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평비명 병서[討平碑銘 幷序]
금상(今上, 고종) 갑오년에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적이 일어나 요사스러운 학설과 함께 부적과 주문을 끼고서 어두운 자를 미혹하여 속이고 나약한 자를 위협하여 끌어들였다. 평소에 숨어서 절개를 지키고 의로서 죽음을 강론하여 정하지 못한 자는 서로 빠져들어 당을 만들어 공사(公私)의 포(砲)와 말[馬] 과 전곡(錢穀)을 마음대로 약탈하니 군현(郡縣)은 기세만 보고도 문을 열고 받아들여 그 칼끝을 늦추고자 하였다. 그 의를 밝히고 항거하여 지키면서 대략 섬멸한 곳으로는 호서에는 홍주가 있고 호남에는 나주가 있었다. 홍주는 멀어서 자세하지 않지만 나주는 땅이 아주 가까이 접해 있어서 그 호흡성기(呼吸聲氣)에 대해 듣는 것이 마치 보는 것과 같았다.
당시의 일에 대해 바른 사람은 한편으로는 나주를 마치 길을 잃은 배가 북두칠성을 보듯이 믿었고, 그른 사람은 한편으로는 나주를 마치 등을 찌르고 눈을 찌르듯이 꺼려하였다. 바름[正] 에 대한 믿음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그름[邪] 에 대한 꺼림이 저와 같았다. 나주의 목민관은 곧 민종렬(閔種烈) 공으로 유학을 공부하였고 나주에 이르러서는 향약으로 인도하고 이끌어 백성들로 하여금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며, 바름을 세우고 그릇됨을 종식시킬 줄 알게 하였으니 의(義)와 충(忠)과 효(孝)를 하는 유속(遺俗)이 고을 인사들을 진작시키고 격려시키는 데서 바꾸었다.
고을 일을 맡겨줌에 이르러서는 성을 수호하는 데에 딴 마음이 없었다. 남쪽의 50개 주가 사비(邪匪)의 소굴이었는데 한 조각 고성(孤城)으로 다시 넓히고 일으켜 세울 기반으로 삼으니 하늘의 뜻이 참으로 우연이 아니었다. 처음에 적이 영병(營兵)을 고부(古阜)에서 깨뜨리고 곧장 나주의 서쪽 경계로 바싹 다가왔다. 그들이 보내온 편지의 내용이 매우 패악스러웠는데 공이 편지 뒤에 쓰기를 “명분 없는 거병은 법에 의해 마땅히 죽여야 하며 도리에 어긋난 말은 듣고 싶지 않다[無名之擧, 在法當戮, 不道之言 非所願聞]”라면서 물리치니, 적이 기세가 막혀 몇 사(舍, 30리)를 물러났다. 아아! 이는 비록 미세한 16자 언사였지만 그 필봉(筆鋒)이 부월(斧鉞)보다 날카롭고 엄하여 바야흐로 달려오는 수만의 예기(銳氣)를 꺾었다. 참으로 바른 기운이 있는 곳은 도깨비가 모습을 감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에 소탕하여 평정함은 대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경군이 영광에 바싹 도착하여 장성에서 적에게 패하였다. 대관(隊官)은 의롭게 순절하였고 윤사(綸使)는 욕되게 죽었으니 역절(逆節)이 더욱 드러나 실낱같은 희망도 없었다. 이에 곧바로 달려 완성(完城)을 함락하였고 경군이 앞을 압박하자 적은 스스로 죽으러 갈 것을 알아 애걸하며 이 성을 벗어나서는 더욱 거리낌이 없었고 도당이 더욱 늘어나고 잔학함이 더욱 심하였다. 그러나 나주가 자신들의 뒤를 밟을까 두려워하여 힘을 합쳐 유린할 계책을 세웠다. 대개 적은 수가 많은 수를 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름[邪] 이 바름[正] 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처음에 공이 성을 지킬 계책을 정할 때 영장(營將) 이원우(李源佑) 공이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여 중요한 사무를 처리하였고 군대가 출동할 때는 진병(鎭兵)을 이끌고 후성(後聲)을 위하여 이끌어 이어지게 하였다. 주승(州丞) 박상수(朴祥壽)가 위와 아래를 이어 받아 따르는지 어기는지를 감독하며 살폈다.
말하기를, “정태완 너는 도통장이다. 크고 작은 군무(軍務)를 네가 모두 주관하라. 분발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고 군사들의 사기를 격려하는 것은 너만이 잘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김재환 너는 부통장이다. 적을 잘 헤아리니 긴 계책을 세우고 적을 제압하고 승리하는 것은 너만이 잘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손상문 너는 도위장이다. 군대의 지출을 접응(接應)하여 군량과 무기를 넉넉하게 하여 전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은 너만이 잘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김성진 너는 중군이다. 군령을 분명히 펴고 멈추고 나아감을 교련하여 사졸들이 용감히 싸우게 하는 것은 너만이 잘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김창균 너는 통찰이다. 군대가 명령을 듣는지 듣지 않는지는 네가 모두 살피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전학권 너는 별장이다. 너의 포군을 거느리고 부지런히 파수하여 군대가 나갈 때 뒤를 막아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박근욱(朴根郁) 너는 별장이다. 서문을 맡아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문낙삼(文洛三) 너는 별장이다. 북문을 맡아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박윤칠(朴允七) 너는 별장이다. 동문을 맡아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문관후(文寬厚)와 박경욱(朴京郁) 너희들은 별장이다. 남문을 맡아라. 적들이 들어오는 곳도 오직 그 문이요, 군대가 나가는 곳도 오직 그 문이다. 그 들어옴을 막고 나가는 것을 삼가는 것은 오직 너희의 공이다. 출입에 있어서 수상한 것을 금지하여 적이 염탐하지 못하게 하는 일은 오직 너희들이 살펴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최윤룡(崔允龍)·박성로(朴成老)·김석균(金錫均)·박윤홍(朴允弘) ·박관욱(朴寬郁)·오득환(吳得煥)·서연권(徐然權)·오화준(吳華準)·박상욱(朴尙郁)·최용환(崔鎔煥)·박두영(朴斗英)·양남중(梁南中)·손유택(孫有澤)·오득제(吳得齊)·박봉년(朴琫年)·박년규(朴年珪)·김양문(金良文)·이춘익(李春益) 너희들은 모두 별초군관(別哨軍官)이다. 각각 네 부오(部伍)를 거느리고 열심히 지켜라. 적이 오면 앞으로 나아가 사기를 진작시키고 뒤를 이어서 소리를 질러 응원하여 그 기미를 잃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들을 가상히 여기리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김학술(金鶴述) 너는 참장(參將)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박시홍(朴時泓) 너는 참모(參謀)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구유술(具有述) 너는 군대의 물품을 맡아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장길한(張佶翰)·이돈기(李敦祺) 너희들은 첩부(牒簿)를 맡아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양인환(梁仁煥)·최문섭(崔文燮) 너희들은 서기(書記)를 맡아라. 각각 너희의 직무를 거행하여 군무(軍務)를 보좌하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김근환(金根煥) 너는 병방색(兵房色)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기학연(奇學衍) 너는 도훈도(都訓導)이다. 아울러 군대를 점열하라. 오는 자를 가상히 여기며 가려는 자를 힘쓰게 하고, 따르는 자는 상을 주고 어기는 자를 부끄럽게 하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봉(鳳)·김진해(金振海) 너희는 별군색(別軍色)이다. 아울러 장차 척후(斥候)를 하라. 상세하게 밝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손동섭(孫東燮)·장봉삼(張鳳三)·정한탁(丁漢卓) 너희는 정탐(偵探)을 맡아라. 삼가 엄밀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양화영(梁華永)·나금만(羅錦滿)·김일운(金日運) 너희는 수부(需簿)를 맡아라. 청렴결백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최성순(崔成純) 너는 천총(千摠)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윤용성(尹龍成) 너는 파총(把摠)이다. 아울러 행군(行軍)을 맡아 포석(砲石)을 무릅쓰고 사졸(士卒)보다 앞장서서 모두가 너희를 공경하게 하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승룡규(昇龍奎)·손치홍(孫致洪)·나학곤(羅學坤) 너희는 성가퀴 보수를 맡아라. 보수되지 않으면 군민(軍民)이 기댈 곳이 없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고덕봉(高德鳳) 너는 도집사(都執事)이다. 모든 군무(軍務)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네가 잡아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전공서(錢公瑞)·김기옥(金基玉) 너희는 별군관(別軍官)이다. 나아갈 줄은 알되 물러날 줄은 모르며 부병(部兵)을 감독하고 신칙하여 흩어진 적을 쫓아가 체포하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박수협(朴守俠)·김양규(金陽奎)·정석완(鄭錫完)·양상언(梁相彦)·김홍재(金洪在)·박흥주(朴興柱)·안동찬(安東燦 )너희는 순초(巡哨)이다. 여러 초(哨)를 다니며 효유하고 각각 힘을 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윤기문(尹起文) 너는 군기(軍器)를 맡아라. 갑옷을 잘 수리하고 창과 칼을 잘 갈아서 감히 삼가지 않음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강춘삼(姜春三) 너는 용감하고 힘이 세다. 수대포(手大砲)를 앞에 세워 적의 예봉을 꺾어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최경봉(崔慶鳳) 너는 별장(別將)과 포군(砲軍)을 달려가 도와 힘을 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김준보(金俊甫)·박흥연(朴興淵)·정일서(鄭日西)·허치관(許致寬) 너희는 기패관(旗牌官)이다. 4문(門)을 나누어 익히되 파수는 함께 하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너희 68인은 곧 민공이 너희를 수족으로 여기고, 부오(部伍)는 너희를 두목(頭目)으로 여긴다. 적을 쳐서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너희에게 달려 있고, 적을 풀어 주어 임금에게 물려주는 것도 너희에게 달려 있다”라고 하였다.
군중이 모두 눈물을 뿌리며 목숨 걸고 싸우기를 원했다. 이에 의기(義氣)가 성에 가득차고 의성(義聲)이 사람에게 전파되자 적도 담이 떨어져 기가 다하였다. 이때 나주의 인사(人士)들도 의병을 일으켜 중외(中外)에 도움이 되겠다고 계획하고 유기연(柳紀淵)·임노규(林魯圭)·민주식(閔周植)·유병식(柳秉植)·임한상(林漢相)·박훈양(朴薰陽)·오석환(吳錫煥)·나사집(羅史集)·임병한(林炳翰)·정재형(鄭在衡)·나도현(羅燾鉉)·이기우(李祺宇) 등이 실로 그 두령이 되니 대개 다른 읍에서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성을 지키는 장졸의 날카로운 기운이 날마다 쌓여 한 사람이 백 명을 담당할 수 있게 되자 모두가 적과 한 번 싸우고자 하였다. 첫번째 무안에서 적과 싸울 때는 여중(如衆)이 머리를 바쳤다. 서문(西門)에서 두 번째 이길 때는 최경선(崔敬善)이 밤에 도망갔다. 사창(社倉)에서 세 번째 이길 때는 적들의 소굴을 소탕했다. 네 번째 용진산(聳珍山)에서 이길 때는 권선(權善)이 몸만 빠져 나갔다. 다섯 번째 고막(古幕)에서 이길 때는 패하여 죽은 적의 시체가 들에 가득 찼다. 여섯 번째 남산(南山)에서 이길 때는 적이 기세만 보고도 스스로 무너졌다. 군이 출정할 때는 항상 많이 죽이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그러므로 달아나 숨으면 곧 그치고 끝까지 추격하지 않았다. 위협으로 따른 자는 귀화시키고 기계를 갑자기 많이 획득하니 적도 기가 막혀 다시 힘을 쓰지 못하였다. 마침 남쪽으로 정벌하며 내려오는 경군과 합세하여 곧바로 적의 소굴을 치니 거괴(巨魁)가 죽었다. 상(上)께서 민공을 가상하게 여기고 거센 물결 속에 지주(砥柱)와 같다고 여겨서 호남초토사(湖南招討使)를 더해 주시고 남은 적들 가운데 아직 흩어지지 않은 자들을 찾게 하였다. 영장(營將) 이하로 벼슬과 상을 내려줌에 마땅히 차등이 있어야 하겠으나 아직 거행하지 않았다.
아아! 바야흐로 적이 창궐함이 앞뒤로 9개월이었다. 생민의 목숨이 어육(魚肉)이 되어 마치 홍수가 끝없는 것과 같았다. 훔쳐보니 이와 같이 신(神)처럼 빠른데 어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바이겠는가. 나는 나주가 없었다면 호남이 없었고, 민공이 없었다면 나주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전 호남의 생민이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실낱같은 목숨을 보존하게 된 것은 모두 그의 공이니 마땅히 그 일을 노래하고 금석에 새겨야 하리라. 공은 그 공을 갖지 않고 왕령(王靈)에게 돌렸으며, 인화(人和)와 졸복(卒服)의 그 아름다운 일로 또 장리(將吏)가 의로움을 나타낸 것에 양보하였다. 다만 열읍이 기세를 보고 문을 열어 받아들인 것을 보면 장리가 먼저 물들어 싹을 틔우지 않음이 없었다. 그렇다면 공이 아름다움을 양보한 것은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나주 인사들이 장차 돌에 새겨 노래하려고 하면서 우만(宇萬)으로 하여금 그 일을 기록하고 명(銘)을 짓게 하는데, 사인(士人) 양상태(梁相泰)·임긍규(林肯圭)가 그 심부름을 하였다. 공(功)은 크고 문(文)은 짧아서 멀리 보이기에 부족하지만, 또한 혜택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이니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 다음과 같이 명을 한다.
국조 5백년에 문교(文敎)가 이미 융성하였네. 오랜 융성에 쇠퇴하기도 하여 이단의 말이 어지럽네. 마치 주(周)나라 때 노자(老子) 같고 한(漢)나라 때 석가(釋迦) 같네. 색은행괴(索隱行怪)를 서술함은 뒷날 있을 후환 때문이라네. 지금의 그름[邪] 과 같은 것은 옛날에도 기댈 곳이 없었네. 어리석은 백성들이 무리를 지어 난을 일으켰네. 현명한 이가 어리석게 구는데도 무리들이 번다하네. 화의 싹과 사나운 단계는 그 소굴을 양호(兩湖)에 두었네. 풍문을 듣고 달려가 군현(郡縣)은 묶을 수가 없었다네. 왕사(王師)의 명을 거역하고, 완성(完城)을 무너뜨려 점거하였네. 우뚝 솟은 금악(錦嶽)이여 서 있기가 숫돌 같네. 목민관은 민공이니 칼을 안고 일어났네. 진(鎭)이 있고 장수가 있으니 의로운 기운 함께 하네. 오직 승(丞)과 사(史)도 몸을 다 바쳤다네. 적이 편지를 보내 엿보니 보낸 말이 패악스럽네. 뒷면에 적어 보낸 16자에 적의 등엔 땀이 흐르네. 다른 때에 소탕함은 그 조짐 여기에 있었다네. 모든 호남이 온전하게 살 수 있음은 그가 아니면 누구를 믿겠는가. 완전히 둘러싼 남쪽이 궤멸되니 이에 공(功)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마치 불이 더욱 뜨거워지는 것처럼 따를 수가 없네. 공께서는 괜찮다고 하지만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이 슬퍼하네. 일찍이 금성에서 적과 싸워 이미 그 적괴를 죽였다네. 서문(西門)의 승리와 사창(社倉)의 전투라네. 이미 예봉을 꺾고 그 소굴을 소탕하였네. 용진산(聳珍山)으로 급박히 쫓아가고 고막(古幕)에서 깨끗이 소탕하였네. 남산(南山)으로 밤에 달아나니 바람소리와 학의 눈물이 되었네. 공께서 지나치게 따지지 말라 하니 위협에 따른 자는 슬퍼할 만하다. 기가 막히고 담이 떨어지니 떨어져 날리기가 썩은 나무 같았네. 왕사(王師)가 남정하여 이에 그 다스림을 강구하였네. 공을 따르며 호소하니 눈물을 줄줄 흘린다네. 스스로 새롭게 됨을 허락하여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네. 적이 평정되고 그름[邪] 이 종식되기가 신속하여 지체되지 않네. 나라에는 기둥이 되었고 유학(儒學)에는 표준이 되었네. 돌에 새겨 칭송하니 영원히 없어지지 말라. 공께서 말하기를 왕령(王靈) 때문이지 태수(太守)에게는 공이 없다. 인화(人和)와 졸복(卒服)은 아전 누구누구 때문이라네. 덕(德)을 돌리고 아름다움을 사양하니 이로써 영예가 되었네. 우리 부녀자와 아들들은 함께 먹고 마시며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네.
7월 초5일
작년에 서성루(西城樓)에서 적을 깨뜨린 날이었다. 요좌(僚佐)와 빈객(賓客)을 크게 모아 잔치를 베풀고 함께 즐겼다. 그 잔치를 일러 ‘지희’(志喜)라고 하고 그 즐거움을 일러 ‘파진’(破陣)이라 하였다. 민공이 운(韻)을 뽑아 세 수를 지었다.
去年今日錦西城 지난 해 바로 오늘 금성의 서쪽에서
三百官軍破賊兵 3백 명의 관군이 적병을 깨뜨렸네.
同我忠勤諸將領 나와 함께한 충성스럽고 근실하였던 여러 장령들은
屹然砥柱得全名 우뚝 지주(砥柱)가 되어 이름을 온전히 하였네.
八朔辛勤守此城 8개월간 고생하여 이 성을 지켜내니
人和元不在多兵 인화(人和)는 원래부터 병사의 수에 있지 않네.
下回竟奏南山捷 아래로 돌아 마침내 남산의 승리를 아뢰니
無愧湖維保障名 호남 지역을 지켰다는 명성에 부끄럽지 않다네.
官軍喜氣動全城 관군의 기쁜 기운이 온 성(城)을 움직이니
周歲塵晴已釋兵 한 해 만에 티끌이 맑아져 이미 무기를 풀었네.
祭罷敎聽絲管響 제사를 마치고 음악소리를 듣게하니
聊將破陣錫嘉名 파진(破陣)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내려주시네.
山河鞏固奠城基 산하가 공고하여 성 터를 정하고
日月光明竪義旗 해와 달이 광명하여 의로운 기를 세우네.
擿埴冥行神賜誠 적식명행은 신께서 정성을 주신것
我心無愧上天知 내 마음 부끄럼 없는 것 하늘은 알리라.
[이때 민공이 꿈에 명행적식(冥行擿埴) 4 자를 보았기 때문에 이 시를 지었다.]
차운(次韻) 도통장 정석진(都統將 鄭錫珍)
東徒猖獗敢窺城 동도(東徒)가 창궐하여 감히 성을 엿보니
寂寞南湖募義兵 적막한 남호(南湖)에 의병을 모았다네.
奉賀戎壇招討使 융단(戎壇)에 올라 초토사(招討使) 됨을 경하하니
豊功千載不能名 풍성한 공은 천년이 지나도 이름할 수가 없네.
三百官軍共守兵 3백 명의 관군이 함께 성을 지키니
天心黙祐掃妖兵 천심이 말없이 도와 요사스런 병사를 쓸어내었네.
出師尙乏涓埃報 출사를 하여도 아직 조그마한 승전보가 없으니
慚愧匪才統將名 재주 없이 통장(統將)이란 이름 부끄럽네.
今年此日倚西城 금년 이 날에 서성(西城)에 기대니
錦水東流已洗兵 금성의 물이 동쪽으로 흘러 이미 병기를 씻었네.
化裏羣情安百堵 교화 속에 백성들은 모두 안도하고
好將宴飮永留名 좋은 장수들 잔치를 벌여 영원히 이름을 남기네.
차운(次韻) 난와 오계수(難窩 吳繼洙)
南來明府作長城 남쪽으로 명부(明府)에 오셔서 장성(長城)을 만드니
自有胸中數萬兵 스스로 흉중에 수만의 병사 있네.
匪賊聞之驚破膽 비적이 듣고 놀라 담(膽)이 떨어지니
嵬勳盛烈可能名 큰 공훈 성대한 공열 이름할 수 있겠는가.
周年拒守一孤城 한 해 동안 파수한 한 고성(孤城)은
壯士同心奮義兵 장사(壯士)가 한 마음으로 의병을 떨쳤네.
夜報捷書明似晝 밤에 보고한 승리의 글은 낮처럼 환하고
豊碑崱屴不磨名 큰 비석 우뚝하여 이름 지울 수가 없네.
前秋東匪敢窺城 지난 가을 동비(東匪)가 감히 성을 엿보았는데
此日南湖已解兵 오늘 남호(南湖)는 이미 병기를 풀었네.
復覩升平皆聖德 다시 승평(升平)을 봄은 모두 임금의 덕이니
絃歌新奏樂章名 거문고 노래에 새로 악장(樂章)의 이름 아뢰네.
여름과 가을 사이에 조정에서 나주를 변경하여 남도관찰부(南道觀察府)로 삼았고 참판(參判) 한기동(韓基東)이 처음 부백(府伯)이 되었는데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8월에 채규상(蔡圭常)이 드디어 부백으로 왔다. 안종수(安宗洙)를 참서관(參書官)으로 삼고, 동헌(東軒)을 행정청(行政廳)으로 하고, 진영(鎭營)은 경무관청(警務官廳)으로 하였다. 대개 읍무(邑務)를 주관하는 일은 모두 참서(參書)가 담당하였다. 민공은 물러나 향사당(鄕社堂)에 머물렀다.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였지만 격례(格例)와 맞지 않아 하지 못하였다.
8월 20일의 변란으로 왕비께서 해를 당해 중외(中外)의 민심이 흉흉하였다. 뜻있는 선비들은 피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나라의 원수를 토벌하여 천하에 대의를 펼치려고 하였다. 민공이 더욱 근심하고 통분하며 탄식하고 애도하며 말하기를 “슬프고 슬프도다. 30여 년 국모의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화에 걸려 곡반(哭班)을 행하지 않고 인산(因山)도 아직 정하지 않고 상제(喪制)도 아직 정해서 반포하지 않았으니 조정의 신료들이 그 어찌 시역(弑逆)의 죄를 면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1월에 이르러 비로소 곡반과 성복(成服)의 명이 있었다. 민공이 먼저 금성관(錦城舘)에서 망곡(望哭)하고 교유(校儒)에게 경내(境內)에 통문(通文)을 발송하게 하였다. 성복 전 7일은 천담복(淺淡服)으로써 아침저녁으로 통곡하니 피눈물이 번갈아 흘러내렸다. 성복하는 날 관찰사 채규상(蔡圭常), 참서관 안종수(安宗洙)가 비로소 참곡(參哭)하였다. 본주의 진신(搢紳)과 장보(章甫)가 모두 와서 곡반례(哭班禮)를 행하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민공이 갑자기 담양부사(潭陽府使)로 옮겨가게 되어, 약속한 날에 치장(治裝)하고 가서 나루에 모였다. 승지 박창수(朴昌壽)와 애타게 서로 이별하니 자못 차마 결연히 떠나지 못하는 뜻이 있었다. 돌아가 성묘(聖廟)에 배알하고 분향한 후 동재(東齋)에 앉아 교유(校儒)와 마주하고 이야기를 하였다. 조금 있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니 비단수건이 흠뻑 젖었다. 다음 날 담양으로 부임 행차할 때 당해 읍의 신연관예(新延官隷)가 감히 뒤에서 모시지 못했고 본주의 모든 장보(章甫)와 수성(守城)을 하였던 장령(將領)들로 전송하는 사람과 말이 40리나 이어졌다. 북창참(北倉站)의 거리거리마다 장막을 설치하고 술과 음식을 바쳤다. 민공이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받아 마시며 용진산(聳珍山)을 바라보고 두 번 세 번 탄식하며 말하기를 “저기가 권선(權善)이 밤에 도망간 땅인가?”라고 하였다. 도로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이 행차는 평상시에 전주감사(全州監司) 도임행차의 차비(差備)보다 낫다고 여겼다.
12월에 안종수(安宗洙)가 수령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역당(逆黨)이 일을 꾸며 제멋대로 협박을 하면서 억지로 머리를 깎게 하는 화(禍)가 있어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안종수가 포고한 뜻을 보고는 먼저 자기의 머리칼을 깎고는 여순검(呂巡檢)과 부화뇌동하여 군도(軍刀)를 들고 강제로 머리칼을 깎으니 더욱 혹심하였다. 이서(吏胥)와 군교(軍校)들은 달아나 피하기도 하고 스스로 머리칼을 자르기도 하였다. 이에 먼저 교유(校儒)들의 상투를 자르고자 하였는데, 대개 한 주(州) 수선(首善)의 곳이기 때문에 교유를 한번 깎으면 나머지는 손 가는대로 응하여 깎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오재수(吳在洙)·이병수(李炳壽)·송종희(宋鍾熙) 3인도 바야흐로 교임(校任)의 이름을 띠고 있었다. 오재수가 송종희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깎이면 그대도 깎인다. 그대의 나이가 가장 어리니 먼저 깎이는 우환이 없도록 보전하라. 나와 병수는 마땅히 우선 피해서 그 예봉을 늦추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12월 14일
어둠을 타고 교재(校齋)에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에 분향하여 절을 마치고 오재수는 묘정(廟廷)에 통곡하였다. 유생(儒生)과 교예(校隷)가 그것을 보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곧 출발해서 경현동(景賢洞)에 있는 나영집의 집에 도착해서 묵었다. 이날 밤 정석진이 촛불을 잡고 와서 모였다. 대개 정석진은 갑오년에 동비(東匪)를 토벌한 군공(軍功)으로 새로 해남현감(海南縣監)에 제수되어 종수에게 미움을 받고 또한 삭발을 피하던 중에 있다가 마침 교임(校任)이 유숙한다는 말을 듣고 뒤좇아 왔다. 서로 더불어 분통해 울며 화로를 둘러싸고 앉아 새벽이 되도록 잠들지 못했다. 함께 마음에 맹세하며 말하기를 “애통하다. 저 역수(逆竪)는 비록 머리카락을 뽑히더라도 죄가 용서받을 수가 없다. 아! 우리 뜻있는 선비들은 차라리 목이 잘릴지언정 의리상 삭발을 용납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별에 임해 슬픔의 정을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12월 28일
놀랍게도 전하께서 러시아공사관으로 몽진(蒙塵)했다는 소식이 들리니, 조야(朝野)가 들끓었다. 이보다 앞서 장성의 기우만이 단발령을 거두어 들이라는 뜻으로 상소를 봉하여 올렸다.[소본(疏本)은 여기에 싣지 않는다] 조금 있다가 중외(中外)에 단발령을 철회한다는 명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