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년(丙申, 1896) 정월 초하루
아침에 교임(校任) 송종희(宋鍾熙)가 성묘(聖廟)의 분향(焚香)을 담당하여 봉행하였다. 계속해서 15일에 재포(宰脯)할 때는 수교임(首校任)과 부교임(副校任)인 오재수(吳在洙)·이병수(李炳壽)·송종희가 일제히 교재(校齋)에 모여 춘향(春享)의 의절(儀節)을 강구하였다. 대개 옛 제도에 희생과 여러 가지 물품중에 관에서 진봉(進封)한 물품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안종수(安宗洙)를 찾아갔다. 안종수가 말하기를 “어찌 말씀대로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세전에 삭발하도록 독촉한 것은 참으로 본심이 아니었는데 교중(校中)의 유생들을 지나치게 놀라게 하였습니다. 곧바로 아주 부끄럽게 여겼으니 말씀드릴 바가 없습니다. 지금 삭발하라는 영을 도로 거두었으니, 조금도 개의치 마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면서 자못 괴로워하고 후회하는 기색을 보였다.
장성(長城) 참봉(參奉) 기우만(奇宇萬)이 창의(倡義)하여 토복(討復)하자는 뜻으로 통문(通文)을 나주에 보냈다. 열어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통곡하며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군부(君父)께서 바야흐로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하셨으니, 분통함에 차라리 죽고 싶지만 신하가 어찌 편히 쉬며 책상 앞에만 있겠는가. 일찍이 국모(國母)의 원수에 대해서도 와신상담하며 복수하지 못하였고, 군주의 욕됨에도 가슴을 치면서 아직 죽지 못하고 있다. 지금 섬의 오랑캐가 어지럽게 구는 것은 예로부터 조선 백성의 한결같은 원수이다. 어찌 차마 임진왜란을 말할 수 있겠는가. 전에 겪은 사례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오히려 효경(梟獍)의 본성을 보존하고 있으니 후환을 징험할 수 있다. [일본이] 양국간의 수호(修好)에 가탁하여 비기(秘機)를 엿보는 것은 마치 간폐(肝肺)를 보는 것과 같고, 마침내 역적을 옹호하여 앞잡이를 세우는 데서 그 심장(心腸)을 파악할 수 있었다. 구적(寇賊)이 시랑(豺狼)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흉간(凶奸)이 응견(鷹犬)이 되는 것이다. 부강(富强)이란 말은 임금을 속이는 깊은 고독(蠱毒)이고, 개화(開化)라는 말은 인륜(人倫)을 어그러뜨리기 앞서의 신호이다.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협박하여 못하는 짓이 없으니 강상(綱常)은 끊어졌고 옷을 바꾸고 머리카락을 깎으되 거리낄 것이 없으니 화이(華夷)가 분명하게 나누어졌다. 양사(兩司)의 종공(宗工)이 모욕을 막으며 절충해야 하나 조정에는 신하가 없고, 외번(外藩)의 부백(府伯)이 잘못된 제도를 받들어 삭발을 독촉하니 나라에 사람이 있는가. 하물며 지금 군주를 배반하고 적에 붙어서 목숨을 부지하려는 사람은 옛날 난신적자보다 더욱 심하다. 4천년 예의지국에 생장하여 5백년 휴양(休養)의 은혜를 입고서 차마 조종(祖宗)과 부모의 나라를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역이 되게 하겠는가. 속여서 머리카락과 옷깃 같은 제도를 바꾼 것은 이른바 부모도 없고 임금도 없다는 것이고, 위협하여 거가(車駕)를 궁중에서 나오게 한 것은 이른바 다 빼앗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춘추(春秋)』를 읽을 데가 없으니 어찌 이때에 원통하지 않겠는가. 이때에 난신적자가 하늘을 끼고 방자하게 구는 그날 은인자중하였다. 호생(好生)의 큰 은덕을 우러러 감사하고 단발령을 거두라는 교서가 발표되었다. 역괴(逆魁)가 이미 주살되었으니 임금의 뜻이 진노하였음을 볼 수 있다. 지난 날 옅은 일식이 어찌 해와 달의 밝음에 손해가 되겠는가. 지금 대양(對揚)에 미쳐서 하늘과 땅의 큼에는 유감이 없다. 개화당의 이리 같은 마음을 고치지 못하여 궁어(宮御)를 황폐하게 만들고, 적개심을 품은 호랑이 같은 신하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호위의 소루함을 상상할 수 있다. 밭 갈아서 먹고 우물 파서 마심은 어찌 왕령(王靈)이 아니겠는가. 위태로워도 붙잡지 않고 넘어져도 부축하지 않는다면 장차 저 보좌자를 어디에 쓰겠는가. 보생이사(報生以死)하는 것이니 의리를 위하여 죽으면 죽어도 칭송하는 말이 있다. 역도를 토벌하는 것이 충(忠)이 되니, 때를 잃으면 충성해도 그 충성은 또한 어디에 쓰겠는가. 온 나라는 3백군(郡)이요, 온 성(省)은 50여 주(州)인데 누군들 종국(宗國)의 깊은 원수가 아니겠는가. 대소 신서(臣庶)들을 막론하고 처마 밑에 있는 제비니 참새와 같은 처지에 놓였으니 나라를 잊는 것은 몸을 잊는 것이다. 일찍이 곰발바닥과 물고기를 취할 것인지 버릴 것인지를 판별해야 하니 임금을 위하여 죽는 것이 곧 의(義)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우만(宇萬)은 군대 일을 배우지 못하였고, 돌아보면 동량도 되지 못하는 쓸모없는 재주가 부끄러우나, 함께 하늘에서 이성(彛性)을 얻었으니 오히려 기울어가는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와 같다. 이에 감히 재주 없음을 헤아리지 않고 이에 두루 여러 어르신들께 고하여 관리와 장교와 여러 백성들 그리고 또한 공상(工商)과 하천(下賤)에게까지 미치고자 한다. 한 마음으로 적을 토멸해야 하는데, 천리(千里)에 사람을 두렵게 하는 자가 있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 지존(至尊)의 몽진(蒙塵)에 시일을 늦출 수가 없다. 역당(逆黨)들이 도피하니 그 뿌리를 김을 매듯 제거하지 못하겠다. 천안(天顔)의 한줄기 눈물 자국에 많고 많은 신하들이 목숨을 바치는 일이 계속되지 못하고 옥지(玉趾)가 몇 걸음 걷는데도 억조의 백성들이 뼈가 가루가 되도록 따르지 못한다. 다시 쳐들어오는데 적의 정세를 과연 헤아릴 수가 없으니 진(陣)을 엄하게 하여 기다리나 군무(軍務)가 실기(失機)하지 않음을 보장하겠는가. 하물며 다시 해치고 죽이는 방자하고 패악함이 전과 같고, 또 들으니 개화당이 함부로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옛날과 같다. 신인(神人)이 함께 분노할 일인데 충(忠)과 역(逆)이 나란히 할 수 있겠는가. 공(功)을 방해하고 바름[正] 을 해치는 참소는 저절로 당역(黨逆)에 돌아갈 것이고,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의(義)는 이미 계장(啓章)에 진술되었다. 통문이 도달하는 즉시 빨리 날짜를 지정하여 각기 관할하는 주군(州郡)에서 의(義)로 메아리치는 민병(民兵)을 소집하라. 유사(儒士)는 그 풍재(風裁)를 받들고, 이교(吏校)는 그 두령(頭領)을 추대하라. 지휘와 절제(節制)는 저절로 경륜(經綸)이 베풀어질 것이고, 궁시(弓矢)와 과모(戈矛)는 좌작(坐作)과 격자(擊刺)를 도울 것이다. 난폭함을 주살하고 제거하여 바야흐로 위태로울 때 내란(內亂)을 안정시키고, 왜(倭)를 멸하고 양(洋)을 몰아내어 영원히 외모(外侮)를 끊어버리고자 한다. 우만(宇萬)은 비록 재주가 없으나 하진(下陣)에서 말채찍을 잡고서 앞장서길 원한다. 이처럼 통문을 보내고 공경히 회보(回報)가 있기를 기다린다.
통문이 도착하는 시각에 곧 회시(回示)할 것.
통문이 도달한 후 큰 읍(邑)은 7일, 작은 읍은 5일 간 경내(境內)에 돌려보여 모두 알고 일어나게 하라. 부지런하고 게으름은 각각 본읍(本邑)의 풍범도의(風範道義)에 매여있다. 두령(頭領)의 성함(姓啣),시설방략(施設方略) 등을 각각 갖추어 보이라. 그리고 교임(校任) 및 공형(公兄)도 역시 이름을 기록해서 나중에 문부(文簿)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할 것.
바야흐로 지금 주상(主上)이 몽진(蒙塵)하고 나라 일이 어지러워 의병이 메아리처럼 호응하는데 호남이 오래도록 조용한 것은 의기(義氣)가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동학의 난리 뒤에 백성의 힘이 아직 살아나지 못하여 차일피일 시일이 늦어진 것이다. 충신과 의사(義士)가 밤낮으로 절치부심(切齒腐心)하였는데 지금 이제 통문을 보내 울적한 여론을 수습하고자 한다. 오래 울적하면 반드시 펴지게 되어 있으니 거의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각 읍의 군위(軍威)가 조금 떨칠 때를 기다려 차츰 약속을 정하여 힘을 합쳐 근왕(勤王)할 뜻을 마땅히 재차 통문으로 할 것.
재차 통문하기 전에 송(宋)나라에 복을 내린 하늘처럼 전하께서 환궁하고 역당(逆黨)이 법에 굴복하고 전장(典章)이 옛날처럼 회복되고 외구(外寇)가 물러난다면 마땅히 비보(飛報)로 알려 무기를 풀 것이다. 그러나 해구(海寇)는 무상하게 빠르게 왔다 갔다 하니 변을 대응할 절목에는 따로 규획(規劃)을 두어 편안해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 방법을 마련할 것.”
동시에 담양(潭陽)[초토사 민공이 담양으로 옮겨 다스릴 때] 창평(昌平)·광주(光州)·장성(長城)·순창(淳昌) 5읍의 통장(通章)도 도착하였다.
2월 초1일. 본주의 교임(校任)이 경내(境內)에 통문을 보냈고, 진신(搢紳)과 장보(章甫)가 일제히 동재(東齋)에 모여 함께 구제할 계책을 강구하였다. 이때는 곧 문묘(文廟)의 석전일(釋奠日)이었다. 새로 온 관찰사 조한근(趙漢根)과 참서관(參書官) 안종수(安宗洙)가 상투를 자르고 와서 참알(參謁)하려 하였다. 사론(士論)이 격하게 일어나서 “상투를 자른 자는 전정(殿庭)에 들어오지 말라[髡髮之人 勿入殿庭]”는 여덟 글자를 크게 써서 서쪽 성문에 붙였다.
초2일
시전(市廛)에서 백지(白紙) 1장이 바람도 없이 공중에 날아올라 월정봉(月井峯) 뒤 10리쯤에 떨어졌다. 안종수가 괴이하게 여기고는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게 하였더니 점괘가 “풀이여 풀이여! 전정(殿庭) 앞에 그 풀이네. 푸른 숲 돌아가는 길에 여인이 남편을 물어 보네[草兮草兮 庭前其草 靑林歸路 女人問夫]”라고 나왔다.
같은 날. 사과(司果) 이승수(李承壽)와 사인(士人) 나경식(羅璟植)이 와서 말하기를 “전주서(前注書) 이학상(李鶴相)의 효우(孝友)가 일찍 드러났는데, 또 갑오년 동비(東匪)의 난 때 동지의 한 사람인 나병두(羅秉斗)와 의거(義擧)하고자 도모하였습니다. 마침 기이한 병에 걸려 여러 달 앓아서 뜻을 가지고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왕실의 어려움을 보고 밤낮으로 울분을 격하게 품었습니다. 이 사람을 회맹(會盟)의 우두머리로 삼을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초3일
드디어 연명(聯名)하여 이학상(李鶴相)과 나병두(羅秉斗) 두 사람에게 글을 보내고 들어와 오재수(吳在洙)에게 물어 말하기를 “일전에 백지가 공중에 날아오른 것은 그 조짐이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나병두가 풀어서 말하기를 “흰색은 선비의 본래 색이고, 종이는 선비가 쓰는 것이다. 백지가 날아오른 것은 반드시 유자(儒者)의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초4일
이병수(李炳壽)가 통문을 지어 송사(松沙)에 답변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난신적자를 주살함은 같은 원수를 쳐서 제거하려는 생각 때문이다. 하늘이 사문(斯文)을 없애지 않으려고 대현(大賢)을 주어 존주양이(尊周壤夷)하였다. 근왕(勤王)은 이미 수창(首倡)하는 선비가 있으니 누구인들 그림자처럼 따르지 않겠는가. 저 섬나라 오랑캐는 우리나라와 인접한 땅이면서 참으로 바다 모퉁이에 있는 하늘 끝까지 갈 원수의 나라이다. 지난 정유년의 혹심한 화(禍)는 3천리 열읍(列邑)이 다 그러하였고, 지금까지도 임진년의 깊은 원수는 수백 년이 지나더라도 어찌 그날을 잊겠는가. 개화(開化)와 수호(修好)를 칭탁하여 안으로는 망측한 흉모(凶謀)를 품고 망명한 사람을 불러들이고 선하지 못한 역류(逆類)를 앞장 세웠다. 귀역(鬼蜮)의 무리들과 부화뇌동하고 사람과 짐승의 구분을 선동하여 없앴다. 어찌 차마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국모(國母)를 시해하고도 거리낌이 없는 그 일. 통곡할 만 하다. 군부(君父)를 위협하여 함부로 큰 권세를 만든 그 일. 제도를 뒤틀어 백성들을 괴롭히니, 비록 터럭을 다 뽑더라도 속죄할 수가 없다. 몸을 바쳐 나라를 위해 죽으면 목을 자르는 일 의리상 차마 할 수 없을 것이다. 국운의 염려된 점은 바야흐로 궁궐 밖으로 몽진(蒙塵)한 데 있고, 어가(御駕)의 호위에는 적개(敵愾)한 충신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소중화(小中華)의 문명(文明)한 나라에서 생장하며 열성조(列聖祖)의 휴양(休養)한 은택에 흠뻑 젖었다. 반적(叛賊)을 차마 그만둘 수 있겠는가 충신이 어찌 없는가. 분하고 원통함이 하늘을 찌르니 장사(壯士)의 눈물을 멈출 수 없고 강상의 윤리가 땅에 떨어지니 난신적자의 머리를 베기 바란다. 성감(聖鑑)이 크게 밝아 귀매(鬼魅)의 정적(情跡)이 숨을 데가 없고, 은륜(恩綸)이 정중하여 신서(臣庶)의 머리털을 자르지 말도록 하였다. 얼굴을 붉히며 노하심이 엄하기가 마치 서리와 같으니 흉괴(凶魁)는 이미 처벌되었고 악을 제거함이 마치 풀을 베듯 하였으나 역당(逆黨)은 아직 다 없애지 못하였다. 통탄스러운 저 요얼(妖孽)한 신하들은 생명을 보전하여 돼지 같은 험한 본성을 고치지 않고, 아! 우리 의로운 뜻을 가진 선비는 죽음을 보기를 마치 기러기 털처럼 가볍게 여긴다. 우러러 보건대 좌하(座下)는 낭함(琅函)을 바치며 대궐문에서 호소하니 담암(澹菴)의 종이 한 장에 부끄럽지 않고 금혁(金革)을 걸치고 진(陣)과 마주하니 계로(季路)의 3군(三軍)을 행하려 한다. 피를 흘리며 빨리 통고하니 전장(全章)에는 분충(奮忠)의 글자 아님이 없고 손을 씻고 공경히 읽으니 열군(列郡)에 모두나약한 자를 자립시키는 기풍이 있다. 여항의 어리석은 이에 미치고 또한 대여(臺輿)와 하천(下賤)에 이르기까지 이 글을 읽고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사람의 마음이 없다고 할 것이고 우리 무기를 빛냄에는 장차 칭찬할 말이 있으니 또한 적의 간담을 깨뜨릴만 하다. 지휘와 절제는 모두 존좌(尊座)를 따르기를 원하고, 경륜(經綸)은 삼가 성산(盛算)이 이미 정해진 것으로 생각한다. 지주(砥柱)가 우뚝 섰으니 일찍 하늘을 떠받드는 정성을 마련했고 종사가 안정되니 회란(回鑾)의 경사가 있기를 바란다. 어찌 단지 개화당(開化黨)만을 성토할 뿐이겠는가. 마땅히 빨리 오랑캐의 먼지를 깨끗이 해야한다. 용감히 만인에 갈 수 있으니 위무(威武)가 굽히지 않고, 충신은 반드시 십실지읍(十室之邑)에 있으니 한 성인의 말씀이 어찌 속이겠는가. 가만히 우리 읍을 생각하니 수 백년 의관(衣冠)의 고향이요 수 십주를 관할하는 땅이다. 호해(湖海)가 오른쪽을 누르고 있어 먼저 앞장서라고 말하면 또한 어려운 가운데 있다. 돌아보면 부끄러워 머뭇거릴 겨를이 없다. 시인(市人)을 몰아가려하나 모의가 아주 소루하고 연해(沿海)의 왜구가 바야흐로 오니 흉염(凶焰)이 쉽게 치열해진다. 다행히 이 의로운 격문(檄文)이 이르니 주위가 기뻐한다. 지금 보니 선생은 진실로 천하의 높은 선비인데 스스로 생각하니 적자(赤子)가 어찌 황지(潢池) 속에서 병기를 희롱하겠는가. 이에 성지(城池)를 수선하고 이에 같이하는 군교(軍校)를 물어서 서명(署名)하고 의리상 적과 함께 살 수가 없다고 함께 맹세한다. 머리를 맞대고 도모한 뜻을 합쳐서 임금을 위하여 한 번 죽기를 원한다. 명망있고 의로운 두령(頭領)은 성교(盛敎)에 따라 마땅히 추대하고, 궁시(弓矢)와 과모(戈矛)는 예봉(銳鋒)을 쌓아 틈을 봐서 발사한다. 왜양(倭洋)이 과연 무슨 물건인가 침범하는 예봉을 끊게하고 영남과 호남은 이미 같은 목소리로 함께 구제하는 실효를 기약하고 있다. 요순(堯舜)을 조종으로 하여 잘 다스려지는 정치를 만회하고 집집마다 추노(鄒魯)의 마을이 되어 우두커니 서서 현악을 타고 글을 외우는 풍습을 바라본다. 대략 어리석은 생각을 바치니 공경히 다시 통문하기를 기다린다.
통문이 도착하는 일시는 정월 29일이고 3일 안에 본 경내에 돌려 보이고 모두 알게 할 것.
통문이 도착한 후 경내의 진신(搢紳)과 장보(章甫) 및 관리와 마을의 군교는 함께 모의하여 일어나서 같이 구제할 뜻으로 안팎이 서로 호응할 것.
본읍은 연해(沿海)의 큰 읍으로 다른 나라의 배가 무상하게 때때로 출몰하니 막을 방책을 소홀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략 무너진 성가퀴를 보수하여 덮고 가릴 뜻으로 삼을 것.
연전에 잘못된 제도로 억지로 상투를 자르게 할 때 본주에서 잘린 사람이 있다. 그러나 몸의 밖은 깎였어도 안은 깎이지 않았으니 스스로 새롭게 하기를 허락할 것.”
쓰기를 마치고 연명(聯名)하여 이학상(李鶴相)을 우두머리로 삼고 의로운 유생 1백여 인을 나열하여 썼다. 유기영(柳畿永)이 스스로 소장(訴狀)의 끝에 쓰기를 원하니 고을의 의론이 장하다고 하면서 허락하였다. 사인(士人) 이원서(李源緖)와 임긍규(林肯圭), 주승(州丞) 박상수(朴祥壽), 참모(參謀) 오득환(吳得煥), 병교(兵校) 승갑표(昇甲杓) 등이 글을 가지고 함께 장성 의소(義所)로 갔다.
초5일
정석진(鄭錫珍)이 교재(校齋)에 와서 말하기를 “본주는 5백년 선비의 고향입니다. 이러한 오랑캐가 침입하는 날을 당해서 의거가 오히려 늦었으니 참으로 마땅히 의려(義旅)를 앞장서서 인솔하여 빨리 토벌하여 회복하여야 합니다. 성패의 이롭고 이롭지 않음은 미리 헤아려서 관망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모두가 말하기를 “예예”라고 하였다.
초6일
안종수는 본주의 의로운 목소리가 조금 진작되자 교재(校齋)에 와서 한편으로는 막고 한편으로는 화해하며 거짓말로 선동하며 말하기를 “동래포(東萊浦)에서 왜군(倭軍) 1대(隊)가 진주(晉州)의 의소(義所)로 들어가 이미 도륙을 하였다. 지금 여기 나주(羅州)의 의거는 아무런 보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진주처럼 혹심하게 점거당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초7일
이원서(李源緖)와 임긍규(林肯圭)가 장성(長城)에서 돌아와 기참봉(奇參奉)에게 갖추어 말하기를 열읍(列邑)의 의유(義儒)를 모집하여 모두 이미 뭉쳐서 규모와 계책을 세워 장성의 교재(校齋)로 향해 갔다고 하였다.
초8일
호남(湖南) 50주에서 성토(聲討)함이 장성(長城)에서 도착하였다. 내용이 마치 베어내고 끊어내듯 하며 안종수의 10가지 죄를 나열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만히 들으니 일개 왜추(倭酋)가 참서(參書)라고 칭하고 왜력(倭曆)으로 삭일(朔日)을 하고, 성묘(聖廟)에 배알하고 분향(焚香)하니, 이것은 동방에서 처음 있는 변괴이다. 대개 그 뱃속도 왜(倭)이고, 겉모습도 왜이고, 옷도 왜이니, 안팎이 모두 왜이면서도 빙자하여 말하기를 ‘왜가 아니다’라고 하는데, 나는 믿지 못하겠다. 공자께서 병을 핑계로 유비(孺悲)를 보지 않았고, 없음을 엿보아 양화(陽貨)를 보지 않았다. 아! 저 안종수는 왜(倭)를 써서 변개하였으면서도 당역(黨逆)을 해명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구나. 저 2인은 비교하면 마치 옴[疥癬] 과 같으니 성묘(聖廟)에 있는 신령은 생각건대 어둡고 어두운 곳에서 반드시 엄하게 거절할 것이니 어찌 깨끗하고 엄숙한 곳에 누를 끼치게 할 수 있겠는가. 당시의 교유(校儒)는 수판(手版)으로 때려서 죽이기를 공도보(孔道輔)가 뱀을 치듯이 하지를 못하였고, 집사(執事)와 교노(校奴) 된 자는 또 문을 막아 물리치지 못하고 도리어 달려 나가 앞을 인도하였으니 이처럼 하고도 또한 읍(邑)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 없음이 이와 같으니 그가 앞으로 어느곳인들 이르지 못하겠는가.
아아! 궁중에서 일어난 8월의 변(을미사변)은 신하들이 피를 토하며 와신상담할 일이건만 안종수는 팔을 휘두르며 말하기를 “6월에 일어난 일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잡고 그 마음을 살펴보면 역당으로 다스리는 것을 피하기 어려우니 사람들이 잡아서 주살해야 할 첫 번째 이유이다.
각 읍의 인신(印信)은 우리 임금의 명부(命符)이거늘 함부로 수납(收納)하여 임금을 안중에 두지 않으니 사람들이 잡아서 주살해야 할 두 번째 이유이다.
‘대리’(代理) 두 글자는 왕가(王家)가 전위(傳位)하는 것으로 작성된 문서가 있어야 하는데도 ‘관찰대리’(觀察代理)로 자처하고 문부(文簿)에 쓰면서 그럴듯하게 불법을 저지르니 사람들이 잡아서 주살해야 할 세 번째 이유이다.
국휼(國恤)에 성복(成服)할 때 앞에서 이르기를 ‘신식(新式)에는 전례가 없다’라고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지도 않고 거짓말을 지어내어 함부로 나라의 복식을 바꾸어 시역(弑逆)의 무리들에게 붙어 곡읍(哭泣)과 제복(制服)을 마음속으로 싫어하니 사람들이 잡아서 주살해야 할 네 번째 이유이다.
머리털을 자르라는 잘못된 명령에도 칼날로 상관을 위협하고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모자를 벗고 깎은 머리를 자랑하며 한밤중에 성문을 닫고도 아전과 장교들에게 깎기를 독촉하였다. 대개 그 마음에 달게 여기며 왜가 되고자 하니 혹 한 사람이라도 왜가 되지 않으면 나라의 맥이 끊어지는 듯이 하였으니 사람들이 잡아서 주살해야 할 다섯 번째 이유이다.
본주의 사민(士民)은 원망스럽고 급박한 일을 고하고자 모여서 장차 호소하려고 하면 민요(民擾)로 무고하여 거짓으로 개부(開部)에 보고하여 군대를 청해 와서 치게 하였다. 왜양(倭洋)의 심복으로 본국(本國)을 원수처럼 여겼으니, 사람들이 잡아서 주살해야 할 여섯 번째 이유이다.
상(上)께서 매우 크게 노하시니 역괴(逆魁)가 법에 복종하고 선유(宣諭)가 간절하여 팔역(八域)이 기뻐하는데 거짓 성지(聖旨)라고 하면서 애써 거행하지 않았다. 또 말하기를 “충(忠)이 역(逆)이 되고 역이 충이 된다”라고 하였다. 끝까지 살펴보지 않아도 역이 충이 된다 하였으니 속마음을 보는 듯하니 사람들이 잡아서 주살해야 할 일곱 번째 이유이다.
본주의 세전(稅錢)은 국가의 정공(正供)인데 함부로 왜인에게 쌀을 팔고 재화를 파니 대개 그 안중에 조금이라도 왕법이 있었다면 어찌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사람들이 잡아서 주살해야 할 여덟 번째 이유이다.
머리를 깎으라고 독촉하던 날에 말을 편 것이 낭자하니 향교를 세우고 선비를 기름에 문구(文具)는 쓸 데가 없으니 향교를 헐고 건물만 남겨두어 병대(兵隊)를 두자고 하였다.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는 무릇 형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존경하여 친하지 않음이 없는데 방자하게 향교를 훼손할 마음을 품으니 이것이 사람들이 잡아서 주살해야 할 아홉 번째 이유이다. 아울러 단발하고 성묘를 알현한 것이 열 번째 죄이다. 그 나머지 나라의 법으로 다스려야 할 것이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가 없다……”
이보다 앞서 안종수가 장성(長城)의 의유(義儒)가 나주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는 막아서 거절할 계책을 세웠다. 교임(校任) 오재수(吳在洙)·이병수(李炳壽)·송종희(宋鍾熙) 및 정석진(鄭錫珍)이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하여 드디어 그만두게 했다. 이 통문을 보게 되자 온 성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같은 날 술시(戌時, 오후 7시∼9시) 쯤에 안종수가 관예(官隷)를 보내어 10죄(罪)로 성토한 것을 구해 보고자 하였다. 교유(校儒)가 답하기를 ‘외읍(外邑)의 유자(儒者)가 보낸 통문인데 통문의 말이 아주 엄하니 보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조금 있다가 관예가 다시 와서 전갈(傳喝)하고는 긴 통문을 가지고 갔다. 이날 밤 안종수가 통문의 내용을 두루 보고 공형(公兄) 및 군교에게 전해서 보여 주었다.
초9일
새벽에 해남(海南) 수령으로 정석진이 부임할 때 본 교에 들어와 알성한 뒤에 이주서(李注書) 및 여러 유자들과 더불어 앉아 이야기하였다. 시간이 지나 널리 구제할 뜻으로 급한 어려움을 벗어나기를 힘쓰자고 하고는 밤을 달려 부임해야 한다고 하고는 곧바로 떠나가니 성을 지키던 군교가 모두 나가 전별하였다.
같은 날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 쯤에 교예(校隷)가 밖에서 황망히 들어와 고하여 말하기를 성 안에 큰 소요가 일어나 읍리(邑吏)와 군교 수백 인이 정청(政廳)에 들어갔고, 참서관(參書官)이 이미 죽음을 당하였고, 박총순(朴摠巡)과 여순검(呂巡檢) 두 사람도 모두 죽었고, 박시찰(朴視察)과 복주사(卜主事) 등 6인도 모두 붙잡혀 갇혔다고 하였다.
앞서의 정경(情景)이 매우 놀라운데 조금 있다가 김창균(金蒼均)·장길한(張佶翰)·김석균(金錫均)·승갑표(昇甲杓) 등이 성을 둘러싼 민인(民人)들과 함께 향교의 뜰에 들어와 기뻐서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참서(參書) 및 총순(摠巡) 등 역당의 무리가 지금 이미 죽었습니다. 본주의 의거가 시작을 해놓고 끝맺음을 못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 원하건대 이주서(李注書)가 대장이 되어 약속된 맹세를 정하고 호령(號令)을 펴십시오. 또 급히 영남과 호남의 여러 읍에 통문을 보내어 함께 국난에 나아갈 뜻을 보이십시오”라고 하였다.
사과(司果) 이승수(李承壽)가 자리에 있다가 주서에게 일러 말하기를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가볍게 한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함께 맹세한 아전과 장교들에게 말하기를 “몸은 비록 죽으나 의병은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때를 기다리지 말고 군령(軍令)으로 시행하라”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호응하여 말하기를 “감히 명령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주서가 성으로 들어가 여러 유자들과 함께 망화루(望華樓)에 올라가 자리를 펴고 4대문에 방(榜)을 걸고 성 안에 머리를 깎인 자들을 안정시켰다. 또 침탈을 금지하고 여러 군(郡)에 통문을 급히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초10일
본주의 연청(掾廳)을 창의소(倡義所)로 삼아 군대의 대오를 부서별로 나누어 참모는 사인(士人) 나병두(羅秉斗)와 전현감(前縣監) 손응계(孫應契), 중군장(中軍將)은 이승수(李承壽), 좌익장(左翼將)은 김창균(金蒼均), 우익장(右翼將)은 박근욱(朴根郁)으로 삼고 여러 가지 군제(軍制)는 각각 차례대로 약정하였다. 김재환(金在煥)·손상문(孫商文)·장길한(張佶翰)·양인환(梁仁煥)·손신흥(孫信興)·장봉삼(張鳳三)은 군무(軍務)를 맡았고, 사인(士人) 이원서(李源緖)·염효진(廉孝鎭)은 의곡(義穀)을 맡았고, 임홍규(林鴻圭)·송종희(宋鍾熙)는 서기(書記)를 맡았고, 유기영(柳畿永)을 통장(統將)으로 삼았다. 경내의 여러 선비가 많이도 와서 참여하니 동맹록(同盟錄)이 있다.
같은 날. 이주서(李注書)가 임홍규(林鴻圭)를 보내 남평(南平) 수령인 이재량(李載亮)에게 편지를 보내 의무(義務)에 대하여 상의하여 확정하였다.[왕복한 편지가 있다.] 이원서(李源緖)·박상수(朴祥壽)를 보내 본 주의 인신(印信)을 봉하여 무안겸관소(務安兼官所)에 가져다 바쳤다.
11일
송사(松沙)가 의유(義儒) 2백여 인을 이끌고 장성(長城)에서 왔다. 고광순(高光詢)·기삼연(奇參衍)·김익중(金翼中)·이승학(李承鶴)·기주현(奇周鉉)·고기주(高琦柱)·양상태(梁相泰)·기동관(奇東觀)·기재(奇宰)와 진사 기동준(奇東準) 등 여러 사람이 모두 본 향교에 도착하여 지응(支應)할 절차를 본 주로부터 차례로 배열하였다.
같은 날. 승지(承旨) 박창수(朴昌壽)가 향교에 들어와 알성(謁聖)한 후에 이학상(李鶴相)을 보고 말하기를 “옛날 임진왜란 때 김건재(金健齋)가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고영봉(高霽峯)은 광주(光州)에서 창의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대들이 본 주에서 창의하고 송사(松沙)가 장성(長城)에서 창의하면 진실로 흠송(欽誦)할 만합니다. 오늘 내일 사이에 길을 떠나 호가(扈駕)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2일
이주서(李注書)가 성 안의 여러 읍에 통문을 보내고 외구(外寇)를 막고, 주서(注書) 나경성(羅經成)에게 글을 보내 힘써 나라의 어려움에 함께 나아가자고 하였다.[왕복한 편지가 있다.]
같은 날. 목포진(木浦鎭) 정탐(偵探)의 보고에 왜선(倭船) 2척이 병기를 싣고 중류(中流)를 따라와서 정박하였으니 나주의 의병과 함께 한번 죽기로 싸우기를 기약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각 처의 중요한 곳을 엄중하게 수비하라고 하였다.
13일
송사(松沙)가 장성(長城)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대개 주(州) 내의 이교(吏校)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재수(吳在洙)가 송사에게 일러 말하기를 “바야흐로 큰 일을 할 땐 다만 공적인 일을 먼저 하고 사적인 일은 뒤에 하는 것이 옳습니다. 구구하고 사소한 일에 어찌 개의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날 밤 이병수(李炳壽)·기동관(奇東觀)·송종희(宋鍾熙)가 가서 성 안의 모든 장령(將領)을 깨우쳐 말하기를 “기참봉(奇參奉)이 왔으니 진실로 같은 목소리로 서로 호응할 때이다. 어찌 조금이라도 시기하고 싫어함이 있었겠는가. 기참봉을 호남대의소(湖南大義所)로 삼고 이주서(李注書)를 본 주의 의소(義所)로 삼는 것이 온당한 방편인 듯하다”라고 하였다. 모두 호응하기를 “공경히 명을 듣겠습니다”라고 하였다.
14일
목포진(木浦鎭)의 보고에 왜선(倭船) 2척이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장삿배라고 하면서 물러갔다고 하였다.
같은 날. 사시(巳時)에 성 안의 장령 및 군졸이 좌우로 분대(分隊)를 하고 병장(兵仗)을 무성하게 늘어놓고 의유(義儒)가 뒤를 따라 송사(松沙)를 맞이하여 민고(民庫)[예전에 향도유사(鄕都有司)가 머물렀던 청사(廳舍)이다.]에 들어가 이주서(李注書)와 더불어 대장이 되어 피로써 맹세를 하였다.
15일
안종수의 반상(返喪)에 본 주에서 부의금으로 1천냥을 보냈다. 이때 안종수의 처가 마침 나주에 있었는데 남편의 상(喪) 때문에 돌아오니 ‘푸른 숲 돌아가는 길에 여인이 남편을 물어 보네[靑林歸路 女人問夫]’라는 점괘가 과연 증험이 된 것인가. 박총순(朴摠巡)과 여순검(呂巡檢)의 반상(返喪) 때는 5백냥을 지급하였고, 박시찰(朴視察)과 복주사(卜主事) 등 6인은 모두 풀어주었다. 향도유사(鄕都有司) 유기연(柳紀淵)이 참모(參謀)로 들어왔다. 좌우익장(左右翼將)이 두령소(頭領所)에 고하여 말하기를 “전향도유사(前鄕都有司)가 읍의 일을 아주 잘 아니 수성장(守城將)으로 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주서(李注書)가 자리가 비었다고 허락하였다.
16일
주서 나경성(羅經成)과 주서 오학선(吳鶴善)이 와서 참여하였다. 같은 날. 수성군(守城軍)이 다시 이주서(李注書)에게 두령이 되기를 청하여 주서가 재차 대장이 되었다. 이날 밤. 송사(松沙)와 이주서(李注書)가 제문을 지어 건재(健齋) 김선생 사우(祠宇)의 옛 터에서 창의(倡義)하였다.[서쪽 물가에 있었으므로 안쪽이라고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선생께서는 산하(山河)의 뛰어난 기운에 이미 도학(道學)이 높고 겸하여 절의(節義)를 갖추었네. 지난 번 임진왜란으로 국운이 위태로울 때 선생께서 수창(首倡)하시니 의병이 메아리처럼 일어났다네. 6월에 출사(出師)하시니 가는 곳엔 적이 없고 경성(京城)을 회복하니 선생의 힘이도다. 병사를 이끌고 남하하니 관방(關防)인 촉석(矗石)이네. 한 번 죽음은 죽음이 아니니 그 향기는 더욱 매워 장강(長江)의 물결이 마르지 않는 듯하네. 역당(逆黨)이 일을 꾸미고 섬나라 오랑캐가 다시 사납게 구니 선왕(先王)의 옛 법이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졌네. 우리 생령(生靈)이 깎이니 저 왜놈이 다한 후에야 그치리라. 필위(蹕衛)가 밖에 머문 지 이미 한 달이 지났으니 신민(臣民)의 원통을 쏟아버릴 데가 없구나. 이에 의병을 정비하여 죽음을 맹세하고 토벌하여 회복하고자 하니 임하시어 위에 있기를 밝은 하늘의 해와 같이 하고 물으면서 옆에 있기를 귀신이 하듯 하시오. 선생께는 백 년을 기다려도 의혹이 없습니다. 우리 술이 이미 맑고 우리 제수가 이미 깨끗하니 선생의 명을 받아 노둔(駑鈍)함을 다 하고자 합니다. 선생께서 보우하사 크게 어려움을 구제하소서.”
17일
함평(咸平)의 의유(義儒) 김훈(金勳), 능주(綾州)의 의유 정의림(鄭義林), 무안(務安)의 감역(監役) 윤창대(尹昌大), 진사(進士) 오진룡(吳鎭龍)이 와서 모였다. 각 읍의 공형(公兄)이 와서 알현하였다.
18일
진주(晉州)의 의소(義所)에서 노응규(盧應奎)의 답통(答通)이 도착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몸은 비록 죽더라도 의리상 의병을 일으키지 않을 수는 없으며, 머리는 비록 단발하더라도 [정신은] 함께 자를 수는 없습니다.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것은 춘추(春秋)의 큰 뜻이요, 화하(華夏)를 써서 오랑캐를 변화시킴은 추노(鄒魯)의 특별한 가르침이니 모든 신하된 자가 어찌 마음이 떨고 담(膽)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대개 왜적을 없앤 임진왜란의 순절(殉節)이 어제와 같고, 서양 오랑캐를 몰아낸 병인양요의 창의(倡義)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일의 형세를 논한다면 호남은 한 나라의 병한(屛翰)이고 금성(錦城)은 한 도(道)의 후설(喉舌)과 같이 중요한 곳이니 아마도 늦게 일어났다는 후회가 있지 않을까 밤낮으로 두렵습니다. 삼가 듣건대 귀도(貴道)에서 힘을 합해 모두 일어나 요해처를 굳게 지킨다고 하니 어찌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하는 정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구름과 같이 떠다니는 말들이 우주를 가득 채워서 임금의 말씀을 거짓이라 칭하고 혹은 요동쳐서 이르니 선유사(宣諭使)와 사판관(査判官)도 개화(開化) 중에 있는 어지러운 무리들의 말로 의병을 파하려는 뜻으로 간교한 계책을 귀도에 내려 보냈다고 하니 어찌 좋게 대하기를 이와 같이 끝이 없이 한단 말입니까. 8도의 의병이 모두 어지러운 무리들의 간계에 떨어져 다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 마음으로 힘을 합쳐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군법으로 시행할 것입니다. 임금께서 남별관(南別官)에 이르시고 3도(道)의 48진(陣)을 주둔시켰으니 귀도는 의심하지 말고 각 읍을 굳게 지켜서 3도가 힘을 합해 의리상 감히 거의(擧義)하지 않을 수 없고 머리털을 잘리더라고 정신은 함께 자를 수 없다는 뜻을 밝혀 주신다면 천만번 다행이겠습니다.”
이날 밤, 송사(松沙)가 같은 의(義)를 가진 여러 장사(壯士)와 함께 금성당(錦城堂)에서 제사를 지내며 고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의젓하기가 크고 크다네 신령(神靈)이 계신 집이여. 금산(錦山)이여 산 가운데에 있네. 나라 안이라 차례차례 제사를 지내네. 은택이 도타우니 예가 융성하네. 신령이 빛나면서 오르내리시네. 계수나무 깃발이 오니 허공에 날리네. 신령이 오르니 즐겁고도 향기롭네. 때가 이미 좋으니 한 해가 풍년일세. 사특함은 엿볼 수 없으니 가까이 볼 수도 없네. 높고 높구나 높은 담이여. 깨끗한 제사에 답하니 이미 누리시었네. 우리들을 편안하게 하시니 공(功)이 되었네. 나라의 걸음이여 이에 어렵다네. 짐승의 발자취가 이리저리 났네. 멧돼지가 달려들고 드렁허리가 춤을 추네. 호랑이가 가니 용이 숨는구나. 임금의 수레가 머무르니 별관(別館)이라네. 신민(臣民)이여 다북쑥 같고 미친 것 같네. 어찌 신령을 높이지 않나 어둡고 어둡구나. 마치 서로를 잃어버린 것처럼 서로를 잊네. 나는 신령을 위하여 아름다운 꾀를 내리니. 꾀를 도모하니 진실로 좋구나. 바닷바람 타고서 요사스러움 꺾으리니. 큰 배 자국에 힘입으니 신령스럽도다. 그 굴(窟)에서 불을 날리니 그 족속은 도깨비라. 그 자취를 없애니 동쪽 방향이구나. 어진 이는 나아가고 사악함은 물러나네.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들은 평안하네. 말린 제물에 좋은 과일이라. 내 말은 곱고도 내 술은 향기롭네.”
19일
보발(步撥)의 보고에 병정(兵丁) 1천 5백이 왕의 군대라고 하면서 전주(全州)의 경계에 도착하였고 선유사(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이 뒤따라 왔다고 하였다.
20일
이학상(李鶴相)이 근왕(勤王)의 뜻으로 상소를 봉해 올려 진달(陳達)하였다. 또 안종수의 죄악을 열거하며 같은 상소에 조목조목 진달하였다. 이병수(李炳壽)가 상소의 글을 지었다. 상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신은 종친(宗親)의 후예로 초야에서 나서 자라 외람되이 과거를 보아 조금이라도 보답하려고 도모하였으나 개변(開邊)의 용사하는 날로부터 시골에 엎드려 미충(微衷)을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나라의 운명이 어렵고 어지러워 필주(蹕駐)가 몽진(蒙塵)을 하므로 이에 감히 외람되이 꾸짖음을 무릅쓰고 광류(纊旒)의 아래에 큰 소리로 크게 호소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정신을 모아 맑게 살피시기 바랍니다. 아아! 우리 동방이 처음 건국한 이래로 열성조께서 대대로 현명한 임금이 나와 은택이 계속 이어져 내려왔고 풍속이 중화(中華)와 같게 되었으니 참으로 억만년 끝이 없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런데 어찌 요즈음에 간신이 권세를 훔치고 역당이 나라를 팔고 외구(外寇)를 끌어들여 내변(內變)을 부추기고 우리 국모를 시해하고 우리 임금을 협박하여 우리 조정을 바꾸고 우리 전장(典章)을 바꾸고 우리 의상(衣裳)을 훼손하고 우리 생령(生靈)의 머리를 깎아 4천년 당당한 예의지국을 이적금수의 땅으로 빠져 들어가게 하였으니 이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이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개화(開化)란 두 글자는 예전에 들어본 적이 없고 예(禮)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요즈음의 무리들이 자신과 처자를 보존하려는 계책에 불과하니 진실로 전하의 복이 아닙니다. 울타리를 철거하고 도둑에게 아첨하니 도둑이 어찌 우리를 아껴주겠습니까. 귀역(鬼蜮)의 무리들이 구역(區域)마다 벌려 늘어서서 태아(泰阿)를 놀리면서 위복(威福)을 함부로 지어내고 있으니 오늘에 이르러 화(禍)가 또한 지극하게 되었습니다. 무릇 전하의 적자(赤子)가 된 자가 진실로 한번 숨을 쉬며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어느 누가 피를 토하며 와신상담하며 불공대천의 원수를 다 토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문에 들으니 김홍집(金弘集)과 정병하(鄭秉夏)는 이미 왕법으로 다스려서 서울에 사는 인민(人民)이 사방으로 통하는 큰 길에서 지절(支節)을 분해하여 고기조각을 나누었다고 하니 여기에서 귀신과 사람이 함께 노하고 민이(民彝)가 없어지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경(書經)』에서 말하기를 ‘희화(羲和)가 예(羿)와 무리를 지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때에 앞서는 자도 죽여서 용서하지 말고, 때에 미치지 못하는 자도 죽여서 용서하지 말라[先時者, 殺無赦, 不及時者, 殺無赦]’고 하였습니다. 지금 김홍집과 정병하와 무리를 이룬 자들이 어찌 감히 예(羿)와 무리를 지은 자의 주참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본주(本州)로 말할 것 같으면 이른바 참서(參書) 안종수가 오랑캐의 심장을 가진 흉괴(凶魁)의 남은 싹으로 죄악이 하늘을 관통하나 자세히 말씀드릴 수가 없고 대략 그 얼거리를 늘어놓겠습니다. 아아! 작년 8월의 변란(을미사변)은 곧 신자(臣子)가 하늘이 다하도록 뼈에 사무치는 통탄스런 원한입니다. 그런데 아! 저 안종수는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갑오년 6월에 이러한 거사를 정해두었는데 오늘까지 끌어왔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김홍집과 송병하가 죽었을 때 그가 말하기를 “충신이 역적이 되고 역적이 충신이 되니 충신과 역적은 구분하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몇 마디 말을 통해 보면 그의 마음에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비단 전하의 역신(逆臣)일 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 만세토록 함께 주참해야 할 자입니다. 향교는 헐면서 학당은 남겨두어 병오(兵伍)를 설치하고자 하였고, 객사(客舍)의 중요한 곳은 정청(政廳)을 만들려고 하였으며, 단발령을 철폐한다는 임금의 말씀을 거짓 성지(聖旨)라고 빙자하여 애써 거행하지 않았으며, 편호(編戶)의 판적(版籍)을 흩어서 휴지로 만들어 도배(塗褙)할 재료로 삼았으며, 정공(正供)의 결세(結稅)를 왜(倭)에게 지급하고 사사로이 이용하였으며, 호소하는 촌맹(村氓)을 옥에 가두고 함부로 죽였으니, 그 나머지의 죄악은 4총(聰)의 아래에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아! 슬픕니다! 저 안종수란 자는 역절(逆節)이 드러나고 소문이 나서 신하의 분수는 이미 끊어졌으니 이것은 진실로 난신적자로서 사람들이 주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안종수를 죽이지 않고 김홍집과 정병하의 자리에 두고 김홍집과 정병하의 권세를 맘대로 휘두르게 한다면 홍집과 병하가 한 짓보다 배나 심할 것임을 그대로 서서 볼 수 있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본주는 의병이 구름처럼 모여 때에 맞추어 근왕(勤王)을 하여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고 우리의 전장(典章)을 회복하고 우리의 조정을 안정시켜 왕께서 돌아오시는 경사가 있기를 바라오니 이것이 신자(臣子)들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저 안종수가 방자하게 악행을 저질러 여러 사람들의 노여움이 길에 가득하니 비록 왕법에 죽지 않더라도 여러 원수진 사람의 손에 죽을 것이니 또한 토벌하여 회복하는 한 가지 일입니다. 군위(軍威)가 조금 떨치니 마땅히 배나 빨리 근왕(勤王)하여 연곡(輦轂)의 아래에서 천안(天顔)을 뵙기를 바라옵니다. 오직 전하께서 살리고 죽이시기를 바라옵니다. 신은 피를 토하며 간절히 바라는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동시에 기참봉(奇參奉)도 상소를 봉하여 올렸다. 그 상소는 다음과 같다.
“삼가 신은 작년 12월 일에 상격(常格)에 구애됨이 없이 망령되이 상소 1통을 진달하였습니다. 대개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일, 잘못된 명령을 환수하는 일, 전장(典章)을 복구하는 일에 관하여 근심하고 아끼는 수천 마디의 말을 역력히 진달하였습니다. 개화(開化)란 두 글자는 난신적자가 임금을 기만하고 나라를 그릇되게 하는 간교한 계책입니다. 구적(寇賊)을 끌어들여 복심(腹心)으로 삼고 무리를 체결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여 우리 임금께서 손과 발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아아! ‘임금만이 복록을 내릴 수 있고, 임금만이 위엄을 발할 수 있다[惟辟作福 惟辟作威]’고 하였는데 위엄과 복이 임금에게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들의 손에서 일어난다면 그들이 장차 어디인들 이르지 못하겠습니까. 조정을 바꾸는 일에 손을 써서 성공시키고, 선왕의 전장(典章)에 손을 대서 변경하였습니다. 이에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위협하는 데 이르러 감히 그 칼끝을 밀치지도 못하였고 머리카락을 잘라서 당당한 예의(禮義)가 있는 오래된 나라가 오랑캐의 금수(禽獸)에 빠져 들어가게 한 것은 모두 개화란 두 글자가 그렇게 하도록 주장한 것입니다. 참람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 않고 큰 소리로 크게 호소하오니 날마다 부월(斧鉞)의 꾸짖음을 기다리나 아직 상(上)께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늘의 뜻이 송(宋)나라에 복을 내리 듯이 임금께서 혁연히 진노하시어 역괴(逆魁)는 대략 처치되었지만 뿌리와 줄기는 아직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발령은 이미 거두어들였는데도 개화당(開化黨)의 방자함은 더욱 심합니다. 옷의 제도는 이미 편한 대로 하라고 허락하였지만 옛 전장(典章)이 흡족하게 회복될 희망은 없습니다. 지난 날 크게 진노하심은 커다란 용기에 양보하셔서 개화당의 협박과 제어는 옛날과 같습니다. 협박과 제어가 지극함에 거가(車駕)가 몰래 움직인 것은 참으로 급박하여 부득이한 형세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라의 위축이 날로 급하고, 백성들의 원통이 날로 심합니다. 아아! 동방 3천리 강토에 전하의 신하된 자가 목구멍 사이에 하나의 숨이 붙어 있다면 어찌 난신적자가 창궐함이 여기에 이르도록 내버려둔단 말입니까. 이로부터 임금과 백성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필주(蹕駐)의 현재 상황에 대하여 의아함을 풀길이 없으니 백성들이 분개합니다. 의병을 규합하고 힘을 다해 근왕(勤王)을 하여 적개심을 가지고 어려운 방어를 하고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백성들의 본성과 사물의 법칙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유(宣諭)의 행차에 백성들의 의혹이 더욱 심해지니 대개 궁거(宮車)가 밖에 주둔해 있고 강한 이웃나라에 의뢰하기가 마치 호랑이를 풀어놓고 스스로를 호위하듯이 하여 믿고서 편안히 여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것은 곧 우리 전하의 신하와 조종(祖宗)이 융성할 때 윗사람을 친히 여기고 어른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백성들이니, 의당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뜻으로 간절한 마음을 포고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무사태평한 판국에서 포고를 기다리지도 않고 모두 일어나 분발한 것은 선왕(先王)의 은택이 사람들에게 깊이 들어가 있고 백성들의 본성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서둘러 가상하다고 어루만지고 위로할 겨를도 없을 터인데 도리어 회유하고 위협하여 나라를 위하는 방향으로 가는 정세를 막으니 전하께서 어찌 이렇게 하신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개화당이 된 자가 스스로 화(禍)가 그 몸에 미칠까 염려하여 자신을 위해서는 도모하고 나라에 대해서는 도모하지 않으며, 전하의 위엄과 복을 조롱하고 밖에 위령(威令)을 과시하는 데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아아! 전하의 급함이 오늘과 같은데도 붙들어 굳게 안정시킬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기대어 자신과 처자를 보존하려는 계책으로 삼는 자는 국법에서 도망갈 곳이 없는데도 도리어 적에게 성을 내고 나라를 위해 죽고 윗사람을 친히 여기고 어른을 위해 죽는 사람을 가리켜 죄를 지었다고 하니, 적에게 붙어 따르는 무리들이 막고 가리고 제도를 잘못되게 하는 습속은 속이 들여다 보일 지경입니다. 지난번에 삼가 읽은 칙방(勅榜)중에 ‘참으로 본 마음이 아니다[實非本心]’라는 4 글자는 마치 안개가 걷히고 해가 보이는 것 같았는데, 궁거(宮車)가 한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애통한 말씀은 소리가 없어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하니 신이 오늘 하는 일은 밝은 하늘이 위에 임해 있고 귀신이 곁에서 질문을 하니 비록 처형장에서 죽임을 당하더라도 오히려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여러 사람의 분하고 억울함을 거두어 여러 읍에 통문을 보내어 알리고 많은 유생(儒生)을 불렀습니다. 지난 번 장성(長城)의 교재(校齋)에 있을 때 약속이 진행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침 들으니 크게 간사한 안종수가 역당(逆黨)으로 용사하던 날 자칭 참서(參書)라고 하며 나주에 있던 자가 악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 여러 사람이 노여워하는 속에서 죽었다하기에 행여 이를 계기로 간계가 생길까 염려하여 빨리 주(州)로 달려가서 살펴보았다. 그 악을 쌓은 싹이 여러 원수들에게 살해되어 사방으로 트인 거리에서 몸이 잘려져 고깃점이 만들어지기를 마치 김홍집과 정병하처럼 여지없이 되었습니다. 아! 안종수의 당역(黨逆)은 가릴 수가 없습니다. 작년 8월의 변란은 신하로서는 원통하고 절박하여 뼈에 사무쳐 밤낮으로 절치부심해야 할 일인데도, 안종수는 여러 사람 가운데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갑오년 6월에 이 일을 정해 두었는데 오늘까지 끌어 왔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향교를 세워 유생을 기르는 것은 나라에 보탬이 안 된다. 향교는 헐고 학당은 남겨두어 병오(兵伍)를 설치해야 한다. 객사(客舍)에서 바라보며 하례하는 것은 허문(虛文)으로 좋을 것이 없으니 고쳐 정청(政廳)으로 만들어서 마땅히 실제의 일을 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몇 마디 말이 그 입에서 나온 날에 신하의 본분은 이미 끊어진 것입니다. 신하의 본분이 끊어졌다면 우리 임금과 신민(臣民)에게 불공대천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으니 사람들이 잡아서 주참해야 합니다. 죽어야 그 죄에 마땅한데 무슨 기타의 법조항을 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기꺼운 마음으로 죽이게 할 수 없었는데 마침 여러 원수들이 결말을 짓고 말았은즉 사구(司寇)가 함부로 죽인 것이 아니니, 또한 여기에서 거론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본시 의리를 외치는 소리가 드높아 약속이 이미 정해져서 나쁜 싹이 터서 난리가 생기려는 우려가 없게 되었으므로 불러모아 때에 맞추어 근왕(勤王)을 하면 혹 이기게 될 것입니다. 우선 그러한 즐거움 때문에 그대로 둘 것은 두고 하읍(下邑)을 거두어 모아서 결단코 한 번 죽기로 싸워서 섬나라 오랑캐를 물리치고 개화당을 쳐 없애고 궁거(宮車)를 받들어 돌아오게 하고 옛 법을 회복하면 무기를 푸는 날에 지척에서 천안(天顔)을 바라볼 것이니, 그때 전하께서 신을 살리든 죽이든 하십시오. 신은 피를 토하며 간절히 바라는 지극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읍(邑)에 군고(軍庫)를 두는 것은 본래 성읍을 수비할 계책이지만 근왕(勤王)에 사용하는 것도 명분과 의리가 진실로 합당합니다. 읍은 없을 수 있으나 나라는 없을 수 없으니 군병이 출발하는 날 마땅히 관고(官庫)를 사용해야 할 것인데, 아! 저 개화당이 이미 오늘이 있을 줄 알고 모두 왜인(倭人)에게 날라다 맡겼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모두 개인이 가지고 있던 것에서 나왔으니 함부로 사용하는 죄가 없도록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아! 저 마음속으로 나라를 없게 하려는 계책은 이를 가지고서라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삼가 전하께서 살피시기 바랍니다. 양향(粮餉)과 접응(接應)에 대해서는 괴롭게도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백성에게서 내게 한다면 백성들은 하루의 양식도 없고 선동하고 어지러워지는 폐단이 쉽게 이르게 됩니다. 각 읍의 세전(稅錢)이 국가의 경용(經用)으로 들어가지 않고 오랫동안 간당(奸黨)의 사사로운 주머니가 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을 허대(許貸)하여 나라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뒤를 이어 쓸어버리고 평정되는 날에 지휘를 기다려 조획(措劃)하고자 합니다. 나아가 나주에 있는 것을 말하자면 안종수가 왜인에게 쌀을 사고 베를 사 가는 것을 허가하여 현재 많이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무리가 거쳐간 군(郡)은 모두 그럴 것이니 군용(軍用)으로 허대(許貸)하기에는 넉넉하지 않습니다. 방편(方便)으로 조획(調劃)해야 하는데 우선은 어떻게 만들어 갈 지 모르겠습니다. 아! 저들이 나라를 없앨 생각을 했다는 것은 이것을 가지고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삼가 전하께서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본주(本州)의 의유(義儒) 오계수(吳繼洙)가 의무(義務)를 상의하여 확정하는 자리에 참여하여 상소의 내용을 토론하였다. 사과(司果) 이승수(李承壽)도 상소를 바치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이주서(李注書)가 이동(泥洞)에 사는 판서(判書) 이재완(李載完)에게 편지를 보내어 대충 그 개략적인 내용을 설명하였다.
21일. 유기영(柳畿永)이 성을 돌면서 군졸을 격려하였다. 지도(智島)의 백성이 고하기를 해도(該島)의 세전(稅錢)을 의소(義所)에서 독촉한다고 하였다. 이주서(李注書)가 말하기를 “막중한 세전을 누가 어찌 독촉한단 말인가? 밖에 있는 협잡하는 무리들이 아니고는 할 수가 없다. 엄하게 금단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22일. 송사(松沙)가 광주로 옮기려고 하였다. 생각하기에 나주는 군제(軍制)가 이미 익숙하게 되었지만 외읍(外邑)의 군사는 아직 뭉쳐지지 않아서 하읍(下邑)을 수습하여 불러 모으려는 계책이었다. 오재수(吳在洙)·임긍규(林肯圭)·이원서(李源緖)·이병수(李炳壽)·송종희(宋鍾熙) 등 여러 유생이 모두 따라 나가서 전별하였다. 유기영이 천보군(千步軍)을 이끌고 전별하고 납평읍참(南平邑站) 30리에 이르렀다. 같은 날, 이병수가 통문의 답을 지어 담양·창평·순창·장성·광주 등 5읍에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조순(趙盾)이 진(晉)나라에 난리가 났을 때 나가서는 국경을 넘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자 동호(董狐)가 그 죄를 직필로 썼다. 지금의 이른바 대대로 녹을 먹는 진신(搢紳)들은 진나라의 경(卿)보다 죄가 크니 뒷날에 사필(史筆)을 잡은 자는 마땅히 법대로 쓰고 숨기지 않을 것이다. 아아! 작년 8월의 변은 곧 신하들이 하늘이 다하도록 뼈에 사무치는 통탄스런 원한인데도 아직 복수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고, 군부(君父)가 몽진(蒙塵)을 했는데도 아직 근왕의 계책이 없으니 장차 어떤 말로 저 무리들과 어울렸다는 꾸짖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바야흐로 본 주(州)에서 의병을 규합하고 하읍(下邑)을 거두어 불러서 기일에 맞추어 근왕을 하고 토벌하여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몇 개의 읍재(邑宰)는 군기(軍機)를 막아 어지럽게도 하고, 혹은 영도(榮途)에 시끄럽게 나아가고, 잔치하며 편안히 쉬거나 기대어 관망하며, 혹은 겁이 나서 떨쳐 일어나질 못하였다. 참으로 한 사람의 의사(義士)가 있다면 마땅히 익덕(翼德, 張飛의 字)이 노하여 독우(督郵)를 채찍으로 때리듯이 해야 하는데 돌아보건대 이것은 하지 않고 도리어 또 순순히 받드니 어찌 원통하고 분함을 이기겠는가. 본래의 왜(倭)와 본래의 역(逆)은 어쩔 수가 없으니 왜에 붙고 역에 붙는 자들도 물론 반드시 장차 성내에서 만날 것이다. 충(忠)과 역(逆)의 구분은 한 터럭도 용납되지 않으니 적에 붙어서 삶을 훔친다면 머리를 깎는 사람도 반역이요, 머리를 깎지 않은 사람도 반역이다. 대체로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의를 같이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 설 수가 없고 용기가 없으면 할 수가 없다. 오직 바라건대 여러 군자(君子)들은 병기를 펴서 묶고 군사를 불러 모아 어려움을 널리 구제하고 당역(黨逆)의 꾸짖음으로 돌아가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
23일
러시아 사관(査官) 1인과 병정(兵丁) 2인이 본주(本州)에 도착하여 수성(守城)의 갖춤을 보고 그 원위(源委)를 물었다. 이주서(李注書)가 통역더러 답하게 하기를 “나라의 운명이 어려워 국모는 해를 당하고 역당(逆黨)이 일을 꾸며 임금께서는 몽진(蒙塵)을 하였다. 오직 우리 성에 가득 찬 신민(臣民)이 분하고 급박함을 뼈에 새겨 장차 토벌하여 회복하고자 의병을 불러 모아 호위(扈駕)를 하고자 하는 뜻을 삼았다. 또 본주(本州)는 연해(沿海)에 있는 큰 읍으로서 외구(外寇)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이처럼 성을 수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러시아 사관(査官)이 말하기를 “귀국이 모두 나주의 백성들과 같다면 어찌 구적(寇賊)을 근심하겠는가? 국가의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라고 하면서 칭탄(稱歎)을 그치지 않았다.
24일
러시아인이 무안읍(務安邑)을 향하여 길을 떠나자 각 초(哨)의 군대가 일제히 방포하여 위무(威武)를 과시하였다.
25일
시찰(視察) 박준성(朴準成)이 유기연(柳紀淵)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왕의 군대가 경계에 도착하였다고 하는데 청컨대 수비(守備)를 파하고 성 안으로 끌어 들임으로써 선유(宣諭)의 뜻에 부응하는게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26일
여러 장령(將領)을 모아 서로 논의하니 모두 말하기를 “당초에 우리 주(州)의 이러한 거사는 의(義)로 군사를 일으킴인데 지금은 선유사(宣諭使)가 있고 왕사(王師)가 뒤에 있다고 합니다. 견고한 성에 이르러 저지하여 지키면 단사호장(簞食壺漿)으로 맞이하는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의병이 점점 해산하였다.
27일
소를 잡고 술을 걸러 성을 지키던 군졸들에게 잔치를 열어 호궤(犒饋) 하였다.
28일
유기연(柳紀淵)과 박준성(朴準成)이 왕사(王師)를 영접할 뜻으로 나가서 주(州)의 북쪽에 있는 입석참(立石站)에 이르렀다. 들으니 왕사가 바야흐로 진주(晉州)로 향하고 완군(完軍)이 내려온다고 하여 두 사람은 헛되이 돌아왔다. 이주서(李注書)가 참모(參謀) 나병두(羅秉斗)에게 묻기를 “완군(完軍)은 어느 방향에서 오고 행기(行期)는 어느 날에 있다고 하더냐?”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호허법(狐虛法)으로 미루어보면 금년은 진사(辰巳)의 방향이 외롭습니다. 완군은 반드시 외로움[孤] 을 등지고 빈 곳[虛] 을 치면서 올 것이니 남평읍(南平邑)의 경계로 올 것입니다. 또 행기(行期)는 아마도 다음 달 초4일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과 같이 완군대장(完軍隊長) 김병욱(金炳郁)이 무리를 이끌고 나주로 들어와 몰래 순검(巡檢)을 파견하고 병정(兵丁)을 아울러 해남으로 갔다. 정석진(鄭錫珍)이 임소(任所)에서 체포되어 왔다.
3월 초10일
해(害)를 만나 온 성의 사람들이 모두 달아났고 원근(遠近)의 우는 소리에 듣는 자가 놀라며 슬퍼하지 않음이 없었다. 동시에 전초토사(前招討使) 민공이 담양(潭陽) 임소에서 역시 체포되어 북쪽으로 갔다. 이주서(李注書)가 비분하여 스스로 탄식하여 말하기를 “아만(阿瞞)이 하늘을 끼고 있어 한(漢)나라의 복을 회복하기가 어렵고, 진회(秦檜)를 죽이고 주전파(主戰派)를 탄압하면서 금(金)과 화약(和約)을 맺어 뒤에 간신으로 몰리었다.가 일을 꾸미니 악비(岳飛)가 원통하게 죽는구나. 아아! 슬프도다!”라고 하였다. 그 후 10년에 장성(長城)에서 기삼연(奇參衍)이 창평(昌平)에서 고광순(高光詢)이 의거한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