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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본주의 인사가 군공에 하례하는 장문[本州人士賀軍功狀]

오늘의 금성(錦城)이 있게 된 것은 곧 우리 성주의 덕분이다. 그 곧고 충성스러운 대의(大義)와 훌륭한 공적은 조야(朝野)에 아름답게 전하여 군더더기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의로움을 잡고 선(善)을 즐기는 성품을 지니고서 어찌 침묵할 수 있겠는가. 한 해전에 비류(匪類)가 창궐하여 요사스러운 기운이 치장(鴟張)하여 홍수나 맹수의 해로움보다 심하고, 황건(黃巾)과 적미(赤眉)의 난보다 혹독하였다. 군기(軍器)를 약탈하고 임금의 군대에 맞서 싸우고 명리(命吏)를 해치고 촌려(村閭)를 위협하여 탈취하니 양호(兩湖)의 여러 진(鎭)이 물이 새는 배처럼 위험하고 형세가 마치 철류(綴旒)와 같았는데 거센 물결에 지주(砥柱)와 같은 이가 세상에 몇 사람이 있었던가. 오직 우리 명공(明公)이 대의를 잡고 허물어진 성가퀴를 보수하고 민정(民丁)을 모집하여 어렵고 위태로운 시기를 준비하여 지나가게 하였다. 달고 쓴 것을 똑같이 나누며 여름부터 겨울까지 군대의 기율을 익숙하게 하고 낮부터 밤까지 군사들의 소리가 더욱 용맹하였다. 돌아보면 온 누리가 추위에 떨 때 한 가닥 양맥(陽脈)을 부지하였다. 아아! 어렵구나. 바야흐로 전적(全賊, 전봉준)이 함평에 있을 때 말이 지극히 패악스럽고 거만하여 명공(明公)이 “명분 없는 의거는 법에 의해 마땅히 죽여야 하며 도리에 어긋난 말은 듣고 싶지 않다[無名之擧, 在法當戮, 不道之言 非所願聞]”라는 16자로써 준열히 물리쳤다. 이것은 곧 담암(澹菴)이 한 장의 종이로 백만의 군대를 물리친 것과 같다. 최적(崔賊, 최경선)이 서문(西門)을 침범했을 때 모기를 쫓듯이 하고 함부로 죽이지 않도록 경계하였으니 이것은 조빈(曺彬)이 분향(焚香)을 하고 한 사람도 망령되이 죽이지 않은 것과 같다. 그 앞뒤로 싸움에 나간 것이 6, 7번에 이르렀지만 한 번도 꺾이지 않았고 용맹한 명성을 날로 떨쳤다. 적이 스스로 계략이 궁하고 힘이 줄어든 것을 알고 금산 아래에서 목숨을 걸고 한 번 싸워보겠다고 결단하였다. 50군(郡)의 비류(匪類)를 불러 모아 8, 90리에 연달아 주둔하니 연기가 하늘을 흐리고 북소리가 땅을 흔들었으니 이때가 바로 11월 24일이었다.
삭풍이 매섭게 불고 눈이 펄펄 내려 군사들의 손은 모두 거북이의 등딱지처럼 갈라졌는데 명공(明公)이 부지런히 군사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돌아다니자 군사들은 마음으로 기뻐하며 감복하여 남산(南山)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적병을 모조리 무찔렀다. 계속해서 경군이 남쪽을 정벌하여 흉추(凶酋)가 도망갈 즈음에 관산(冠山)이 해(害)를 만나고 강곤(康閫, 강진의 병영)이 수성에 실패하였다. 명공이 이에 원병을 보내어 경군과 힘을 합쳐 폭도를 주살하고 어려움을 구제하여 드디어 큰 공을 호성(湖省)에 세우고 천하후세에 변명이 있도록 하였다.
아! 금성은 호남의 보장지(保障地)이요, 인후(咽喉) 역할을 하는 곳이다. 금성이 없었다면 1성(省)을 들어 거의 해분(薤粉)에 이르렀겠지만 명공이 번경을 힘차게 막아 왕령(王靈)을 마주 대하고 관리와 백성을 진무(鎭撫)하여 요사스러운 기운을 깨끗하게 없애서 오늘날 사녀(士女)로 하여금 다시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보게 하였으니 돌아보면 어찌 그 공이 무겁지 아니한가. 대개 절의를 논하면 수양(睢陽)과 상산(常山)이지만 수고로운 공훈은 그보다 더하고, 정치는 문옹(文翁)소신신(召信臣)이지만 무(武)도 대략 겸하였다. 참으로 제갈공명이 촉(蜀)을 다스린 것과 진공(晉公)이 회(淮)를 평정한 것과 서로 천 년 사이에 백중지세이다. 아전들이 의를 본받고 무부(武夫)들이 용맹을 떨치니 온 성의 부녀가 항아리에 물을 길어와 전사의 목마름을 해소하였고, 거리에서 뛰노는 어린아이가 인형을 만들어 돌을 던지며 흉적을 효수(梟首)한다고 하니 의로운 기운이 일어나 감응하고 은혜와 믿음이 두루 무젖음을 여기에서 또 징험할 수 있겠다. 이때 창고의 재물을 덜어 우리 군대를 먹이고 날마다 성첩을 순시하여 우리 백성을 위로하니 이 땅의 경계를 둘러싼 사녀(士女)들이 지금 전접(奠接)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의 힘이겠는가. 성(省) 안의 모든 장보(章甫)가 난이 일어난 후로 봉적(鋒鏑)을 무릅쓰고 피하기를 도모하지 않고 함께 말하기를, “나주가 아니면 갈 곳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수레의 바퀴살이 모이듯 아울러 이르러 날마다 온갖 계책을 내며 교동(校洞) 근처에서 살았다. 성묘(聖廟)를 지켜낸 것은 비단 본주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사림의 다행이다.

주석
치장(鴟張) 흉포한 사람은 치조(鴟鳥 솔개)가 날개를 벌리고 덤비는 것 같다는 뜻이다.
철류(綴旒) 여기서는 국가의 위태로움이, 마치 깃술이 깃대를 든 사람의 손에 의하여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흔들리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담암(澹菴) 담암은 남송때 충신 호전(胡銓)의 호이다.
조빈(曺彬) 송(宋) 태조(太祖)를 도와 천하를 정하였다. 노국공(魯國公)에 봉해졌고 죽은 뒤에 제양군왕(濟陽郡王)에 봉해졌다.
문옹(文翁) 한(漢) 나라 촉군태수(蜀郡太守)로 통치를 잘했던 사람이다.
소신신(召信臣) 전한(前漢)의 뛰어난 관리로 남양태수(南陽太守)가 되어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고 선정(善政)을 펴 백성을 위해 이익을 일으키기를 좋아했으며 백성들의 부(富)를 위해 힘썼다. 그리하여 이민(吏民)들이 소신신을 사랑하여 소부(召父)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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