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평 후에 정장군에게 보낸 글[討平後寄贈鄭將軍書]
송사 기우만( [松沙奇宇萬] )
동비(東匪)가 난을 일으키자 열읍이 무너졌는데 오직 나주의 수령 민공이 막고 지키는 데 힘이 있었다. 마침내 국가를 위해서 어지러움을 주살하고 포악함을 제거하였고 사림을 위해서 잘못된 행실을 막고 그릇된 말을 그치게 할 수 있었다. 높은 풍격과 큰 절개가 세상에 알려져 군무(軍務)를 맡게 되었다. 정태완 군은 민공이 늘 으뜸가는 공을 세웠다고 칭송하였으며 민공도 겸손하였으니 또한 그 의열(義烈)을 볼 수 있다. 군대가 출전한다는 것을 듣고 분연히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칼을 짚고 전진하며 사졸(士卒)을 위하여 앞장섰다. 일곱 번을 싸워 일곱 번을 이기니 정군이 격려한 힘이 아닐 수가 없다. 아아! 기세만 보고도 도망간 대부는 오히려 작록(爵祿)을 보존하는데 분연히 몸을 떨쳐 난을 평정한 장사(壯士)는 상전(賞典)이 미치지 않는구나. 정군과 같은 자는 의로움도 내 의로움이고 죽음도 내 죽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몸 밖에 있는 상과 벼슬이 어찌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마는, 국가의 상벌이 이와 같았으니, 정군과 같지 않은 자는 앞으로 권면하고 징계할 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정군을 생각하며 하나의 절구(絶句)를 얻었으니 정군에게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울분을 씻고자 할 따름이다.
十年寄寓已聞名 십년을 이 땅에 살면서 이미 이름은 알았는데
名下更欽奮義聲 이름 아래 다시 의로운 명성을 흠모하였네.
趁日思君君不見 날마다 그대를 생각해도 그대는 보이지 않고
錦城秋色倍崢嶸 금성의 가을빛은 더욱 더 깊어만 가네.
함평(咸平)의 사인(士人) 이영헌(李潁憲)·정방현(鄭芳鉉) 등 40여 인이 연명(聯名)하여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와서 장졸(將卒)을 먹이고 초토영에 장문(狀文)을 바쳐 공덕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민공이 다 보고 그 끝에 서압(署押)을 하며 말하기를 “적을 죽임에 공이 없는데 찬미가 과분하니 부끄럽도다”라고 하였다.[장문의 내용은 싣지 않는다.]
춘삼월에 민공이 영을 내리기를 “동비(東匪)가 약탈하였으나 다행히 하늘에 계신 신령의 도움을 받아 진실로 이미 다 토벌하고 남은 적이 없지만 슬프게도 우리 주의 백성들은 작년 가을에 가뭄이 들었고 또 큰 난리를 겪어 누렇게 부황된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진대(賑貸)할 방안을 의논하라”고 하였다. 이에 각 면의 약정이 각 리의 주린 민호를 가려 교외에서 구휼하였다. 민공이 친히 행차하여 돌아가며 위로하였다. 먼저 미음을 쑤어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 다음에는 남녀와 노약(老弱)과 정장(丁壯)을 헤아려 각기 양식을 차등있게 주었다. 백성들이 마음으로 서로 기뻐하며 모두 칭송하기를 “큰 추위 뒤에 다시 봄 햇살을 보는 듯한 은택을 입었다”라고 하였다.
여름에 향교에 있던 많은 선비가 합의하기를 “민공이 비적(匪賊)을 토벌하여 평정한 공은 곧 해와 달과 밝음을 다툴 만하니 마땅히 천하후세에 말을 남겨 두어야 한다. 돌에 새겨 칭송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돌을 깎아 비를 만들고 민공의 행적을 기록하여 정수루(正綏樓) 앞에 세웠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비문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