. 그런데 좁은 고을이라 다른 지역 사정과 달리 변변한 성곽도 해자도 없으며, 병장기도 갑옷도 갖추어진 것이 없으니, [적도들을 물리칠] 계책이 전무하여 새벽부터 밤늦도록 근심하고 괴로워할 뿐이었다.
이때, 치서사인(治西士人) 강영중(姜泳重)은 평소부터 강개(慷慨)한 기상을 품고 있던 자로서, 의(義)에 기대어 적을 물리칠 거사를 도모하고자 윤후(尹侯)를 찾아와 의논하였다. 윤후는 심히 칭찬하고 장려하면서 그와 더불어 계책을 내고, 드디어 드러나지 않게 본읍(本邑)과 모양(牟陽, 고창의 별칭)의 인사(人士) 수백 명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서사(誓辭, 맹서하는 말)에 손자(孫子)의 병법대로 적을 토벌하고 사로잡아 벨 계획[如孫討虜斫案]을 밝혔다. 그리고 왕사(王師)가 먼 곳에서 다다름에 윤후는 곧 순무 이공(李公)에게 처음 창의(倡義,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한 소식을 급히 아뢰고, “두 읍을 나누어 막고, 힘써 적을 토포하여 사로잡아 군부[軍社]에 바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야 왕사(王師)가 곤궁하지 않게 되고, 큰 난리가 쉬 안정될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이전에 비록 [의병들이] 군사훈련[六步七步]을 받은 적은 없다 하더라도, 크게 무찌르는 한바탕 전투를 치를 각오를[大鏖一戰] 그 마음에 지니고 있은즉[迹其設心], 이는 대개 어지러움에 임하여 의를 본받으려는 것에서 나온 것이니, 비록 생사와 화복을 계산하지 않은 것이라 말한다 하여도 괜찮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또 윤후가 쓴 혈서(血書)를 읽어본즉, 곧 ‘목숨을 바쳐 의를 취하는 것[捨生取義]’이었다. 그 뜻이 더욱 부지불식간에 사람의 마음을 슬프고 감동스럽게 하였다. 그러니 비록 옛날의 충신(忠臣)·열사(烈士)가 의대(衣帶)를 갖추고 임명을 받아 글을 쓴 것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뛰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윤후의 평소 지닌 기개를 알 만하였다. 만약 ‘행적이 없으면 믿지 못한다[無迹而不信]’라고 말한다면, 결코 정당하고 이치를 헤아린 도[善恕之道]가 아닐 것이다. 그가 처한 상황을 돌아보면 그가 그 자리를 얻지 못한 것일 뿐이다. 이에 뜻이 있는 자는 그 의(義)를 사라지게 하려 하지 않는 법이니, 그 사실을 산중에 있는 나에게 들려주고 [기록해 주기를] 억지로 청하여, [내가] 억지로 물리칠 수 없어 드디어 그 말을 주워 모아 이와 같이 말한다.
을미년(乙未年, 1895년) 4월 상순[上澣]에 수성인(隋城人) 백낙규(白樂奎)가 삼가 쓰다[謹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